역사는 결코 완성되거나 끝난 순환이 아닌 순환적 리듬 안에서 진행된다. 새로운 운동이 시작하여 그것 자체가 소멸하면, 다시 새로운 상태의 무엇인가가 나타난다. 

그 순환은 그것 자체로 완성되었다. 서구인들은 그들이 60년 전에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소기의 성과를 얻었고, 막시즘은 그렇지 못한 것이 증명되었다고 다시 한번 말한다. 맑시즘에 대한 믿음의 쇠퇴와 함께, 서구에 살면서 맑시스트로 살지 않는 소수 지적인 그룹과는별도로 반대 진영에 의해 근원적 맑시즘의 비젼은 가끔 부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맑스가 비난한 경쟁적 경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인류를 위한 새로운 생활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것은아마 맑스 자신이 스스로 약속한 궁극적 지점일 수도 있다. 즉 착취와계급갈등이 끝나는 곳이다. 희망은 영원히 샘솟는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항상 성숙되기도 전에 샘솟는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난 반세기에 단지 자유방임 정책의 무정부주의적 양상을 더욱 단념하고 사회주의자들 속에서 개혁을 확산하고 복지국가를 지향함으로써 살아 남았다. 국유화와 개인화의 사이를 오가는것, 미국의 루즈벨트 개혁의 영원한 영향, 그리고 서유럽에서의 병행된혁명 때문에 유행에 뒤진 상투적인 표현 속에 어떤 확신을 갖게 하는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만은 상당히 추상적인 목적이다. 하이네가 말했듯이 ‘자유는 감옥의 노래‘이다. 즉 자유를 빼앗긴 자들이 자유를 소중하게 여긴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천국에서의 아담의 6시간 이후, 사람들은 자유를 던져버리는 것 외에는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몰랐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대한 충동의 개념 속에는 참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넓고, 실질적인 상황 속에 놓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관심을 가지는 존재이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로 2가지 종류의 관심이 있다. 일차적 관심과 이차적 관심이다. 일차적 관심는 음식, 성, 재산, 이동의 자유 등이다. 이는 육체적 차원에서 동물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차적 관심은 우리의 정치적, 종교적 그리고다른 이념적인 것들에 대한 충성을 포함한다. 

우리는 사랑하며 살기를원하지만, 전쟁을 한다. 자유를 원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자연 환경, 우리 자신까지를 착취하며 산다. 20세기에는 오염으로 공기와 물의공급이 위협당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이념적 관심에 대한 존엄성을더 이상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먹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자유롭게이동하는 일들이 먼저 요구되고, 평화, 선의, 보살핌, 자연에 대한 책임등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념적인 갈등의 지속, 무모한 환경의 착취, 모택동과 같이 힘은 많은 총으로부터 나온다는 고집스런 믿음 등은 인류가 열망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 직접적인 관심은 아직 육체적인 것이다. 즉 경찰에게 통행증이나 허가증을 요구 받거나 신분증에 대한 검증없이 마음대로 이동할수 있는 것과 성이나 인종 차별로 직업이나 공적 자리에서 제외되지않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자산이란 의복과 주택과 같은 개인의 생활에 적당한 외형적 형식을 의미한다. 이는 역시 우리가 말하는영토적 공간을 포함한다. 숲 속에서 명상하는 힌두교 은둔자는 의복이나 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소유도 필요없다. 

예수가 마귀에 의해 돌을 빵으로 바꿈으로써 불모한 경제를 개선하라는 사탄의 시험을 받았을 때, 예언자들이 한 것처럼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예언으로 산다는 신명기를 인용함으로써 응수했다.
이는 의식적 인간에게는 영적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 영역도 일차적관심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나는 그 차이를 두 형태의 사회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원시적 사회고 다른 하나는 성숙된 사회이다. 원시적 혹은 미발달된 사회에서 개인은 우선적으로 사회적 집단의 기능으로 생각되어진다. 이러한 모든 사회들은 계층적 권위구조가 개인을 선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야한다. 성숙된 사회는 이 반대로 그 구성원들 속에서 순수한 개인성이 개발될 수 있게 하는데 우선적인 목적이 있다. 완전히성숙된 사회의 권위구조는 성 · 계급 · 인종·생활 ·사랑·사고 그리고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식에서 나오는 것들에 대한 구별 없이 그것 자체 안에서 개인적 기능을 하게 한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실질적으로 모든 사회는 현재적 의미에서 한 때 원시적 사회였다. 좀더 성숙하고 개인을 위한 진정한 관심이 가끔 엿보이나 정상적으로는 사회가 붕괴되면서 원시 사회 형태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 이유는 우리가 무엇이기 전에 어떠한 것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며,
원시적 사회 구조가 인간타성의 모든 광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동적인 사회적 조건이 거기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일차적 관심의 영적 형태는 육체적 필요를 채운다. 그러나 그것은개인화된 사회의 문맥 속에서 통합된다. 이념이나 이차적 관심은 이론적으로 동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사회의 필요에 대한 개인의 종속화는 지속적으로 좌절되고, 연기되며 그리고 일차적 관심의 실행을우회한다. 그러한 구분을 의식하지 않는 곳에 가끔 논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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