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해져 오는 역사서에는 당시 사회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주로등장한다. 역사는 결국 굵직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과 그 주위에 있는 이들의 행적이다. 따라서 시대별로 소수의 주요한 인물에 대한 지식이있다면 역사는 매우 쉽게 다가온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말할 때 항상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직업은 왕으로바로 정복왕 알렉산드로스(BC 356년)이다.(영어로는 알렉산더Alexander.) 알렉산드로스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 나라의 크기를 넓히는 데에 관심이 많은 왕이었다. 

세계사의 큰 줄기에서 인도를 알기는 쉽지 않은데 그런 인도를 알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이 바로 아소카 왕(BC 268년)이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인도 전역을 통일한 최초의 왕이다. 아소카 왕은잔인한 전쟁광이었다가 불교에 귀의하면서 정 많은 남자로 바뀌었다. 친절한 남자로 바뀐 아소카 왕 덕분에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전파되어 부흥하였다. 그러나 그는 40세도 못 넘기고 죽는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는 속설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증명하여 준 인물이 아닌가 한다.

카르타고의 천재 전략가이면서 천재 정치가로서 포에니 전쟁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던 카르타고의 영웅이다. 혼자서 천하의 로마를 거의 잡을 뻔했던 그는 2차 포에니 전쟁을 자신의 이름을 딴 한니발 전쟁으로 불리게할 정도로 전쟁 내내 원맨쇼를 했다. 하지만 그의 조국 카르타고는 자신을받쳐줄 만한 역량이 되지 못했다. 전후 정치인으로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여 카르타고를 단기간에 부강하게 만들었으나 그를 두려워하는 로마의 공작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현재 장기판의 빨간 궁은 한의 유방을 상징한다. 이는 운이 좋으면 황제도 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출세에 있어 한계가 없음을 보여주는 서민들의희망이라고 하겠다.

 시오노나나미 작가는 자신이 쓴 《로마인 이야기》에서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바 있다.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카이사르는 정적들을 물리치고 천신만고 끝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쥔 어느 날, 양아들이 주동한 패거리들의 칼에 여러 차례 찔려 죽는다. 

희lAD 1C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의하면카이사르는 브루투스를 보고 말없이 얼굴을 감쌌다고 하였고, 비슷한 시기수에토니우스는 ‘아이야 너마저‘라고 했다는 어떤 이의 말을 전하고 있다.
근거 부족이다. 확실한 것은 이 말이 대중에게 널리 퍼진 것이 셰익스피어의 공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바빌로니아는 두 개가 존재하는데 앞선 바빌로니아로부터1000년 정도 뒤에 나타나는 바빌로니아는 신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구분한다. 바빌로니아는 최초의 문명도, 최초의 통일국가도 아니었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바빌로니아로 인해 대단히 묵직한 존재감의 국가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는 존재 기간이 아카드와 마찬가지로 그리 길지 않다. 그럼에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함무라비Hammurabi라는 걸출한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전이 너무 유명해진 탓에, 게다가 그법전에 자신의 이름이 붙어버린 탓에 다른 업적이 모조리 묻혀버린왕이바로 함무라비이다.

함무라비에게 있어 법은 여러 성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실 치열한 정복사업을 하면서도 법체계를 정비했다는 것은 체제확립의 큰 구상을 완성할 역량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일한 함무라비는 운하를 건설하고 역법과 종교질서를 정비했다. 그리고 관료제와 법체계를 확립하여 내치를 다졌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제대로 된 군주가 해야 할 국가통치의 본을 함무라비가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다. 여담이지만 20C 중반에 있었던 발굴로 인해 최초의 성문법이라는 자리는 함무라비 법전이 아닌우르 왕조 남무Nammu 왕의 법전Code of Ur-Nammu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역사는 항상 새로운 발견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수시로 ‘사실‘
이라고 하는 것이 바뀐다. 수시로 바뀌는 것을 ‘사실‘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사실 그러하다.

모범생 바빌로니아의 뒤를 이은 것은 철기로 유명한 히타이트이다. 히타이트는 그야말로 군사강국이었는데 그들은 철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아는 역사상 최초의 민족이었다. 철기유물은 히타이트가 역사에 등장하는시기인 BC 20C경부터 발굴되고 있다. 그런 히타이트는 부침을 거듭하다BC 15C경 제국 규모로 성장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히타이트의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와 맞물리는데 통상적으로 세계사에서는 이때를 철기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현대에서도 대제국 히타이트의 멸망 원인은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 가운데 정체가 불분명한 해양세력에 의해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해양세력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당시 문명이 막 일어나기 시작한 그리스인들로 보는견해가 강하다.

그리스가 세계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전이었던 시기에 그리스인들은이렇게 자신의 등장을 은근히 예고하고 있었다. 그 후 그리스인은 세계사에 등장하고 나서도 계속 바다를 활동무대로 삼았다. 그런 바탕 위에 그리스 문명이 꽃피기 시작하면서 아테네를 비롯한 많은 폴리스들은 해양강국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의 이야기이다.

간단하게 말했지만 학문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설 때는 더욱 어려워지는데 과학의발달을 공학의 발달로 연결시켜 현실화하는 것을 이집트인들은 해낸 것이다. 광활한 나일강 유역에 대한 측량과 거대한 피라미드의 축조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문자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구 문명의 선두주했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도 이른 시기에 문자가 사용되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알려진 히에로글리프Hierogrlyph는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Cuneiform, 文와 더불어 세계 최초의 문자로 알려져 있다.

카데시 전투는 시기가 BC 1308 년에서부터 BC 1274년까지 그 설이 다양하다. 참고로 브리태니커 Encyclopaedia Britannica에는 BC 1299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 전투를 위한 준비와 이동, 전투가 끝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는 이집트의 기록에서 실제 전투로 추정되는 시점을 역사가들이 달리 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어찌되었건 카데시 전투는 기록상으로알 수 있는 문명 간에 발생한 최초의 전쟁으로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왕 무탈리스 2세가 카데시라는 지역을 놓고 싸운 전투이다.

람세스 2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체면은 제대로 구겨졌지만 어찌되었건 살아서 돌아왔으니 SNS도 없는 세상에서 얻어터진 것을 이실직고해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파라오의 체면도 있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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