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오면서 여권은 더욱 신장되어 황제라 할지라도 축이 불가능한 정도가 되었다. 여성 또한 결혼과 이혼을 결정할수 있었고 자유로운 연애는 물론 불륜 또한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황제와 결혼하기 위해 로비를 했던 경우도 있었다. 로마를 포함해 고대의 어느곳이든 남성 우위의 사회구조였음을 부정할 순 없으나 로마의 여권은 현대 이전 어느 시대,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연구로 티베리우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우수했다는 쪽이다. 티베리우스는 재정을 안정시키고 금융 위기를 극복했으며 게르마니아 공략을 접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다만 당대에 평가가 안 좋았던 주된 요인은 사치와 향락을 억제하기 위해 검투 경기와 같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치세 말년에 카프리섬의 빌라 요비스villa20년에 은거하면서 세운 대리인이 크게 실정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인기를 크게 갉아먹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처음부터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란 것은아니었다. 티베리우스를 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되는 사람은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지명 과정은 가히 일일 드라마를 보는 듯한데 처음그가 염두에 두었던 사람은 마르켈루스Marcellus라는 청년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며 딸 율리아의 첫 남편이다. 사실 마르켈루스가 누구든 간에 아우구스투스가 사위로 삼았으니 그가 황제의 양자가 되어 차기 황제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는 요절한다. 

하지만 그는 요절한다. 탄탄대로가 눈앞에 깔린 상황에서 세상을 등졌을 때 그의 나이는 약관된 율리아는 이팔청춘靑春이었다. 다시 생각나는 말,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그때까지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를 과하게 돕던 하늘이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후계를 염두에 두고 통치 수업을 받던 두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Lucius Caesar가 차례로 요절한 것이다. 참 망연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시한 인물이 바로아그리파 포스트무스Agrippa Postumus와 티베리우스, 마지막 남은 후보군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율리아의 손자이다. 피가 한 방울 정도는 섞인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티베리우스는 징검다리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이것마저도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 게르마니쿠스마저요절하였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아우구스투스가 찍으면 죽는다고 해야 할지경이다. 황제의 데스노트. 그래서 포스트무스가 그렇게 행동한 것이었을까

모든 드라마가 끝나고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최종적으로 황제가 된 사람은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가 그토록 원했던 혈통 내 계승은 이루어지지않았고, 가장 후순위 후보가 등극한 것이다. 역시 제왕은 하늘이 점지하는것일까.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는 넘어갔고 아우구스투스는 사망했다. AD14년이었다. 왕망에 의해 전한이 무너지고 6년 후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게르마니쿠스마저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5년 후인 AD 19년에 세상을 떠난다. 먼저 죽으라던 티베리우스는 멀쩡하게 살아 있을 때였다. 게르마니쿠스의 나이는 34세 아우구스투스가 관두껑을 열고 일어날 일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로마는 안정을 찾은 사회였다. 내전을 종식시킨 후 추진한 정치 개혁으로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제가 효율적으로 변화하였다. 법령이 개정되고, 관료제가 자리를 잡았으며 원로원, 민회 등 공화정 시대의 제도 개선도 이루어졌다.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병력을 감축하였고 직업군인제도를 정착시켰으며 해군을 창설하여 지중해의 치안을 바로 잡았다. 각종빈민구제 정책을 펼쳤으며 종교 개혁도 뒤따랐다. 

당시의 종교란 로마 전통의 다신교를 말하는 것으로 신전과 각종 종교의식 등을 말한다. 여기에오랜 내전으로 파탄 난 재정을 재건하였고 각종 경제부양 정책을 시행했다. 제국으로 막 태어난 로마는 초대 황제의 노력으로 강대국의 기틀을 만들어갔다.

아우구스투스는 참으로 부지런하게 일을 하였다. 이집트를 사유재산의로 갖고 있었건만 그는 검소한 생활과 격의 없는 태도로 로마 시민의 깊은사랑을 받았다. 그가 시행한 모든 정책이 성공하였던 것은 아니었으나 로마의 내실을 다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제정이 공화정을 대신하게된 것이 궁극적으로 로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대해진 로마를 다스리기에 공화정은 분명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정이 있을 수 없는 역사에서 로마의 제정화는 많은 가정을 던져주는 화두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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