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발리리아 시절부터 타르가르옌 가문은 그들의 사자(死)를 땅에 묻지 않고 불로태우는 관습이 있었다. 바가르가 화염을 내뿜어 불을 붙였다. 블랙파이어는 왕과 함께 태워졌으나, 이후 마에고르가 다시 꺼냈을 때는 칼날이 약간거무스레해졌을 뿐,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발리라아 강철은 일반적인 불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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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적 인물은 철학자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는 철학자의 사유에 개입하고 철학자의 사유를 중재한다. 철학자들이 구사하는 개념적 인물들과 관련하여 들뢰즈는 몇 가지 주의할 사항을 언급한다.
특히 이런 문제는 니체와 나치즘의 관계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니체는 빈번히 귀족과 노예를 구분하고 노예적인 삶을 혐오하는 한편 귀족적인 삶을 찬양한다. 노예적인 삶은 겸손함을 특징으로 하고 귀족적인 삶은 자신의 힘에 대한 긍정을 특징으로 한다. 니체의이러한 관점과 표현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나치즘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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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개념, 즉 우리의 철학에 지속적으로 의존하면서 그것을 조금씩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개념에서 떨어질 수가없으며, 그 틀을 개념화되지 않은 실재 세계와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도없다. 따라서 나는 한 개념들이 실재 세계의 거울로서 절대적으로 옳은지를 탐구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제안한다. 개념의 기본적 변화에대한 우리의 평가 기준은 실재 세계와의 일치라는 실재론적 기준이어서는 안 되며 실용적인 기준이어야 한다. 개념들은 언어이며, 개념과언어의 목적은 의사 소통과 예측을 효과적으로 하는 데 있다. 그런 일이 언어와 과학과 철학의 궁극적 임무이며, 개념틀은 최종적으로 이임무와 관련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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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관계하는 의식이야말로 그것이라고 하는 것이 헤겔의 대답이다.
‘모순과 대립을 헤치고 들어가 모순과 대립의 극복에 대한 확실한 충실감을지닐 수 있는 의식은 ‘앎‘의 심화와 확대를 추구하는 의식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자기와 세계를 끊임없이 넘어서 가는 의식은 아무리 평범한 의식이라 하더라도 앞에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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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의 일자는 라이프니츠의 단자monad를 방불케 한다. 이는파르메니데스 이후 존재론의 대 수술이라 할 수 있다. 바디우의 복합물은 라이프니츠의 단자 개념에 많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두 말 할필요가 없다. 철학은 결국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설치되어 있는 문의 돌쩌귀와 같이 아무리 그 주위를 맴돌아도 결말은 나지 않는다. 바디우의 존재론 역시 파르메니데스 성전 대문의 돌쩌귀를 맴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존재론은 일자의 문제와 씨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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