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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 팀 켈러의 인생 베이직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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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반드시 죽게 된다.

저주처럼 느껴지는 '죽음'의 예언은 사실 세상에서 가장 분명한 진실이다.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가혹한 운명.

죽는다는 건 막연한 관념도 아니고, 낭만적인 이별도 아니며, 누군가의 말처럼 소멸, 초월, 자연으로의 회귀... 같은 철학적 논쟁거리도 아니다.

그것은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다. 고통의 총체다. 아무도 비껴갈 수 없는 잔인한 결말이다.




나는 비교적 죽음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힘겨운 투병중에 있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내디면 죽겠구나 싶은 순간들을 어찌어찌 견뎌냈던 적도 있고, 그래서 죽음이 가까워질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피폐한지도 알고있으며, 함께 투병했던 사람들도 꽤 많이 떠나보냈다.


그래서 좀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고통과 죽음에 관심이 많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내 내면은,

상상 속에서의 그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

요컨대, 
더 열심히 살껄, 더 자아를 실현할껄,
아니면 더 여행도 많이 다니고 연애도 실컷 할껄... 과 같은 종류의 후회는 결코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그런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사람인데도 사실 진짜 죽음 앞에 서니, 전혀 다른 내가 등장했다.


내 자아는 휘몰아치는 죽음의 그림자앞에 너무도 연약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 힘없고 연약하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인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그리고 철저히 혼자라는 생각.

내 곁에 물론 가족과 친구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홀로 그곳에 서 있었다.

그 때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 예수님 뿐이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2:14-15)"


당신의 죽음으로 나의 죽음을 대신하신 분, 예수.

나는 죽음의 길목에서 그 분을 그렇게 만났다.






팀 켈러는 '죽음에 관하여'에서

나의 죽음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은 무엇인지를 제시하며 죽음과 그 너머의 최후 승리를 향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죽음은 우리를 흔들어 깨워 이생이 영원하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팀 켈러의 말처럼 죽음은 우리의 착각을 깨운다. 일시적인 것들에 마음이 뺏겨 영원한 것을 잊고 있던 어리석은 우리는,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렌즈로 나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죽음을 깨닫고, 생의 유한함이라는 한계에 놓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땅에서의 삶을 허무하게만 바라보아야할까.


아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바울이 이렇게 담대하게 죽음을 '조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모두 죽음에 맞서 승리할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자는 죽든 살든, 결과와 무관하게 늘 죽음을 이긴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여 당신의 살아계신 구주가 되셨을진대 죽음이 당신에게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슬퍼하되, 소망을 품을 수 있다.
그 슬픔에 잠식되어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기에 우리도 장차 그분의 부활에 동참한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당신에게 이 소망이 없다면 죽음을 대할 때 어찌할지 막막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곪아서 당신을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슬픔에 소망을 더할 수도 있다." 


"슬퍼하되 소망을 품으라. 부정이나 착각에서 안심하고 깨어나라. 죽음 앞에 웃으며 장차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기뻐 노래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손을 잡고 계시면 당신도 노래할 수 있다."




그렇다.

죽음 앞에서도 나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
환난 가운데에서도 나를 찬송하게 하시는 분.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죽음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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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에 관하여 팀 켈러의 인생 베이직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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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쏙 들어오는 팀 켈러의 인생베이직 시리즈 첫 번째 책인 '태어남에 관하여'.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 문장은 육체의 '태어남'을 넘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즉 '거듭남'을 경험해여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를 잘 드러내는 명제이다.


저자인 팀 켈러는 이 명제 아래 모든 인간의 출생, 그리고 그 가운데 신자들이 경험하는 두 번째 출생과 그 후에 영적 성장을 이루어가는 삶의 여정을 잘 묘사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라는 존재, 하나님과의 관계, 육과 영, 구속사의 모든 흐름까지... 내가 체험하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이 '태어남'이라는 단어로부터 출발했음을 새삼 느꼈다.






이 책의 인사이트는 사실 두 번째 쳅터인 '거듭남'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듭남. 다시 태어남.

사실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자아를 실현해 가는 게 아닌, 완전히 다른 '새 사람'이 된다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고데모도 예수님께 똑같은 질문을 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를 향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하신다.


이 얼마나 알쏭달쏭한 말인가.


그런데 육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 말이, 진짜 예수님을 만나면 단번에 해결된다. 예수님을 단지 지적으로 아는게 아닌,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확실히 체득되는 것이다.



책을 통해 처음 생각해볼 수 있었던 부분도 있었다.


"거듭남이란 
미래가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가슴이 뛰었다.

내 안에 미래에는 완전하게 이루어질 그 무엇이 부분적으로나마 들어와있다는 사실이 신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이 이미 내 안에 있고, 그렇기에 은혜 가운데 날마다 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야 말로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짝이나마 완전함을 맛보고 살 수 있는 신자들의 특혜가 아닐까 싶다.



놓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다.

거듭난 신자는 반드시 '자라야'한다는 사실이다. 육적으로는 당연한 이 사실이 영적으로는 왜 소홀히 여겨지느지 모르겠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은 많은데, 그에 걸맞게 열매맺는 삶을 사는 신자는 드물다. 남 얘기가 아니라 내가 그렇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까지도 사랑하고 있는가.

나의 생각, 말, 행동에서 방종을 제어하고 이타적으로 베풀고 있는가.

나는 주변에 생명을 심고 있는가.

나는 불확실한 인생의 모든 문제 앞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있는가.

팀 켈러의 질문 앞에 여전히 자신있게 yes 라고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내가 거듭난 성도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자라가는 것' 뿐일텐데도 왜 나는 여전히 그대로일까.



이런 모순 앞에 놓인 나에게 저자는 은혜안에서 자라나는 비결을 제시했다. 


"자신이 한 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자만이 강해지고,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만이 실제로는 자기 목숨을 얻는다."




너무 어려운 말같지만, 이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결국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수 밖에 없었다.

진정한 거듭남(태어남)과 영적 성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고싶지 않다. 그 죽음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해도 솔직히 죽고싶지는 않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라 하신다. 죽을 때, 다시 살 수있게 된다고.


말 그대로 복음의 역설이다.





태어남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자연스레 죽음으로 생각이 흐르게 된다.

그래서 이 '태어남에 관하여'와 함께 죽음 시리즈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태어난 이상 죽음은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같은 것이기에.




'죽음에 관하여'에서는 팀 켈러가 어떤 얘기들을 전할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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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두신 노래 - 온 세상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생각
샐리 로이드 존스 지음, 제이고 그림,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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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예쁜 동화책 한 권을 읽었다.

'내 마음에 두신 노래'.




마스크를 안쓰면 문 바깥도 나갈 수 없는 팍팍한 세상을 살다가 이렇게 따뜻하고 예쁜 책을 읽으니 때묻었던 마음이 정화된 느낌이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성경에 쓰여진 그 아름다운 세상이 아닌 것만 같다.


바이러스 공포, 고립과 소외, 거짓 뉴스, 서로를 향한 분노와 욕설과 흠집내기...

무엇보다도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기피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눈물나도록 아팠던 요즘이다.





셀리 로이드 존스의 따뜻한 말투로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왜 우리가 여전히 소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들으며 슬펐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됨을 느꼈다.






보통 '소망'이라 하면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소망'은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조나단 에즈워드는 신자들에게 세가지의 확실한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1.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도 결국 좋게 바꿔 주신다는 소망

2. 우리의 좋은 것을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소망

3. 가장 좋은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망


나의 힘겨운 하루 하루가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결국엔 해피엔딩을 이룰 거라는 확실한 소망을 붙들 수 있음에 감사하다.







내 영혼을 향한 선포.

그림 속의 아이가 꼭 나처럼 느껴졌다.
나의 불안과 우울, 아픔의 이유에 관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하는 말만 듣고, 자신을 향해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더 큰 소리로 맞서길.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늘 선포하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42:11"







이쁜 그림들로 눈호강, 따뜻한 글들로 가슴 따뜻했던 시간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두신 노래'는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며, 낙심과 불안이 아닌 기쁨의 노래다.


그렇게 그분께 소망과 기쁨의 노래를 아름답게 불러드리는 마지막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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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걸어오다
박신일 지음 / 두란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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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혜가 걸어오다'라는 제목만큼이나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불행을 이긴다'는 부제가 마음에 와닿는다.


문장을 읽는 즉시 영원할것만 같았던 나의 불행한 순간들이 떠올랐고, 정말 그 불행까지도 다스려 선하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밖에 없는 내 인생에 잘 어울리는 문장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나와 너무 닮아있는 '야곱'에 관한 얘기다.

속이는자, 도망자, 은혜입은 자 라는 세 개의 쳅터 안에서 이기적이고 욕망에 가득찼던 야곱이 그의 인생을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나에게 이미 익숙한 야곱 이야기이지만 
책을 읽으며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놓쳤던 부분에서 깊은 묵상을 할 수도 있었다.







'은혜가 걸어오다'를 읽으며 꼽은 나를 복음으로 살게 한 문장은 이렇다.

"우리는 안장 밑에다 죄를 숨기고 깔고 앉은 죄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이를 낳다가 죽은 라헬이었습니다. 이 죄인이 살려면 대속물이 필요합니다. 그 대속물이 암양 라헬입니다. 이 라헬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사야 53장에 라헬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우리의 완전한 대속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죽음심으로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야곱과 라헬의 결론입니다.(p.158)"




라헬과 예수님을 연결시켜 해석한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고, 결론 역시 은혜가 되었다.

성경에서 라헬은 히브리어로 암양(female sheep, ewe)이라는 뜻인데 
이사야 53장의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에서도 이 라헬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암양으로서 라헬이라는 단어의 첫 번째 사용이 죄로인한 죽음을 나타냈다면,
이사야 53장의 죄악을 담당한 어린양 예수는 우리 죄를 담당할 완전한 대속물로서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죽는 것도 모르고 있는 라헬과 같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흠이 없고 완전한 라헬을 준비하셔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다(p.156)"







1. 속이는 자

처음,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로 변장하여 축복을 빼앗았다.


2. 도망자

자신을 죽이려는 에서로부터 도망쳐 밧단아람의 라반에게로 간 야곱은
거기서 라헬을 얻기위해 7년을 봉사하지만 라반의 속임수로 레아와 결혼, 결국 7년을 더 일하기로 약속하고 라헬을 얻는다.

속이는 자 야곱은 '뛰는놈 위에 나는 놈'인 라반에게 제대로 속임을 당하여 힘겹게 그를 위해 일하면서도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고된 삶을 산다.


3. 은혜입은 자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라반을 떠나 다시 벧엘로 갈 것을 명령하시고, 그에게 함께하고 지키실 것을 약속한다.

그의 두려움의 근원이었던 에서와의 상봉도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그렇게 험악한 세월은 견딘 야곱은 '이스라엘'로 칭해지며 훗날 이스라엘의 총회를 이루는 12지파의 아버지로서 세워지는 은혜를 입는다.





나도 야곱처럼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늘 무언가를 계획하고, 내 뜻대로 쟁취하기 위해 모든 걸 바쳤었다.

하지만 야곱의 인생처럼 나 역시 이제서야 인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져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내 삶은 지금 중반쯤... 와 있을까? 
잘 모르겠다.


많은 아픔과 고난을 겪고서야 나는 내 뜻을 내려놓았다.
그럼에도 야곱처럼 아직도 죄악된 본성이 남아있어서, 여전히 매일 '은혜 위에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연약한 죄인이다.

하지만, 이제 내 계획대신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하고
지금은 막막하고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내 문제들까지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드리며

그저 하나님만 의지하는 지극히 '단순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날마다 구하고 바란다.





박신일 목사님의 말처럼 '죄송한 은혜'를 구하는 나는,

이제 막 돌아서서 주님께로 걸어가는 탕자의 귀향길에 서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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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팩트체크 - 기독교 핵심 질문에 26권의 변증서로 답하다
안환균 지음 / 두란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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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팩트체크는 '신앙의 물음에 경험과 감정이 아닌 변증의 답을 준비하라!'는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자주 질문되는 기독교 핵심 질문에 26개의 변증서로 답하고 있는 책이다.


26장의 주제마다 그 주제의 논지에 근거가 되는 책을 소개하고, 거기에 저자인 안환균 목사님의 해석을 덧붙여 변증 기독교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법한 의문점과 질문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대중적으로 권장할 수도 있는 책이지만, 동시에 제대로 그 질문을 파고들어 생각하기 시작하면 너무도 방대하고 깊은 '블랙홀' 과도 같은 책이라고 느꼈다.


내게는 낯선 단어인 '기독교 변증'이라는 분야에 잔뼈가 굵으신 안환균 목사님은 '이성과 논리'로 기독교를 변증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깨닫고 오랫동안 이 분야를 연구해 오신듯 하다. 


그래.

가장 전도하기 어려운 대상은 세상 학문과 가치관으로 이미 사고의 틀이 짜여진 지식인층인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소위 '은혜'로 불리우는 감정적인 호소나 체험 위주의 전도를 하려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



처음 책장을 펼치며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지는 비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전해야할지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 했는데, 사실 읽어나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책은 5부로 짜여져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불신
2. 과학과 신앙
3.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
4. 유일한 구원자, 예수
5. 참된 회심



가장 읽기 힘들었던 부분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과알못'인 내게 '과학과 신앙'은 한 번씩 더 깊이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이 많았기에... 다른 부분보다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 역시 기존에 내가 성경을 읽으며 나름대로 해석했던 종말과 휴거, 재림과는 조금 다른, 처음 접해본 해석들이 많아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꼽은 책 속의 한문장처럼 나는 늘 내가 생각했던 방식으로만 말씀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상고'하면서 깊이있게 생각하고, 그 증거가 될만한 말씀 구절들을 떠올려보며 갇혀있던 나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말씀대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노력했던 시간이었다. 


"무언가를 믿을 때 믿고 싶은 것이어서 믿지는 말라.
또한 어떤 생각을 품을 때 늘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에 계속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라.
성경적인 것을 믿으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말씀들에 상반되는 당신의 생각들을 테스트해 보라."

- <지옥은 없다?> 프랜시스 챈 외, 두란노 -


말씀을 대하는 나의 시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 문장이다.

보고싶은 것, 믿고싶은 것만 보고 믿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물론, 그러한 지혜와 겸손 역시 하나님이 주셔야만 가능한 것이니,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말씀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고.

 



책이 워낙 방대한 주제를 담고 있어서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몇 부분들을 발췌해서 다시 떠올려보자면,



첫 쳅터였던 '의심을 의심하다'에서 '이 시대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일곱가지 이유' 부분을 먼저 꼽고 싶다.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 다원화.

지금의 시대정신을 요약하자면 저 3가지 단어로 충분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시대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저,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보기에도 그럴듯한 그 시대적 흐름에 휩쓸려 그 생각이 진짜 맞는 것인지도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은 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간다.

문제는 지금의 시대정신이 기독교에 완전히 배격되는 흐름이라는 것.

그래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진리에 사람들은 완전히 거부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책에서 언급했듯이 '상대성'은 그 자신도 상대화시키는 것이기에 한결같은 상대주의는 결국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게 다 맞는 것일 수는 없고, 모든 게 다 진짜일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의미를 찾는 존재고,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인상적인 구절.

하나님의 통치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딜레마가 바로 '악과 고통'이다.

인간의 죄 때문이야. 라고 단순 무식하게 대답하기엔 너무 부족한 느낌... ㅠ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임의적으로 나타나는 악과 고통에 대한 신비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계획에 의한 신비보다 타락한 피조세계 자체에 대한 것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세상에 있는 악과 고통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 인간의 책임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세상의 악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신것.
세상의 악과 고통으로 인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어떤 이미지로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은 모두 거짓 신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기독교와 세상과의 대세적 관계에 대해 대답하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조금은 개인적인 질문이다.

하나님은 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더 많이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도 잊을만 하면 한번 씩 튀어나오는 볼멘 불평이기도 하고.



특히 하나님의 뜻이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면 기도해도 소용없잖아! 라는 생각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자괴감에 빠지곤 했던 내게 이 책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위로와 도전을 주시는 마음을 받았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변치 않으신다는 말씀만큼이나 마음을 바꾸신다는 말씀도 많다. (중략)
저자에게 기도는 파트너십, 즉 하나님과 인간이 미묘하게 상호 작용을 하면서 거룩한 뜻을 이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강요나 완승을 전제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상호교감이 먼저 이뤄저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꽈 협력하는 가운데 은혜가 작동되면서 자연스럽게 파트너십이 형성된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향해 묻는 나의 질문에 '인격적으로' 대답해 주시는 하나님.
나의 조그마한 의심과 질문도 나무라지 않고, 인정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순서 없이 기억에 남는 부분들만 언급하려다 보니 깊이있게 책을 다루지 못한 것 같아 아쉽지만,

내 부족한 서평을 통해 이 책이 어떻게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었다면 만족한다.



앞으로도 나는 두란노의 책들을 통해 하나님을 지적, 영적으로 더욱 깊이 만나고 싶다.
또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적 예수'에 대해 자신있게 변증할 수 그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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