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82
그러나 부(夫)가 구체적인 경우에 처의 사정과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의 주장을 심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굴복시키기 위해, 성행위 이후에는 자신의 뜻대로 갈등이 해결된다는 망상에 빠지는 등 여러 가지 불순한 의도와 잘못된 판단으로 처를 강간하는 것은 상대를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당한 욕구충족과 의사관철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물화하는 것이다. 이 경우 부부의 성은 저주가 된다. 성적 결합이 부부 사이를 유지하는 중요한 용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보다는 정신과 영혼의 긴밀한 결합이 두 사람의 삶을 받쳐줘야 하며, 결합은 두 인격체의 깊은 사랑과 신뢰에 그 뿌리를 둬야 한다.
p.83
성적 자기결정권은 그 권리의 성격상 특정인에 대해 이를 포괄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우에 매번 개별적으로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남편의 성적 교섭 요구는 처의 소극적인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이때 남편은 현안으로 대두된 갈등 해소를 위해 대화와 설득 등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도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동거의무의 불이행을 전제로한 이혼 청구의 방법으로 사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국가가 명백하게 불법으로 규정한 폭력적인 방법 등을 동원해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시도를 부부 사이라고 용인할 것은 아니다.
... 부부강간의 인정이 처에 의해 오용되거나 남용될 가능성이 있거나 입증곤란의 사정을 들어 그 같은 해석에 반대한다는 취지의 견해가 있으나, 이는 수사와 재판 등 형사사법 절차에서의 사실인정 문제다. 이를 내세워 폭력을 수단으로 한 부부강간을 부정하는 구실로 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p.88
호칭에 담긴 사회적 평가를 무시하고 기능만 담아 표현하자면 법관도 판결공이나 재판공에 다름 아니다. ... 재판이나 판결문 작성에는 전문가라는 의미가 담여 있는 것으로 읽힌다.
판사는 왜 판결공이 아닌가
p.94
오래전 연구지만 산재사고에 관한 유명한 연구가 있다. 1931년 보험사에 근무하던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산재 사례분석을 통해 통계적 법칙을 발견했다. 산재가 발생해 중상자가 1명 나왔다면, 그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1대29대300의 법칙이라고도 부르는 하인리히 법칙이다.
p.95
죽음조차 비용과 편익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기업의 비정함에, 그 많은 전조를 깡그리 무시하는 그들의 대범함에, 그 비정을 무정하게 규율하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무력하고 성긴 법을 들고 정의의 쪼가리라도 찾아보려는 내 한심한 한계에 신물이 났다.
사람의 생명을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의 숫자로만 파악하는 부도덕한 기업에게는 손해배상과 더불어 징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p.96 제너럴모터스가 수년 전부터 연료탱크가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제품회수보다는 재판으로 해결하는 쪽이 비용이 덜 들 것으로 판단, ... GM의 내부 보고서가 공개
p.97
위험을 외주화하고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이 사망하는 나라, .... 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옴에 가장 적확한 단어는 퇴근이나 귀가일 수 없다. 생환이다.
p.115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깊은 고통에 빠질 때 우리는 기꺼이 그 고통과 슬픔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이다(영화 <공각기동대>).
p.133
아이들을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출생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고, 이 아이들을 완전히 태어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꾸준한 관심과 지지였다.
그 후로 나는 ‘사랑과 훈계, 위로와 독려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다고 실망하지 말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거듭 다짐했다.
공허한 희망과 충고의 말도 그만뒀다. 대안 없는 충고와 희망이 아이들에겐 오히려 독이었다.
더 나은 삶을 현재와 대비해 고통을 키운다는 점에서,
변화할 수 있음에도 이런 진창에 머무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식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비하하고 학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동시에 아이들의 처지가 아무리 암담하고 변화가 미미해도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p.168
당시 재판장은 “내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고 한다.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하며 요지부동이다. 결국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심리상태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설명했다.
p.224
법원에 온 이후 한동안 세상이 아름다운지 추한지, 평화로운지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곳인지, 살 만한 곳인지 지옥인지 헷갈렸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무엇이 진짜 세계인지 현실감마저 떨어졌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의 종착점이 권태와 무료함이듯, 재판도 무덤덤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살인도, 강간도, 피고인도, 피해자도 그저 활자로만 보이고, 이 흉측한 사건들조차 오직 법원이라는 매트릭스 안에서만 일어날 뿐 내 현실세계에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고 인식한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온 세상이 평온해졌다. 나는 매트릭스와 현실세계를 분리함으로써 겨우 그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세계를 떼어놓고 분리된 인격으로 살아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착시이자 도피였다. ... 두 세계는 분리할 수 없고, 가상의 매트릭스도 아니다. 서로의 현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분리된 채 살 수 없다.
p.225
... 최선의 길은 사제와 공무원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다. 끊임없이 단련하고 노력해야 한다. 구도의 길은 멀고 험하지만, 항상 그 길 위에 있어야 한다. 매번 길을 벗어났다 다시 복귀할 수도 없다. 그건 위선적인 삶이다.
p.232
나는 사법농단을 야기했다는 동료 법관들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행동이 나빴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악행도 처음엔 다 선의고, 끝까지 선의일 수 있다. ... 문제를 제기한 법관들이 사법부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p.233
조직의 논리를 내세워 그들이 순진하다고 욕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 누군가의 순수함이 정의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배를 띄웠다면, 고루한 반대편은 격랑 속에서 배의 균형을 잡는다.
p.238
상황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결론을 요구해도, 시절이 아무리 암담해도, 자신의 실수가 아무리 끔찍해도, 그들은 단일대오에서 벗어나 꿋꿋이 혼자만의 길을 갔다. 앞서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너무 외로워서,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을지언정(오르텅스 블루, <사막>), 그들은 잘못된 길을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엇이 바른 길인지 알기 어려워 적극적으로 길을 떠날 수 없다면, 적어도 필경사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1999)라며 저항해야 한다.
p.243
과연 무엇이 바르고 곧은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는 것’이라 했고,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칸트는 ‘도덕적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라 했고,
존 롤스는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주되, 사회적·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있을 때는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주는 것’이라 했고,
마이클 샌델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고, 로널드 드워킨은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p.266
병원에서처럼 법정의 언어 역시 삶의 고통을 표현하는 통증언어다. ... 그러나 내가 치아와 허리통증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듯, 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노련하고 성의 있는 의사가 되어 통증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그의 태도와 표정, 주변환경과 행동을 종합해서 통증을 눈치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