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한번은 중간쯤 읽다가 실패했고 두번째 시도에서 어찌어찌 완독은 했지만 문장을 읽어내기도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왜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김영하작가의 번역본이 있다는 걸 알고는 우리 도서관에 들여서 읽어보았다.우선 기존의 고전들이 가지고 있는 정중하달까 각이 잡혔달까 하는 딱딱한 번역투에서 탈피한 것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어떤 문장들은 지나차게 솔직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나는 동료들의 이름을 댔다."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인데?"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좀 재수 없었다. (p.22)하지만 덕분에 술술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엄청난 규모의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만 닉 캘러웨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는 눈치다.지나치게 공들여 격식을 차린 그의 말투는 우스꽝스러움을 간신히 면할 정도였다. 자기소개를 하기 전 얼마 동안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p.65) "공부는 옥스퍼드에서"라는 대목을 아주 서둘러, 아니 거의 내뱉자마자 되삼키려는 듯이, 혹은 그 말이 목에 걸려 자신을 괴롭힌다는 듯이 말했던 것이다.(p.84) 아름답고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를 가진 데이지는 개츠비가 처음 만난 '상류층' 여자였고 그녀를 얻기 위해 그는 온갖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다. 그러나 그의 수상쩍은 과거와 지나치게 화려한 차림은 웃음거리가 된다. 어쩌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이 가련한 남자에 대한 조롱이 아닐까?오직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한 개츠비, 내가 내놓고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바로 그 인물에게만은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 밖에 없다.(p.12)번역자인 김영하 작가는 개츠비의 위대함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개츠비의 '위대함'은 그가 인류에 공헌했다거나, 뭔가 엄청난 업적을 쌓았기 때문에 붙은 수식이 아니다. 그는 무가치한 존재를 무모하게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의연하게 그 실패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여전히 자신의 상상 속에 머문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위대하다. 따라서 그 위대함에는 씁쓸한 아이러니가 있으며 불가피한 자조의 기운이 스며 있다.(p. 237)
브링턴 아카데미의 도서부 부장으로서 <전설 대백과>를 물려받아 책을 채워나가던 카밀라가 단 한 개의 전설만을 남겨둔 채 도서관에서 사라졌다.카밀라의 실종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절친인 미카엘라. 괴담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을 끔찍이도 무서워하는 미카엘라지만 주저없이 카밀라를 찾아나서는데 뒤이어 등장한 유진과 브링턴 아카데미의 회장인 신시아, 원예전문가인 리가 뒤를 따른다. 카밀라가 남긴 단서들을 쫓아 험난하고도 흥미진진한 모험을 떠나는 네 친구들.독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영리하고 적극적인 네 사람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을 응원하며 지켜볼 뿐.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이고도 박진감 있는 문장들이 나를 그들의 곝으로 자연스레 이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하는 내내 바람을 느끼고 소리를 같이 듣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함께 본다. 참 생생하고 선명해서 잘 만든 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다.특히,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이 여학생인 미카엘라와 신시아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떤 기억들은 냄새와 더불어 또는 냄새로 인해 떠오르기도 한다. 수영장 깊은 바닥처럼 파란 색상의 감각적인 표지.처음엔 만화인줄 모르고 받아들었다.전반적으로 간략화 된 그림체이다. 건물들은 직육면체이고, 인물들의 손과 발이 극도로 생략해서 표현되었다. 그럼에도 단순한 눈, 코, 입에서 표정들이 생생하고 풍부하게 읽힌다.'그해 나는 국민학교 이학년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봤던 서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서울 외곽의 아파트에 살면서 재테크에 열을 올리느라 바쁜 엄마 덕분에 많은 시간을 집 대신 수영장에서 보낸 민선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알게 모르게 형성되던 권력구조, "맞벌이 집 애랑 놀지마."라는 어른들의 불합리한 언행들. 나름대로 치열하게 헤쳐 지나온 어린 시절, 몰라서 행했거나 알고도 저질렀던 악행들을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나의 암울했던 기억들도 필연처럼 자동 소환된다.책 전반에 흐르는 파란색 때문인지 내용때문인지 우울함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한 끈적하고 묵직한 감정을 만나게 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