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내려온다

SF를 배제했다기 보다는 굳이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는 공상과학이니 과학기술이니 하는 것들이 어렵고 부담스러워서였다. 그런데 최근 몇 편의 SF소설을 접하고 보니 ‘이런 소재도 재미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여전히 어렵긴 하지만)
제목을 보면 국어를 주제로 한 에세이일 것만 같은 이 책에는 7편의 단편소설이 담겨있다. 문장이 쉽게 술술 읽히지는 않았다. 테드 창의 ‘숨’을 읽었을 때처럼 작가의 지식 배경이 궁금하면서도 경이로웠고 어쩐지 번역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원래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로서는 계속 같은 문장을 곱씹고 있는 시간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여러 번 다시 읽어볼 만큼 놓치기 싫은 아름다운 문장이 참 많다.
‘마지막 로그’는 안락사 요양소 실버라이닝이 배경이다. 실버라이닝은 본인의 여명을 스스로 결정한 사람들이 묵는 마지막 숙소인 셈인데 입소자에게는 스케줄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의 안드로이드가 배정된다. 차곡차곡 마지막 날을 향해 시간을 보내는 A17-13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 조이, 은모든 작가의 ‘안락’과 테드 창의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를 떠올렸다. 지능과 인격을 가진 존재에 대한 존중의 문제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표제 소설인 ‘단어가 내려온다’는 만 15세 모든 사람에게 하나씩 단어가 내린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소설이다. 작가의 말에 적힌 대로 국어학 SF라고도 할 수 있겠다. 국어학자를 꿈꾸는 나는 엄마의 고집에 못 이겨 화성으로 이주한다. 동갑 친구들은 이미 다 받은 단어가 왜 나에게는 내리지 않는지가 나의 최대 관심사이자 고민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에게도 단어가 내린다면?’하고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단어가 내린다면 여러 가지 왜곡이나 해석이 가능한 조사나 의존명사 말고 명쾌하고도 확실한 명사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福’이라면 어떨까? 그야말로 나는 복 받은 사람일테니.

‘분향’에서는 화성으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합동 분향소에서 제사를 지내는 해프닝을 다뤘고 ‘미지의 우주’에서는 화성이주 2세대인 미주가 지구에서 진행되는 2년간의 연수 대상자로 선발되어 역이주를 준비하는 과정을 그렸다. ‘행성사파리’에서는 열세 살 미아가 쌍둥이지구로 우주여행을 떠난 이야기이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에서는 화자가 기억 아카이빙 인공지능이자 무인탐사선인 ‘영원’이다. 영원이 서술하는 이야기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도 쓸쓸하다.

절체절명의 무작위에 사소한 까닭을 부여하는 애틋함이 없었다면 그들의 기억은 이렇게 멀리까지 올 수 없었으리라. 어쩌면 나는 이를 부러워하고 있는 걸까. 밤하늘의 아무 별이나 가리키며 그것이 내 것이려니 믿어버릴 수 있는 무구한 대상화를,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멀리멀리 보내겠다는 무해한 욕망을. p.219

마지막에 수록된 ‘일식’에서는 기억 아카이빙을 소재로 기억관리자가 목격한 인간의 어긋나는 기억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다룬다.

경험할 때 이미 왜곡되어 인지된 감각을 돌이킬 방법은 없다. 아무리 타인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VR 파일을 들여다보아도 그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경험이라면, 아무리 열화된 VR 파일이어도 깨달을 수 있다. 그때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기도 한다. p. 246

‘미지의 우주’와 ‘행성사파리’에서 남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비슷한 것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에서 읽은 다음 문장으로 ‘아하’하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미지의 우주」는 ‘이주’, ‘개척’ 등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모험의 단어들이 남성과 여성, 서로 다른 성별에게 얼마나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분통에서 시작했다. 마침 ‘미니 이주’를 앞두고 공인인증서를 비롯한 한국의 공공사이트와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는데 덕분에 생생한 분통을 수집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지나고 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기에 가능했던 기적 같은 순간들만 선명하게 남았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pp. 258~259

익숙한 방식의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은근히 숨어 있는 유머와 묘하게 눈물샘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소설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동아시아 #동아시아출판사 #허블 #SF소설 #오정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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