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 시절 소설Q
금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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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목을 보고는 천진(天眞)을 떠올렸으나 읽다보니 톈진으로 알고 있는 천진(天津)인 것을 알았다.

Z시에 살고있는 상아는 남동생 금성의 결혼식 때문에 사흘간의 일정으로 상해를 방문하는데, 20년전 같이 일했던 고향 언니 정숙의 연락을 받는다. 마침 상해에 거주한다는 정숙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는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1998년의 천진을 떠올린다.

정작 그 시절이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정어리떼처럼 반짝반짝 들뛰기 시작하자 나는 깜짝 놀랐다. 무의식이라는 창고 속에서 진작 한줌의 재로 사그라졌을거라 여겼던 기억이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가슴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고 나의 청춘이 꽤 드라마틱한 시대 속에서 연출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정숙을 다시 만나기 전에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었다.(p.13~14)

1인칭으로 진행되던 이야기가 20년전을 떠올릴 때에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점으로 묘사하곤 하는데, 처음에 나는 깜빡 속아서 '어라? 본인 이야기였어?'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 젊은 '상아 앞 점점 커져가는 해바라기씨 껍질 무지에 잔잔한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고향을 떠났으며, 그로부터 아마 영원히 고향을 떠나게 될 그 시절의 내가 느끼는 흥분과 애틋함과 슬픔, 그리고 곧 도착할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바로 그 해바라기시 껍질 무지와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젊고 단순하고 생명력 넘치는 열정의 시작이었다. (p.15)

고향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고 자란 전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떠나올 때 설렜던가? 슬펐던가?
무군의 큰누나가 주선해준 일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덜컥 무군과 약혼을 하고 천진에서 소꿉놀이와도 같은 동거생활을 시작한 상아는 애정표현 넘치고 손재주 좋지만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무군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업무차 잘나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차를 얻어 타면서 본인의 처지를 답답하게 여기게 되는데, 한국인 사장들의 현지처 노릇을 하는 미스 신과 춘란의 화사한 옷차림과 통큰 씀씀이를 보며 이별을 결심한다. 무군을 벗어나면 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여기면서도 이별의 원인을 무군의 탓으로 미룬다.

항상 그게 문제지. 상대방은 순간순간 흔들리고 생각이 바뀌는데, 그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남자라는 족속은 시작이 바로 결과라고 유추하는, 현실에 대해 총체적으로 방심하는 한심한 군체였다. (p.155)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독박육아와 무뚝뚝한 남편의 태도에 상아는 문득 무군을 떠올린다.

대화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남편의 문자 앞에서 나는 노력을 그만 멈췄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래도 그는 우리가 '한 팀'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경기가 어려우면 잠깐씩 알바를 해서라도 생활비를 보냈고 이번 금성의 결혼식에도 부좃돈을 넉넉히 통장으로 넣었다. 핸드폰을 잠그고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느닷없이 어떤 상상을 해보았다. 무군이라면 어땠을까. 혹은 무군은 지금 아내에게 어떤 남편으로 살아갈까. 무군을 추억하기 전에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상상이었다.(p.80)

20년만에 만난 정숙은 남편과 이혼을 하고 아이와 부모님을 돌보느라 여전히 고단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천진에서 희철과 이별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상아도 마찬가지이다.
20대 초중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변은 발전하는데 혼자서만 낙오되는 것만 같은 불안으로 어떻게든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발버둥쳤던 그녀들의 선택을 어느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결국 배경만 다를 뿐 신산한 젊음을 보내고 있는 이들과 그 시기를 이미 지나온 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소박한 문체가 정겹고 맛깔스러워서 술술 읽힌다. 오타인가 싶은 낯선 단어들-헐금씨금,, 눈이 올롱해졌다, 발밤발밤 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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