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일기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양미래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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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 3학년 겨울부터 일기를 매일 쓰기 시작했다.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망구소의 시점은 조금 다르다. 그는 기억할 것과 잊을 것을 선별한다.


짧은 책에 그의 다른 책이 알라딘 서재 가좍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래서 기대가 컸던 건지, 아니면 다른 책인 건지. 혹은 일하다가 잠깐 읽는 내 상황 선정이 잘못된 건지. 하지만, 나는 읽고 쓰는 일을 전적인 업으로 삼지 않았으니,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 점을 감안해야 해.



이건 내 불호 후기다.


나는 시에 각박하다.


나는 내 기준 극강의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면 차라리 무미건조하고 담담하길 원한다. 전자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후자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대부분. 누군가 나보코프와 조지 오웰을 극과 극이라고 했다. 8할 9푼 정도 동의한다.


그러므로 나는 시적이고 유려한 문체라는 글을 읽어도, 대체로 문장이 빛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다. 그런 말이 적절할 만큼 찬란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이 아예 그르지 않을 만큼 감정을 덜어내지도 못한 어중간한 글은 그저 아름다운 시어가 되고 싶어서 감성을 자아낼 뿐이다. 그 안에서도 정도의 차는 있다. 못 참아줄 것. 더 못 참아줄 것. 진짜 못 참아줄 것. (어쩌면 나보코프는 이런 내 입맛에서 유일한 예외인지도 모르겠다.)


더 못 참아주겠다. 망구소가 삶과 경험으로 체득한 문체인지는 몰라도, 내겐 꼭 이런 스타일을 고수해야 할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좀 더 무미건조할 수도 있겠다. 시와 산문의 경계에서 좀 더 산문에 가까웠을 수도 있겠다. 그는 시에 가깝기를 택한 것 같다.


시인이니까.


나는 시에 각박하다. 그 점을 감성이라 부르는 비이성과 싸우는 이성의 최전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가능하다면 지금보다는 시를 더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사실 유심히 곱씹으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도 그 형태가 좀 예쁘다는 이유 하나로 마음이 닫혀버린다. 이런 독자의 태도를 공공연하게 써 놓기라도 해야 한다. 이성의 최전선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믿으면서도 은연중에 담담한 산문체를 극히 선호하는 성향에 자부심을 느끼니까.





그런데 그와 별개로 정말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글로 읽으니 멋있고, 수려하니까 더 멋있고, 나는 갖지 못한 감각과 감수성을 조금은 동경하게 되지만, 아, 그래도 절대 곁에 두고 싶지는 않다. 피곤하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누구처럼.




일기 쓰기는 무엇을 생략할지, 무엇을 잊을지를 솎아내는 선택의 연속이다.

_10p

하루 이상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면, 두렵지만 그렇게 해본다면, 나는 그 시간에 휩쓸려 사라질 것이고, 무언가를 지속하는 행위의 적을 더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_15~16p

이미 벌어진 모든 일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크고 작은 상흔을 남긴다.

_37p

남편이 산산조각 난 코뼈를 재건하는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마취과 의사가 정맥 주사로 벤조디아제핀을 투여했다고 말했다.


벤조디아제핀은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유발한다. 남편이 내 귀에 대고 사랑해, 라고 속삭였을 때 나는 바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방금 그 말 기억 못 할 거야.

_49p

망구소의 김치란 '기억' 같네................. 이 사람 진짜 한결같네

아이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작은 남자아이는 사라지고 없다. 빛이 꺼졌다.


아이의 빛은 꺼졌지만, 그 빛은 아이의 뒤를 잇는 살아 있는 것들을 통해 의기양양하게 반짝인다. 시간이 다 되면, 잠재력이 다 소진되면, 빛은 그다음으로 밝은 빛으로, 또 그다음으로 밝은 빛으로 옮겨갈 것이다. 광이 번쩍인다―그러면 나는 사라지지만, 보라, 끝없이 이어지는 빛의 세계를 통과하는 몸들의 울렁임을.

_94~95p


일기 쓰기는 무엇을 생략할지, 무엇을 잊을지를 솎아내는 선택의 연속이다. - P10

하루 이상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면, 두렵지만 그렇게 해본다면, 나는 그 시간에 휩쓸려 사라질 것이고, 무언가를 지속하는 행위의 목적을 더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P15

이미 벌어진 모든 일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크고 작은 상흔을 남긴다. - P37

남편이 산산조각 난 코뼈를 재건하는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마취과 의사가 정맥 주사로 벤조디아제핀을 투여했다고 말했다.

벤조디아제핀은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유발한다. 남편이 내 귀에 대고 사랑해, 라고 속삭였을 때 나는 바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방금 그 말 기억 못 할 거야. - P49

아이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작은 남자아이는 사라지고 없다. 빛이 꺼졌다.

아이의 빛은 꺼졌지만, 그 빛은 아이의 뒤를 잇는 살아 있는 것들을 통해 의기양양하게 반짝인다. 시간이 다 되면, 잠재력이 다 소진되면, 빛은 그다음으로 밝은 빛으로, 또 그다음으로 밝은 빛으로 옮겨갈 것이다. 섬광이 번쩍인다―그러면 나는 사라지지만, 보라, 끝없이 이어지는 빛의 세계를 통과하는 몸들의 울렁임을.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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