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말이야. 그런 것 생각해서는 아무것도 못해. 박은 이승만이 몰락해서 비참하게 되는 꼴을 보았으면서도 그보다 더한 유신독재까지 만들어냈어. 이것은 곧 정치의 퇴보만이 아니라 사회의 퇴보를 말하는 거야. 세계 여러 나라들은 날로 변화하고 발전해 가고 있는데 우리는 4·19 이후 13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오히려 퇴보한 사회에서 산다는 게 말이나 돼? 4·19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게 뭐야. 이 땅에서 그 어떠한 독재도 용납하지 말라, 독재는 싸워서 물리치지 않으면 타도되지 않는다, 독재를 타도하려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것 등등이 아니겠어? 민주주의 세상에 살기를 원하거든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놈의 긴급조치 1호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그건 유신독재가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지를 자기들 스스로가 입증하고 있어요. 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그따위 법은 없을 거예요.」 서경혜의 태도가 금세 달라졌다. 그녀는 정말 치를 떠는 것처럼 얼굴에 분노의 빛이 서리고, 야무진 입매에는 더 힘이 모아져 있었다. 「그래요, 그건 무법천지의 표본이오. 그런 세상에서 살려면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건데, 앞으로 어찌 될지…….」 유일표는 혀를 찼다. 「세상에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하고, 전시도 아닌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나라예요.」 서경혜가 말하는 것은 긴급조치 1호의 5항과 6항이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는 전체 7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 2, 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욕심은 못 메운다는 옛말이 어찌 그리 맞는지.
「예, 총칼을 든 우리나라하고는 다른 방법이었지요. 그런데 그 비폭력 저항을 ‘간디의 무저항주의’라고 말하거나 글로 쓰는 사람들이 꽤나 많아요. 그건 아주 잘못된 겁니다. 무저항주의란 말뜻 그대로 하자면 ‘저항을 하지 않는 주의’인데, 인도 독립대원들은 자기들이 영국군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을 뿐이지 온몸을 내던져 저항했거든요. 그리고 무저항주의라는 말은 간디의 뜻과도 맞지 않는 겁니다.」 「예에, 무식한 내가 생각해도 그래요. 이쪽에서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저항이란 뜻이니까 비폭력 저항이라고 해야 옳고말고요.」
「마하트마 간디, 마하트마 간디……. 참 부처님이 따로 없구만요. 알 만한 사람들이 어째서 그런 좋은 본을 못 보나 그래. 하긴 박 통이야 젊었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들 등뒤에서 총질해 댄 인간이니까.」 이용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유일표는 가슴이 섬뜩한 걸 느꼈다. 이용진의 부친은 만주에서 투쟁하다 숨진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그래요. 홍 형 말이 옳은 것 같소. 예수가 일찍이,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꿰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는데, 어쩌면 돈의 분량은 곧 그만큼의 사회악의 축적인지도 모를 일이오.」 이상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너무 사적 감정에 빠져 있는 자신을 건져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미경의 상처와 아픔은 자본주의 공룡의 발에 짓밟힌 벌레의 운명이었다. 자신 또한 그 공룡 앞에서는 한 마리의 벌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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