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 새로운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6
김진호 지음 / 오월의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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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나라 기독교의 보수적 근원

특히 대형교회, 전광훈이나 조용기와 같은 권위주의적 목사 중심의 교회가 보수주의의 첨병인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기독교 자체가 라인홀트 니부어를 필두로 한 해방신학 시점을 제외한다면 진보적 위치를 차지한 적이 없긴 하다.

따라서 기독교가 보수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단연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에 가깝다.


기독교의 창시자인 마틴 루터만 보더라도, 매우 혁신적인 개혁가 같은 느낌이 강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역시 체제의 변호자였다. 루터가 독일 농민 봉기 시절 보여줬던 모습은 많은 비평가들에게 있어서도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지금까지도 그의 평가에 상당한 흠집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니체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루터의 체제 변호적 모습을 비판했다.)

결국, 기독교는 애초에 그 기원부터가 체제에 보수주의적이었다.


그러나 유독 한국 교회가 보수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초기 선교 단계에서 미국에서도 가장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선교단체가 평안도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개신교 지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6.25를 기점으로 대다수의 근본주의 기독교 계열이 남한으로 내려옴에 따라 자연스레 진보적 이념에 대해 적대감을 넘어 혐오감 수준에 이르는 감정을 지니게 되었고, 이들이 그 유명한 반공 서북주의 단체들의 효시가 된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특징이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 교회의 역사란 그야말로 체제 순응주의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정부 체제의 방향이 무엇을 향하는가에 따라 교회의 방향도 바뀌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교회는 가장 권위적인 목사의 힘을 빌려 성장했고, 개발도상국 답게 성장과 구원에 초점을 맞췄다.


여기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바라보는 점이 대형교회의 두가지 구분이다.

즉, 개발독재 시절의 권위주의형 대형 교회를 '선발 대형교회'라 지정하고, 민주주의 이후 성장한 대형교회를 '후발 대형교회'라 지칭하는데. 둘은 확실한 차이가 있다.


선발 대형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권위자의 힘이 중요하다면.

후발 대형교회에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교육받고 지식있는 소위 '주권신자'를 붙잡는 테마가 중요했다.


특히 개발독재 중심주의 시절 민중이 정부의 요구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호응 했던 것처럼, 선발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 존재가 신도들을 이끌며 쭈욱 빨아들이고 성장하는 형태였다면.

후발 대형교회는 중산층에 자리 잡은 신도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반영하는 곳을 찾기 위해 교회를 떠나면서, 성장이 정체되는 시기와 관련한다.

따라서 후발 대형교회는 신자유주의의 원칙에 따라 '주권신자'를 붙잡기 위한 무한경쟁체제에 돌입했고, 여기서 성공한 사례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실 후발 대형교회의 대한 이야기도 따지고보면, 사회체제에 순응하여 변화하는 과정을 적나라히 보여주는 것 같다.

즉,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요소들을 교회가 그대로 흡수하게 되었다. 특히 노무현 - 이명박 정권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의 가치는 '웰빙'이란 단어로 자주 묘사되는데, 교회가 이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신도를 그 사회에 순응하게끔 만든다.


이후 서술은 대부분 교회의 '웰빙'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족, 선교, 청년모임 등과 같이 대형교회의 세부조직들의 활동과 행태를 살펴가며 세부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 기독교가 보수적 행태를 보이는 것은

정말 자연스러운 사회 체제(혹은 정부의 지침)의 방향에 녹아들고 순응하면서 변화하는 모습과 관련한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는 사실 종교와 가장 거리가 멀어야 할 세속주의가 중심에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제목만 보면 굉장히 도발적인 이야기로 가득할 것 같지만

실상 내용은 그렇게까지 날카롭진 않다. 그저 사회에 따라 변화하는 한국 교회의 변천사를 보는 느낌이다.


오히려 본문 보다는, 이후에 서술되는 보론들

'전광훈 현상'이나 '신천지 현상'에 대한 서술에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과 시선이 번뜩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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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지구사 -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옥창준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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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기가 도래한 지금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제3세계를 중심으로 미-소 양국의 냉전 정책을 세세하게 해설한다.

하지만 내용을 꼼꼼히 살펴본다면, 이 책은 마치 실수와 착각, 판단 오류로 점철된 제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 같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냉전의 이미지는 뭔가 과묵하고 냉정한 스파이가 양국을 오가며 활약하는 듯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상은 잘못된 판단의 연속으로 인한 엉망진창 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러한 냉전 시기 강대국의 착각과 실수는 제3세계에겐 뼈아픈 문제로 돌아왔는데, 사실상 냉전의 포문을 연 대한민국도 여기서 빠지지 않는다.

 

3세계는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식민제국주의에 대한 해방독립’, ‘자국 발전의 꿈과 같은 대의에 의한 목적, 혹은 그저 지도층의 욕망과 권력 다툼에 의해 냉전에 휩쓸리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참혹한 수준의 실패로 끝이 났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의 판단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이데올로기적 우군을 얻기 위해 미국은 해당 국가의 상황 따윈 거의 고려도 하지 않은 상태로 정책을 내세우기 일쑤였고, 그 결과 수많은 독재자를 정권 지도자로 옹립하였다.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들은 정작 더 많은 국가를 자유와 민주주의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특히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은 한심한 수준이었고 지금도 남미 국가들은 강한 반미주의 성향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사실 미국이 한 행동을 생각해본다면 이런 반미주의 성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정도로 미국의 선택은 무책임하고 판단 오류도 심했다.

베트남의 실패는 미국 냉전 정책의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하지만 소련도 만만찮게 실수의 연속을 보여줬다.

특히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인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참 재밌다.

소련과 중국은 같은 이데올로기 진영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은 냉전 시기에 서로를 견제하는 라이벌 관계였다.

레닌주의를 중심에 둔 소련과 마오주의를 내세운 중국은 각기 서로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제3세계에 각자 자신만의 영향력을 내세우려고 노력하며 상당히 삐걱거리는 관계를 보여줬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신냉전 체제에서 발생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갈등, 러시아의 뒤통수를 호시탐탐 노리는 중국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소련과 중국의 대외정책도 엉망진창이긴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인해 지나치게 많은 예산은 대외관계에 쏟아부었고, 그 결과 자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조차 냉전 정책을 개혁하지 못하였다. 실상 이러한 선택의 오류가 소련의 해체를 불러 일으킨 셈이다.

이는 현재 해외에 뿌린 투자 자금을 거두어들이지 못해 경제난이 일어난 중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이후 제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대외 영향력을 펼치려 하는 모습 또한 하나의 코미디처럼 보인다.

그 와중에 진정한 공산혁명 사상을 전파하려는 쿠바의 행동력과 이 때문에, 냉전이 열전으로 발화할까 노심초사하는 소련의 태도는 이 책의 또다른 볼거리라 할 수 있다.

 

결국, 냉전 정책은 무엇하나 제대로 성공한 것이 없었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으며, 소련은 자멸의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돌풍에 휘말린 제3세계는 각종 부패와 살육이 넘쳐났고 제대로 된 부흥을 일궈낸 국가는 매우 소수에 한정됐다.

그리고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갈등에 분노하여 등장한 중동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영향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

 

냉전 시기의 엉터리 선택과 그 실패가 보여주는 모습은 신냉전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당히 좋은 청사진이 될 것이다.

신냉전이 도래한 지금,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서구의 승리를 말한 역사의 종언은 완전한 실언이 되었다.

오로지 저 위대한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가 말한 것처럼 해당 국가와 문화와 관습, 전통을 고려하지 않은 개입은 언제나 실패할 따름이다.

 

아마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신냉전의 선택과 판단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오판의 연속이 세계 모든 국가에 큰 고통을 낳을 것이란 점이다.

그러하기에 바로 이 시점에서 이 책이 시사하는 의미가 상당히 중요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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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민영화는 없다 - 누가 독이 든 사과를 권하는가
이광호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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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가 가져오는 위험성을 잘 경고한 책
그리고 지금 꼭 읽어야할 책

흔히 우리나라는 아직 미국과 같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민영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기업의 영리추구 목적에 공감하거나 기업의 선의에 무엇인가를 바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피에 사무치도록 우리를 괴롭히는 산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통신산업이다.

그렇다. 통신 산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영화 사례이고 지금도 수많은 민생을 괴롭히는 대표적 산업군이다.

통신3사의 순이익금은 타산업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수준인데 반해, 정작 통신설비에 대한 투자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5G 기술을 꼽을 수 있다.
5G를 대대적으로 광고하던 통신사들은 정작 5G에 대한 인프라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황이고, 심지어 몇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투자가 미진하여 제대로 이용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요금제는 사실상 5G를 강제하기 시작한 수준이라 고객은 울며겨자먹기로 더 비싸진 요금제를 선택하고 LTE 우선사용 옵션을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해외망은 어떠한가? 해외망에 대한 제대로 된 투자는 공기업에서 사기업화한 KT가 그나마 약간의 성과를 내고 있으나, LG나 SK는 해외망 마저 직접 투자 없이 해외 통신사의 망을 빌려쓰고 있다.

KT가 국민세금으로 만든 인공위성을 헐값에 판 사실은 그저 우스개에 불과할 정도로
최근 한 대형 유튜버의 폭로에 의해 KT가 의도적으로 고객이 가입한 서비스의 속도를 제약했다가 들통난 사건이 있는데. 그 결과는 서비스 품질의 향상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알기 어려운 요금제의 분화였다.

통신3사가 서로 경쟁하면 요금제는 싸질 것이고 품질좋은 서비스를 고객이 편하게 누릴 거라는 소리를 지껄이던 전문가는 지금 그 통신3사의 고위 인사가 되어 활동한다.

경쟁은 없고 그저 남는 것은 담합 뿐인데, 이것을 제재할 방도가 없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통신망을 가지고 장사하면서 높은 요금제와 형편없는 서비스, 수익 대비 낮은 투자비율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망중립성 원칙을 깨고 해외 플랫폼 사업자들(아마존의 트위치, 구글의 유튜브)과 씨름 중인데, 이들이 기대는 논리라곤 애국심밖에 없어서 정작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더 낮은 품질, 언제 중단될 지 모르는 서비스에 불안해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민영화의 민낯을 보고 싶거든 통신 산업을 보라는 말이 있다.
이미 한국의 민영화는 공공의 이익 따윈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탐욕과 담합의 장이다.

그나마 통신산업이라 이 정도인데, 의료나 전기, 수도가 민영화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직도 민영화가 시장의 효율이라는 장미빛 환상에 젖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기업의 욕심과 시장의 순리를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다시금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들썩이고 있다.
기재부는 공기업의 멀쩡한 토지와 자산을 팔아치우려고 압박하고, 한전은 민간 전력소에서 비싼 단가에 전기를 사와 말도 안되게 싼 가격에 기업에 제공해놓고는 적자기 때문에 일반 국민의 전기요금을 높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는 그 의도적인 방만 경영의 해결책이랍시고 전기 민영화를 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각성해야 한다.
당신이 돈이 많아 사보험도 많이 있고, 좋은 지역에 사니까 상관 없는 일이 아니다. 민영화의 독은 단순히 빈곤층과 그 지역에만 퍼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두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공기업의 가치도 재고해야할 것이다.
지금이 다시 민영화가 얼굴을 들고 있기에 나는 이 책이 매우 시의성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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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철학 로드맵 - 사상가 50인이 안내하는 지知의 최전선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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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한 사상가의 깊은 철학적 사유를 탐색하기란 불가하다. 간단한 개념 정도는 짚어도 그 깊이가 지나치게 얕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배운다거나 사고하려고 한다면 이 책은 어울리지 않다. 물론 이걸 읽었다고 그 철학자에 대해 아는 체한다면 더욱 우스운 꼴을 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연유에도 이 책을 추천할 만한 이유는 제목의 "로드맵"의 역할과 기능 그 자체 충실했다는 점.


의외로 현대 철학의 흐름을 설명해준 책은 많지 않다. 어지간한 서양철학사는 근대에서 흐름이 뚝 끊겨버린다. 많이 와봐야 푸코나 리오타르 정도에서 끝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철학 역시 지금에 와서는 그 계승자나 비판자들에 의해 많이 수정되고 논의되었으며, 흐름에서 벗어나거나 다시 합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의 쇠퇴와 신실용주의의  재부상이 그렇다. 그러나 여절시 최근 철학사를 다룬 책들을 보면 거진 포스트모던에서 끝이나기 때문에 아직도 주류 철학이 포스트 모던인 것으로 독자는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포스트 모더니즘은 철학계에 수많은 비판에 휩싸여 있다. 특히 정체성 정치의 지리멸렬함과 성과없음의 폐해, 탈진실 시대 가짜 정보가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 정말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물음 속에서 진리의 해체와 개인이 곧 정치다를 외치던 포스트 모던의 구호는 비판을 받다 못해 현 세계문제의 원인격으로 떠오르고 있다.


오사 빅포르스는 《진실의 조건》에서 포스트 모던은 단 한 번도 철학의 주류였던 적이 없는데 비전문 분야, 특히 미디어나 언론 계열에서 그것을 주류인 것처럼 포장했다고 말한다.


이렇듯, 현대 철학의 흐름은 이미 푸코와 데리다 이후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을 설명하는 책은 아직도 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신실용주의나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과 같은 정동이론 같은 철학파들도 많이 생겨난 상황이다.


이 책은 물론 그런 모든 것을 다룬 것도 아니고 설명도 짧고 아쉽다. 그러나 적어도 기존 책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자에게 이런 사상가가  존재하고 독자로 하여금 더 읽어볼만한 책을 알려줌으로써 어디로 나아가야할 지 그 길 정도는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꽤 쓸만하다고 본다.

이 책을 가장 밑바닥에 두고 독자는 무엇을 파고 들어갈지 생각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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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들 -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오찬호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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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도 마지막에 스스로 말하지만, "글자 몇 개 쓴다고 사회가 바뀌겠어?"라는 말은 사람을 상당히 지치게 만들긴 한다. 오찬호는 그래서 계속 사회 비판 글을 쓰는 것에 집중하는 듯 하다.

다만, 그러한 사회 불평과 비만은 이제 시민들, 혹은 어느 정도 책 정도는 읽고 사회에 대해 걱정하는 무명인들에게 맡겨도 충분하다.


내가 오찬호를 처음 만난 것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이었고, 그 시절 나는 아직 팔팔한 20대 초반이었다. 모든 것에 쉽게 분노할 줄 아는 나이였고, 뭔가 정의감을 쫓아다니던 시기였다. 20대 특유의 열기와 활기가 있었으니 그의 책은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마치 우리 한 구석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쾌감도 느껴졌다.


그렇게 오찬호의 글을 한 두개씩 찾아봤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번에도 사회고발 책을 썼지만, 이제는 인상이 다르다. 10년인가. 아마도 그의 책을 처음 본 지 10년은 지났을 것이다.


세상도 변하고, 나의 생각도 여러 사상과 책과 맞물려 변해갔다. 탈진실 시대에 와 나는 포스트 모던의 구호에 질렸다.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 구호는 실상 수많은 정체성들로 쪼개지고 분열되면서 또다른 분파를 낳았고 그 속에서도 또 더 세세히 분류된 정체성들끼리 부딪치면서 '연대'라는 핵심 개념을 부숴버렸다. 이제 우리는 수많이 나뉘어진 개인적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해하고 배타성을 띤 그 집단 체제에서 서로 급진적 동화를 이루면서 타집단을 밀어내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것처럼 "정체성 정치란 개인의 죄책감을 건드릴 뿐, 그 행동의 결과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라는 것은 단순히 지젝이 마초이즘에 빠진 남자 철학자여서가 아니라, 실제로 정체성 정치가 이룩한 미미한 성과에 한탄하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크 릴라도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에서 이런 성과도 없는 지리멸렬함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진보 진영을 자꾸 분열시키고 옭아메는 사이비 정치에 불과하다 하였다. 실제로 민주 진영은 사분오열된 상태고, 그들의 정책은 누구하나 만족시키기 어려워졌다.


노동의 연대. 즉 더 큰 개념으로 우리를 그룹화 시킨다면 그것이 여성이든, 트랜스젠더이든, 장애인이든. 개인이 무엇이건 간에 노동의 정책 향상을 통해서 어느 정도 혜택을 공유하겠지만, 이제는 너무나 작은 파이를 이기적으로 서로 차지 하려다보니 모두가 모두의 적인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니 그 결과도 작은 파이의 부스러기일 뿐이니 누군들 만족할 수 있겠는가


여튼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찬호가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에서부터 그가 전형적인 정체성 정치에 천착하는 것에 실망하여 거리를 두긴 했으나


여전히 그가 말하는 날카로운 시원함과 노동문제에는 공감하기에 지켜보고 있었다.

문제는  10년이 지나는 시간동안 오찬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사회 비판을 하는 외부자에 머물러 있다. 아무런 대안도 대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비판만 하는 그 자리에.


물론, 민낯이란 개념은 유용하다. 나도 여전히 구의역 비정규직 청년 사망사건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추모의 메시지를 보냈으나 정작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의 대한 답을 내놓자 불공정하다며 청년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결국 비정규직의 위험한 환경이란 수전 손택이 말하듯, 그저 거기에 있는 고통을 지켜보며 사실 나는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민낯을 발견하곤 한다.

이렇듯 이런 민낯을 바라보는 시선. 사회비판이나 불평따윈 소시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찬호는 학자이자 저술가이다. 그가 학자로서 성장했다면 이제는 좀 더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한다. 단순히 사회에 비판의 메시지를 내는 것을 넘어서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에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없이 사회의 옆에서 쓴말만 자근자근 내뱉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이 책도 결국 궤는 같았다. 그가 말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에 공감하지 않는 갓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민낯만 찾는 것인가. 그 정도는 이제 우리같은 연구자는 아니지만 어정쩡한 지식 정도는 갖춘 소시민들에게 맡겨도 된다.


하지만 이제는 인플루어서 반열에 오른 학자가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더 적극적인 사회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대한민국의 민낯을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발전 없이 그 자리에 남는 것으로 만족하는 오찬호의 민낯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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