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세대는 없다 -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
신진욱 지음 / 개마고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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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관념에 대한 책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이 하나의 세대를 단순화하여, 공통으로 묶고 그것이 모든 것의 문제이며 해결책인 것처럼 말한다.

세대 갈등론이 대세가 된 지금, 언론은 물론이며 출판물조차 '세대'를 마치 단 하나의 공통생명체인 것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떨까?

이 책은 사회를 분열로 몰아가고 있는 '세대론'의 허구성을 제대로 밝힌 책이다.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현상학적 분석을 내놓은 책이 아니라, 수많은 연구자료와 통계를 분석해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여 '세대론의 민낯'을 명명백백히 밝혀내고 있다.


이 책의 초반부에도 나오지만

사실 '세대론'의 탄생은 지금처럼 모든 문제를 단순화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세대론을 본격적으로 학문의 조류로 편입한 칼 만하임의 《세대 문제》만 보더라도 다른 세대 간의 갈등을 조망한 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일 세대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니는가를 살펴본 책이다.

즉, 세대론의 학문적 시작은 동일 세대에 존재하는 복잡한 관계를 살펴보는 것에 있지, 지금 처럼 다른 세대와의 갈등을 위해 관계를 단순화 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이러한 점을 기초로 하여, 이 책은 지금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는 세대문제의 허실을 제대로 꿰뚫고 있다.


자, 보라. 부모에게 자산을 증여받아 건물주가 된 20대 청년과 계약직을 전전하며 학자금을 갚아나가는 비정규직 20대 청년은 '동일한 세대'라 부를 수 있는가?

노인빈곤 문제가 최대 이슈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대기업 임원을 엮임하고 지금은 어떤 연구소의 고문으로 지내고 있는 60대와 공사판을 전전하고 경비일을 하는 비정규직 60대는 '같은 세대'인가?


오히려 계급적 성향으로 묶는다면, 대기업 임원 출신의 60대와 건물주 20대는 공통된 환경과 가치를 공유할 것이고, 계약직 20대와 일용직 60대는 불안한 비정규직으로 공통된 환경과 가치를 공유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586세대는 모두가 엘리트, 기득권자인가? 이 책은 그러한 통념에도 정확한 자료를 제시하며 강력한 일격을 날리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586 세대가 모두 민주화 운동을 한 대학생인 것처럼 착각하곤 하지만, 정작 그 시대 대학 진학율은 낮았고. 즉, 민주화 운동의 주도자인 586 세대 역시 그 세대를 대표한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은 비중을 차지했다.

도리어 다수의 586 세대는 운동권이 아니었고, 대학생도 아니었다. 도농 출신의 차이는 현격하게 컸다. 설령 같은 대학생이라 하더라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는 대신에 도리어 독재 정부의 엘리트 관료가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도 존재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586을 운동권 엘리트라 명칭 짓고

2030을 'MZ세대'라 명칭 지었다. 심지어 이 'MZ세대'는 지나치게 그 범위가 넓어서 서로 간 공통점을 찾는 것조차 어려운데 말이다.


일찍이 피에르 브루디외가 《구별 짓기》를 통해 개인의 개별적 문화와 환경이 가치관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강렬히 설파했는데, 왜 우리는 지금에 와서 이러한 개별적 환경과 문화 요소들을 싸그리 무시하는 것인가?


세대론은 분명히 유효한 조류이다.

그러나 작금의 세대론은 기존의 틀에서 지나치게 탈선했다.

이것은 언론의 남용이며, 정치적 전략으로 전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론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사회적 지표는 무의미해졌고,  여론전과 프레임 싸움을 위한 도구에 불과해졌다.

즉, '세대'란 단어의 쓰임새는 완벽하게 오염된 것이다.


이 책은 추후에 가서 이런 여론전과 정치적 성향의 문제에 대해서도 각종 통계를 보여주며 언론과 정치권이 심어놓은 '세대'에 대한 '환상적 통념'에 대해서도 정확히 반박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유념해야 한다. 사회 문제란 언제나 여러 요소들의 복잡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단순화하여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거짓이고 잘못된 방식이었음을.


언제부터인가, 사회학은 복잡함을 지양하고 단순함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회문제는 단 한번도 단순했던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

찰스 라이트 밀즈가 말한 《사회학적 상상력》, 우리에게 지금 무뎌진 그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도리어 복잡한 문제에 대해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며 머리를 감싸쥘 필요가 있다.

 

난 이 책이 최근에 나온 '세대'에 관한 책 중에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분열의 시대, '세대'란 단어가 오염된 시대, '세대론'이란 학문의 뿌리조차 망각한 시대.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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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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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파시즘이 가지는 독특한 영역을 역사, 상황, 조건 등 종합적인 관점에서 파헤친다. 따라서, 우리가 파시즘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전체주의, 권위주의, 개발독재와 분명하게 경계를 구분하고 있다. 나아가 파시즘이 가지는 분명한 성질들. 권력 장악을 위해 기존 권력과의 영합과 변용,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행사 방식의 폭력, 팽창주의 등. 그 세부 조건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파시즘을 설명하려 드는 책은 무수히 많다. 파시즘 자체가 20세기 사상계를 현실적으로 뒤흔든 혼돈의 정치 체제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석과 관점도 천차만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은 혼동하기 쉽고, 그 본래의 특색처럼 여기저기 붙여먹기도 쉽다.

하지만, 이 책은 파시즘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함에 따라 파시즘에 붙을 수 있는 무수한 변형적 해석을 담담하게 쳐내고, 파시즘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 확고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정의를 내린다.

파시즘에 관한 거의 모든 책 중에서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파시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중심에 두고, 다른 파시즘 관련 책을 참고 인용 방식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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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비 이블, 사악해진 빅테크 그 이후 - 거대 플랫폼은 어떻게 국가를 넘어섰는가
라나 포루하 지음, 김현정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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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페이스북, 우버와 같이 최근 빅테크 기업의 폭주하는 행보에 우려를 보내는 시각이 많아지고 있다. 이들 기업이 실제 개인 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도 확실하나, 그만큼 개인도 빅테크 기업에게 지불하는 대가도 크다.

이 책은 빅테크 기업의 문제점을 종합하여 압축해 놓은 책이다. 그러다보니 내용에 딱히 빈틈이 없어 쉴틈없이 핵심적인 문장이나 문제적 사실 등에 밑줄을 긋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의 밀도가 높아서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기에 빅테크 기업의 추태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알아갈 것이 많다.

따라서 관련 책과 연계해서 읽으면 좋은 종합서적 성격을 보인다.
만약, 개인 정보의 상품화, 구글의 사생활 침해 문제에 대해 깊이 파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고 조지 길더의 《구글의 종말》을 같이 읽는다면 더 심도있게 보완이 가능할 것이다.

페이스북의 여론 조작 문제와 빅테크 산업의 정치적 영향, 로비 문제를 보다 심도있게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을 먼저 읽은 후, 페이스북과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의 내부고발을 다룬 《타겟티드》을 곁들여 읽어보라.

마지막으로 공유경제의 실체, 빅테크 시대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기업으로부터 아무것도 보호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 문제를 좀 더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을 중심에 두고, 《공유경제는 공유하지 않는다》란 책을 파보면 된다.

그만큼, 이 책은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빅테크 소재 책들의 중심축 역할을 할 만큼 필요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기에 추천하는 바이다.

"데이터 중심의 자본주의는 인간을 디지털 시대의 공장 원자재로 여긴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인간을 노동력으로 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품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내는 고객으로도 여겼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노동력에 대한 수요도 생겨났다.) 그러나 빅테크 시대에는 데이터 분석 자료와 감시 데이터를 구매하는 광고주와 바로 고객이다. 인간은 제품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구글과 '빅데이터'가 과거의 자본주의와 가장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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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아편 세창클래식 14
레몽 아롱 지음, 변광배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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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계기는

국내에 돌아다니는 레몽 아롱의 상당히 자극적인 문구 한마디 때문이다.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 모순투성이인 사회주의 본질을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다."

상당히 자극적이지 않은가?


헌 데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레이몽 아롱은 그가 적극적으로 비판했던 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 지적 적수이자 라이벌 관계이긴 했지만, 그와 벽을 쌓고 마치 원수처럼 싸운 관계는 아니었다. 아롱은 말년까지 사르트르와 교유 관계를 유지했고, 그와 비록 사상적 방향은 달랐으나 지적 교류를 이어갔던 사이였다.

무엇보다 《지식인의 아편》의 중요한 핵심 주제가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편협함과 교조적 경색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내용의 책에서 과연 저런 문구가 나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해당 문구는 이 책에서 전혀 등장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 책의 관련 주제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 책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빠져있던 당대 사회의 좌파적 지평,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굳건한 유토피아에 대해 상당히 세심한 경고를 날리고 있는 지적 연구의 산물이다.

레이몽 아롱은 자유주의자로서, 이러한 지식인들의 경색된 행태에 안타까움을 표시할 뿐, 그것을 조롱하거나 적대하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소련을 중심으로 레닌-스탈린주의의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든 포장하려는 행태를 지적하면서도, 그의 대안책으로 제시할만한 북유럽의 조합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지점을 파고들만큼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레이몽 아롱의 견해는 경색된 유토피아주의에 빠진 마르크스주의 실망하여 작심하고 비판에 나선 자유주의자의 모습이다.

이는 비슷한 길을 택했으나 사뭇 다른 경로를 탔던 또다른 지식인 조지 오웰을 떠올리게 한다.


조지 오웰 역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통해서 좌파의 잘못되고 편협한 행태가 극우적인 여론을 부르는 방식에 대해 비판하였고, 평생 소련과 중국을 위시한 독재적 공산주의 방식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부할만큼 평생 사회주의자였고 좌파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학자였다. 이는 곧 그의 지적 후손들에 의해 '오웰주의'라 부르는 한 가지 대안 좌파 노선의 탄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몽 아롱의 주장은 현재 사르트르의 철학이 몰락하고 프랑스 철학판에 다시금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으면서 부활한 하나의 자유주의적 노선으로서 부를만하고, 그 핵심에 바로 《지식인의 아편》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꽤나 여러 측면에서 교조적 유토피아의 위험성을 경계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좌파들조차 자신들이 믿는 '개념'에 대해 전혀 통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일반적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말할 때조차 그들은 분열했고, 어떻게 다뤄야할 지 감도 못잡았으며, 심지어 그 사상이 바라는 방향과 정반대 지점으로 향하고 있을 때조차 탈선된 선로를 고치기는커녕 애써 변명만 일삼는 행태를 보일 정도로 충분히 '좌파'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내 좌파 지식인들이 그러한 말장난을 하는 동안, 도리어 노동자 계급의 진보는 영국과 같은 자유주의 진영에서 혹은 북유럽과 같은 조합주의적 사회주의 진영에서 더 큰 영광을 누렸다. 반면, 프랑스의 상태는 그들을 전혀 쫒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롱은 거대한 모순을 느꼈다.


아롱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하면서, 눈 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포장하던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경색되고 교조주의적인 신념이 하나의 마약, 즉 '아편'과 같다고 보았다.


교조적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비판서를 생각하니 《지식인의 아편》을 역시 자유주의자이자 아마 아롱보다는 더 보수주의에 가까운 칼 포퍼의 《열린사회의 그 적들》을 비교할 수 밖에 없다.


본인은 만약 둘 중 한가지 책을 먼저 골라야 한다면 아롱에게는 미안하지만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먼저 일독하라 권하고 싶다.

이들이 비판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접근 방식에는 꽤나 차이가 있다.


《지식인의 아편》은 아무래도 그 범위가 꽤나 한정적인데, 당대 전후 프랑스의 지식세계의 편중 사태를 집중 조명하다보니 아무래도 현상학적인 특징이 강하다. 때문에 냉전 체제를 지나 소련의 붕괴와 함께 미국 자유주의의 승리와 세계화의 선언이 있었던 90년대 "ZERO YEAR(《0년》, 이안 브루마, 글항아리)"의 희망이 솟구치던 시대가 도래했으나, 결국 리먼 사태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미-중 신냉전 체제가 다가온 지금 확실하게 그 내용을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있다.


반면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보다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근본적 철학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고대의 플라톤과 근대의 마르크스를 꺼내서 그 사상을 철저히 분석하며 이 사상의 근본적 모순과 오류를 짚어냈다. 단순히 당대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의 장본인이 될 만한 사상적 원천을 찾아 거기서부터 반박을 시작한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분명 포퍼는 플라톤의 《국가》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그 누구보다 훌륭하고 쉽게 《국가》를 해설하고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마치 비록 비판적 관점이라고 하나 내가 플라톤의 《국가》를 상당히 재밌게 읽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당대 시기의 현상학적 접근을 한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은 충분히 훌륭한 논점의 책이지만, 근본적 원천을 비판한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비교해 같은 주제에 대한 생명력이 조금은 짧다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이 책이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교조주의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즉 경색된 사고, 믿고 있는 신념을 어떻게든 버리지 못하는 태도, 상대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 등. 

자유주의자 아롱의 사상은 특히 극단적 양분화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는 좌우를 막론하고, 자신이 믿는 것이 무조건 '정의'다라고 외치는 우리의 모습에 폐부를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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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전문가와 강적들 : 나도 너만큼 알아
톰 니콜스 지음, 정혜윤 옮김 / 오르마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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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문제는 그 모든 이가 자세한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숙고도 없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떠든다는 것이다.

그 어느 시대보다 소통수단이 다양해진 시대에 우리는 가장 극단적인 의견대립과 소통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나르시즘에 빠져있다. 인터넷에서 읽은 출처불명의 짧은 토막글들이, 이제는 단순히 직업훈련학교 기능 그 이상을 하지 않는 대학교 학위가,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동질의 사람들끼리 모이는 커뮤니티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확고한 신념을 강화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나르시즘은 무지에 대한 찬양. 즉 자신의 무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문가나 엘리트에 양가적 감정을 지닌다. 실제로 우리는 필요할 때 쉽게 권위에 의존하면서도, 내 확고한 의견에 반대되는 상황에서 전문가를 세상을 위협하고 그들만의 사회를 사는 귀족같은 것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리고는 이런 고루한 전문가의 복잡한 설명에 넌더리치며, 사실상 보다 더 귀족같은 삶을 사는 인터넷 속 인플루언서들의 단순명료한(하지만 연구나 숙고, 출처는 불분명한) 주장에 대해 쾌감과 공감을 느끼곤 한다.

물론 그렇다고 전문가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전문가도 실패한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전문가가 일반인보다 적어도 그 분야에서 더 정확하다는 것은 그들은 직업적 측면에서라도 꾸준히 검증하고, 반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일반인에게서 볼 수 없는 덕목이다.

그러나 사회가 분업화 되어 있듯, 전문가의 영역도 분업화 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흔히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역 밖의 일에 대해 잘 아는척 간섭하는 월권행위를 저지르면서 일반인들을 선동하거나 호도하기도 한다.
심지어 전문가조차 아닌 사람들도 자신의 발언권을 얻기 위해 커리어를 쌓고 그 권위를 이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어, 위근우 같은 인물을 보라. 그는 전문적인 사회학 학위도 없고 심지어 그 근본은 그저 디지털 관련 신문의 기자 출신으로 글을 써온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자극적인 글들로 유명세를 얻자 지금은 마치 정체성 정치를 대변하는 사회학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실 그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여러 부분에서 우리가 가진 무지에 대한 찬양과 알량한 학위와 인터넷 정보에서 오는 나르시즘에 대해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인 나 역시 일반인이기에 그 주장에 납득하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을 후벼파며, 저자의 주장이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생각이 일곤 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저자는 전문가도 실수하고 실패하며 월권행위를 일삼는 다는 문제를 잘 짚고 있다.
그래도 전문가의 의견은 적어도 사회의 대해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리거나 무엇보다 공론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조정하는 틀을 구축할 수 있다.

반지성주의 시대에 우리는 엘리트에 대해 불신하지며 경계하지만, 지금 권위주의와 극단주의,혐오주의가 절정에 다하는 상황을 본다면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전문가라기 보다는 무지와 사랑에 빠진 대중임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전문가는 예언자가 아니란 것이다. 전문가는 어떤 문제에 있어 최종 결정권한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조정하며 조언할 뿐이지 미래가 이렇게 될 거라 확답하는 예언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문가에 모아니면 도식의 답은 내놓는 예언자 역할을 강요한다. 그리고는 그들을 쉽게 엉터리 취급한다.

마치 주식시장에서 전문가의 역할은 추이나 시장상황의 분석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저 "내 주시이 오를까요? 내릴까요?"의 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정말 읽는 이로 하여금 양가적 감정, 공감과 함께 불쾌함도 주긴 하지만. 그것이 내 안에 자리잡은 반지성주의임은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극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 번쯤은 읽어볼 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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