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엄청 한물간 냄새 풀풀 풍기고 썰렁한 제목의 책이지만...
모두가 하루 2~3시간 노동하고 먹고살기. 매주 또는 월, 계절 별로 직장바꾸기. 생존에 필요한 노동은 최소화하고, 문화와 미적인 활동은 최대화 하기... 꿈같은 얘기라고?
햐~ 이건 내가 늘 얘기하던거고 난 이미 그렇게 살고 있고 ㅎㅎ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30년 전에 쓴 책인데, 지금의 우리 사회 혹은 세계를 보고 쓴것같다. 자본의 일부인 노동계급에 의한 주체적 생산, 집단소유, 자주관리는 자동화 정보화에 의한 타율적 생산메카니즘 완성으로 불가능하게 되었고, 오히려 비계급, 비생산자, 무권력자인 신프롤레타아만이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 자유의 시대를 열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누구냐고? 요샌 너무 흔해져서 온통...
이 책의 모티브는 마르크스가 [자본] 3권의 끝에서 말한 ' 필연성의 영역' 을 넘어선 곳에서만 '자유의 영역'이 시작될 수 있고, 필연성의 영역은 축소할 수 있지만 제거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데서 얻어온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과 반대로, 맑스는 연합한 생산자들에 의한 물적생산의 자주관리가 자유의 시대를 실현한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그는 물적 생산이 자연적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고,물적 생산의 영역 내에서 자유는 가장 인간적이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그리고 가능한 가장 적은 시간을 노동하는 것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한다. 자주관리는 바로 이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자유의 시대는 노동시간의 축소와 필요한 것의 생산에 요구되는 노력의 축소 덕분에 충분하게 실현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 필연성의 영역(필요노동)과 자율 활동 영역의 공존을 인정하고, 전자를 최소화하고 후자를 넓히는 것이 정치의 과제라는 것이다. 일명, 이원론적 사회..
기존 사회주의가 전체주의로 귀결된건 국유화, 자주관리로 필연의 영역을 없애려 했기 때문이고, 신자유주의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자율영역까지 필연화하려 한다. 이처럼 일원적 논리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필요노동은 기술적 자연 필연적 논리에 따르고, 자율활동은 인간의 자기완성의 과정 그자체이다. 현실은 뒤집어져 있지만, 전자는 후자의 보조수단이다. 노동시간을 축소하고 많은 시간을 가정과 마을 혹은 공동체에서 자기가 원하는 활동을ㅡ 마을 혹은 구, 시에 마련된 공방들, 아틀리에, 소극장, 도서관 등에서 ㅡ한다면, 사람들은 노동은 피하려 할것이다. 이에 따라 필요노동 영역은 더 적은 시간으로 효율성을 추구하게 되어 갈수록 인간적이고 협동적 생태적으로 생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필요노동도 지금처럼 자본만을 위한 쓸데없는 것 대신에 마을 공동 아틀리에, 도서관, 소공방, 음악실에 필요한 물건 위주로 자율활동에 필요한, 보다 나은 문화를 위한 생산에 쓰일 것이다.
결국 생산수단, 자본(임금)을 '누가' 소유하고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본질이 아니다. 진정, 노동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자유는 왜 필요한지, 결국 인간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이 문제다.
비로소 경제와 사회, 자연과 인간학이 만난다. 정치경제학은 물론이고 진보, 사회주의조차도 회피해온 물음들이...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 이라 평가하고, 불치병 걸린 아내를 20년 넘게 간호하다 생전에 약속한대로 나란히 누워 자유의지로 생을 마감한, 20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가장 순결한 영혼'이라 불렸던 앙드레 고르, 생태적 사회주의를 창시했다는 사람. 이런 사람이 말하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비판은 들어볼만하지 않는가.
30년 전이라니.. 우리가 시작할때, 이미 '그건 아닌데요'라고 했다니, 허~탈하지만 그때 알았던들, 레닌-스탈린주의 찌든 운동권들의 눈에 제대로 들어왔을리 없으니, 어쩌랴. 늘 한발 늦는게 철드는건데, 더 늦기전에 일독을 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