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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8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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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11 소위 미국 신자유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한 날이란다. 또다른 9.11 도 있다. 고 밑으로 길죽하게 생긴, 우리한텐 FTA덕에 거봉포도를 엄청 싸게 먹게해주는 나라, 정확히 40년전 1973년 9.11 세계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수립된 사회주의정부가 군부쿠데타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날. 칠레-산티아고에는 비가 내리고-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 미국CIA와 피노체트-3천여명 학살-17년 철권통치... 이렇게 ...연결되는건 알꺼이고, 아이러니한 건 칠레가 미국 시카고학파가 주도한 신자유주의의 첫번째 실험장이었단 사실이다. 시작과 몰락의 시점이 같은 날이라는 기막힌 우연.. 게다가 또 우연찮게도 피노체트가 가장 존경한 사람이 영광스럽게도 우리의 박정희였고, 또 우연히 오늘 2세는 아버지가 보낸 수십만 군인이 자행한 학살의 나라에 가서 비지니스하신다고 바쁘다, 또 안 우연히 아버지맹키로 경제개발 땜에...
이런 끔직한 우연의 계보를 들먹이려고 나온게 아닌데... 영혼의 계보 같은 건 없을까. 몇달전에 재밌게 읽은 소설 [영혼의 집]. 요즘 가장 안쓰는, 촌스러워 쓰기도 민망한 단어, 영혼에다가 집이라니..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 부엔디야 가문, 즉 남성을 중심으로 남미 백년의 역사를 사랑과 고독의 관점으로 그렸다면, [영혼의 집]은 클라라 가족 4대의 마술같은 사랑과 정열, 고독의 이야기 속에 칠레 근대사를 수놓는다. 처음 읽으면 '백년의 고독'과 너무 닮아 짝퉁을 의심하지만 읽을수록 풍성한 이야기보따리가 '백년..'과 삐까삐까한다. 작가의 친한 아저씨이자 아옌데대통령의 친구였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등장하는 등 잔재미도 쏠쏠하고, 후반부 쿠테타 군에 증손녀가 고문 받는 장면에선 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하여 남일같지 않고...
작가가 이사벨 아옌데라 귀에 익어 알아보니, 쿠테타 군에 맞선 총격전 도중 죽은 아옌데 대통령의 조카라는 사실에 또 놀라고...
지리적으로 가장 먼 나라가 우리와 인연이 많은데 주로 안좋은 일들이라 좀 씁쓸하다.
허황한 말장난같은 세상사와 온갖 사이버 이미지 매트릭스에 지쳐 영혼이 메말라 따스한 리얼리티에 목마른 사람은 이 집에 들어가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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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 현대의 상식과 진보에 대한 급진적 도전
이반 일리치 지음, 권루시안 옮김 / 느린걸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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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 폴폴 날리는 골목길에서 구슬치기 딱지놀이 하다가 목마르면 곁의 우물 두레박으로 길어 마셨다. 점심 먹고는 마을 뒷산으로 줄지어 소먹이러 갔다. 해넘어 돌아오다 우물 속을 들여다 보면 푸른 하늘과 맑은 지하의 청량함이 얼굴을 씻어주고 그날 밤 비상과 추락의 꿈을 만들어 주었다.
어느날 골목길에는 아스팔트가 생기고 노란 경고선이 그어졌다. 지하의 세상을 비추던 우물은 시멘트로 메워지고 돈내고 주유구 같이 생긴 꼭지로 물을... 몸통에 주유하게 되었다. 정적과 목소리와 기억이 사라지고 소음과 신음과 기호가 의미를 차지했다.
골목길, 우물, 뒷산, 정적, 기억... 세상의 모든 공유재가 욕구 충족을 위한 자원이 되어 갈때 진정 무슨일이 벌어졌을까?
이반 일리치, 우파는 물론 좌파조차도 외면한 급진사상가, 그의 책을 읽으면 진보와 보수 담론은 진정한 대립이 아니며 오히려 같은 뿌리의 다른 열매처럼 느껴진다. 신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초라하고 갈급한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전락해 갔는지 고고학적 역사의 거울에 비춰 보인다. 일리치 선생의 글을 읽으면 어떤 안타까움과 동경, 묘한 신비감과 신성함이 느껴지는 건, 근대가 그토록 저주해온 자연의 우연성, 숙명성을 긍정하고 그것을 축복과 은총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몸소 행했기 때문일까. 병원치료를 마다하고 볼에 생긴 종양 혹으로 이십년여 년 고통을 감수한 것은 우리야 미련하다고 하겠지만, 삶의 우연과 축복, 은총이 어떤것인지 자신의 신체로 보여준게 아닐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는 선한 사람들이 착실히 부를 축적하면서 조용히 시작된게 아니라 공유지침탈이라는 폭력에서 시작되었음을 강조했다면, 이반 일리치는 그 공유지의 범위를 넓힌다. 길과 우물, 걸음과 아픔, 목소리와 정적에 까지... 결국 그것들은 자연과 인간의 신비와 영혼과 품위 자체가 아닌가.
한국 최대의 '진보' 표방 정당과 최고의 '보수' 지키미 기관이 일대 전쟁을 치르는 시점에 기껏 '우물과 고요' 를 지키자고 자기얼굴의 암덩어리도 품고 살았던 한 바보가 생각나서 길게 중얼거렸다.
연설, 강연문 모음이라 각 꼭지가 독립적이고 어렵지않아 읽을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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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0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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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 <세계사의 구조/ 가라타니 고진>
10년 전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이 다시 온다.
스케일이 엄청나고, 시각도 매우 흥미롭다. 90년대 후 사회과학에서 논의 되던 쟁점을 거의 다 망라하고 정리하는 느낌. 이렇게 말끔하고 명료하게 역사와 논점을 정리하는 책은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이후로는 처음인듯.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의 주요 논지가 바로 맑스의 사회구성체론을 비판, 보완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진은 맑스의 생산양식이 아니라 교환양식의 관점으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다시 쓴다. 전자의 하부구조(봉건제, 자본제 등)대 상부구조(국가, 지배관념 등)의 개념으로는 사회주의 역사의 실패와 최근의 글로벌자본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라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자본을 폐지하여 사회주의국가가 된 러시아나 중국이 도리어 자본주의보다 더한 자본주의국가가 된 것을 맑스의 상부구조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고진은 국가는 자본의 상부구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교환양식을 가진 체계라는 것이다. 전자는 교환양식B(약탈-재분배), 후자는 교환양식C(상품교환). 그리하여 역사는 맑스의 원시공산제-노예제-봉건제-자본제가 아니라 교환양식A(부족사회의 증여-답례)-교환양식B(국가, 제국의 약탈-재분배)-교환양식C(상품교환)가 지배적인 사회로 재구성된다. 근대에 이르러 현재까지 이 세가지 교환양식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것이 각각 민족(네이션), 국가, 자본이 되며 헤겔이 말한바 이 세가지가 삼위일체 혹은 대립과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자본주의 이후는... 바로 교환양식D(X)가 지배적인 사회인데, 여기서 X는 이제까지 사회주의, 코뮨주의, 협동주의 등등으로 불리고 지향해 왔던 사회인데, 뭐라 부르든 그것은 교환양식A(증여-답례)가 고차원으로 회복된 사회를 의미한다.
이리하여 이 책은 교환양식A에서 시작하여 교환양식D에 이르는 장대한 세계사를 펼쳐보여주며 맑스의 원시공산제에서 시작하여 코뮨니즘에 이르는 역사를 고차원에서 회복하려한다.

이책의 읽을꺼리들...
원시사회의 증여-답례에 대한 재해석
이동사회-정주사회의 차이에 대한 재해석
국가의 기원, 관료제의 탄생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무지배)와 아테네의 데모크라시(민주주의)의 차이
세계제국(중국, 몽골, 이슬람 등), 세계종교(기독, 불교, 이슬람), 세계언어(한자, 라틴어), 세계화폐의 연관성
교환양식A의 회복운동으로서의 보편종교, 예언자(붓다. 예수. 공자 등), 천년왕국(에덴. 정토. 미륵 등)
마르크스의 국가론
교환양식C에 의해 해체되는 공동체의 상상적 회복으로서의 네이션(민족)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한 배경
칸트의 영구평화와 마르크스의 세계혁명의 유사성
교환양식D로서의 어소시에이셔니즘- 사회주의, 협동주의, 코뮤니즘...
자본ㅡ국가에의 대항운동
증여에 의한 영원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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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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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엄청 한물간 냄새 풀풀 풍기고 썰렁한 제목의 책이지만...
모두가 하루 2~3시간 노동하고 먹고살기. 매주 또는 월, 계절 별로 직장바꾸기. 생존에 필요한 노동은 최소화하고, 문화와 미적인 활동은 최대화 하기... 꿈같은 얘기라고? 
햐~ 이건 내가 늘 얘기하던거고 난 이미 그렇게 살고 있고 ㅎㅎ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30년 전에 쓴 책인데, 지금의 우리 사회 혹은 세계를 보고 쓴것같다. 자본의 일부인 노동계급에 의한 주체적 생산, 집단소유, 자주관리는 자동화 정보화에 의한 타율적 생산메카니즘 완성으로 불가능하게 되었고, 오히려 비계급, 비생산자, 무권력자인 신프롤레타아만이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 자유의 시대를 열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누구냐고?  요샌 너무 흔해져서 온통...
이 책의 모티브는 마르크스가 [자본] 3권의 끝에서 말한 ' 필연성의 영역' 을 넘어선 곳에서만 '자유의 영역'이 시작될 수 있고, 필연성의 영역은 축소할 수 있지만 제거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데서 얻어온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과 반대로, 맑스는 연합한 생산자들에 의한 물적생산의 자주관리가 자유의 시대를 실현한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그는 물적 생산이 자연적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고,물적 생산의 영역 내에서 자유는 가장 인간적이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그리고 가능한 가장 적은 시간을 노동하는 것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한다. 자주관리는 바로 이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자유의 시대는 노동시간의 축소와 필요한 것의 생산에 요구되는 노력의 축소 덕분에 충분하게 실현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 필연성의 영역(필요노동)과 자율 활동 영역의 공존을 인정하고, 전자를 최소화하고 후자를 넓히는 것이 정치의 과제라는 것이다. 일명, 이원론적 사회.. 
기존 사회주의가 전체주의로 귀결된건 국유화, 자주관리로 필연의 영역을 없애려 했기 때문이고, 신자유주의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자율영역까지 필연화하려 한다. 이처럼 일원적 논리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필요노동은 기술적 자연 필연적 논리에 따르고, 자율활동은 인간의 자기완성의 과정 그자체이다. 현실은 뒤집어져 있지만, 전자는 후자의 보조수단이다. 노동시간을 축소하고 많은 시간을 가정과 마을 혹은 공동체에서 자기가 원하는 활동을ㅡ 마을 혹은 구, 시에 마련된 공방들, 아틀리에, 소극장, 도서관 등에서 ㅡ한다면, 사람들은 노동은 피하려 할것이다. 이에 따라 필요노동 영역은 더 적은 시간으로 효율성을 추구하게 되어 갈수록 인간적이고 협동적 생태적으로 생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필요노동도 지금처럼 자본만을 위한 쓸데없는 것 대신에 마을 공동 아틀리에, 도서관, 소공방, 음악실에 필요한 물건 위주로 자율활동에 필요한, 보다 나은 문화를 위한 생산에 쓰일 것이다. 
결국 생산수단, 자본(임금)을 '누가' 소유하고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본질이 아니다. 진정, 노동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자유는 왜 필요한지, 결국 인간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이 문제다. 
비로소 경제와 사회, 자연과 인간학이 만난다. 정치경제학은 물론이고 진보, 사회주의조차도 회피해온 물음들이...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 이라 평가하고, 불치병 걸린 아내를 20년 넘게 간호하다 생전에 약속한대로 나란히 누워 자유의지로 생을 마감한, 20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가장 순결한 영혼'이라 불렸던 앙드레 고르, 생태적 사회주의를 창시했다는 사람.  이런 사람이 말하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비판은 들어볼만하지 않는가. 
30년 전이라니.. 우리가 시작할때,  이미 '그건 아닌데요'라고 했다니,  허~탈하지만 그때 알았던들, 레닌-스탈린주의 찌든 운동권들의 눈에 제대로 들어왔을리 없으니, 어쩌랴. 늘 한발 늦는게 철드는건데, 더 늦기전에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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