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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 ㅣ 하다 앤솔러지 4
김엄지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평점 :
영어 단어에는 의미는 같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게 사용해야 하는 단어가 있다. ‘listen’과 ‘hear’이 바로 그중 하나다. ‘듣다’라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듣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사용되는 언어가 결정된다. 주변의 소리를 그저 무의식적으로 접하는 것이 ‘hear’이라면, 의도적으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집중해서 듣는 것이 ‘listen’이다.
어릴 적에는 이 설명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 매 순간 나는 최선을 다해 ‘듣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엄마의 말을 들을 때와 남자친구의 말을 들을 때가 분명 같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하다 앤솔러지 네 번째 소설집 『듣다』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을 읽으며 '주체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안에서 '즐거움과 유쾌함을 이제 막 발견한 사람처럼(p.49 〈하루치의 말〉, 김혜진)' 기쁘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통이 매끄럽지 않다고 느껴질 때면, 대화의 끝에서 '무슨 뜻인 줄 알아?(p.33 〈사송〉, 김엄지)'라는 질문으로 상대가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결국 듣는다는 것은 '주고받는' 일이다. 그리고 타인과의 주고받음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소리를 '듣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괜찮아. 지금은 그냥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 남한테 피해 주는 일이나 나쁜 짓만 안 하면 되지(p.157 〈폭음이 들려오면〉, 서이제).'라고 말하는데 '막상 말을 뱉고 보니, 나 자신(p.157 〈폭음이 들려오면〉, 서이제)'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어디서 불어온 목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p.122 〈나의 살던 고향은〉, 백온유)'던 그 다정하고 무구한 목소리 역시, 결국은 나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듣고 싶었던 말은 종종 말이 아닌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작은 배려로, 세심한 관심으로, 살뜰한 보살핌으로, 따뜻한 눈길로, 정다운 미소로, 넉넉한 포옹으로, 애틋한 눈물로, 말 없는 희생으로, 너그러운 이해로, 무조건적인 지지로, 웅숭깊은 용서로, 함께 꾸는 꿈으로(p.194–195 〈전래되지 않은 동화〉, 최제훈).'
마음을 다해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