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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W.G. 제발트.
낯설지만 기대감이 컸다. 새로운 존재에 대한 쓸데없이 왕성한 호기심을 마음껏 적었더랬다. 해서 받게 된 책. 특이하게 스케치 노트도 함께 왔는데, 둘째 녀석에게 넘길까 하다가 내 것으로 고이 남겨뒀다. 그 시절 그때처럼, 그림을 한 번 그려봐야지 생각했다.
낯설고도 낯선 이름이다. 그런데 옮긴이는 적었다. 현재 가장 많이 토론되고 있는 독일작가라고. 도대체누가, 어디에서? 막 이랬다. 주체가 빠졌으니 온당치 않은 말이라고 삐딱하고 건방지게 생각했다. 돌아보니 책을 쫌(헙!!) 읽는다 자부했던 나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렸다 여긴 모양으로, 이에 대한 혼자만의 소심한 응징이 아니었나 싶다. 아, 부끄럽고 민망하다. 어쩌랴, 그게 나인 걸.
읽기 시작.
가만 있어봐. 누가 말하는 거야, 생각이야, 말이야. 실존 인물인지, 가공한 인물인지. 역사적 사실인지, 허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문단 구분도 없고, 그저 줄줄줄 이어지는 문장, 문장들. 도레미’파’ 정도의 음조로 담담하게 이어지는 글을 쫓으려니 꽤나 힘들었다.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려 ‘솔’음으로 소리내 읽기도 했지만 솔직히 몇 번 졸기도 했다.
시종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울지도 웃지도 않고, 크게 감탄하지도 실망하지도 않는,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화자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걸으며 보이는 풍경, 떠오르는 사람, 그곳의 역사, 사물 등에 대해서. 듣고 흘려버려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 툴툴거렸는데, 어느 순간 행여 한 단어라도 놓칠까 그의 곁에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쫑긋 귀를 세우고 있는 나를 보고 말았다.
어떤 책이든 어렵사리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아하! 하며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이 <토성의 고리>역시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른채 그저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소설의 중반에 이르자 훅! 하고 홀라당 넘어가고 만 것.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어느 순간 온몸이 흠뻑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행색이랄까.
화자가 만난 작가 마이클 햄버거. 그는 일찍이 고국 독일을 떠나 영국에 정착한 작가다. 어느 날, 그는 고향 도시를 찾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온전히 남아 있는’ 자신이 살았던 집과 마주한다. 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에피소드임에도 나는 꽤나 후들거렸다. 몇 년 전, 나의 경험과 정확히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도 그랬다. 내가 살던 집을 올려다보며 ‘내가 어떤 수수께끼를 올바로 풀어내기만 하면’ 우리가 그 집을 ‘떠난 뒤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사건들을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이제 모든 일이 내게 달린 것처럼, 정신을 약간만 집중하면 그간의 일 전체를 철회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아빠와 언니가 예전처럼 우리 곁에 살고 있을 듯했다. ‘한순간만 매우 집중하면, 수수께끼에 숨겨진 핵심 단어의 음절들을 조합해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는데... 그랬었다. 조금 슬펐던가. 잘 모르겠다. 하긴 이제와서 어쩌자고. 잊혀진 것인지, 잊어간 것인지도 모를 희미해진 기억을 애써 떠올릴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이미 모든 시간이 지나갔으며, 우리의 삶이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의 여운이 비치는 것일 따름’인 것이기에.
W.G. 제발트.
낯설지만 기대감이 컸다. 새로운 존재에 대한 쓸데없이 왕성한 호기심을 마음껏 적었더랬다. 해서 받게 된 책. 특이하게 스케치 노트도 함께 왔는데, 둘째 녀석에게 넘길까 하다가 내 것으로 고이 남겨뒀다. 그 시절 그때처럼, 그림을 한 번 그려봐야지 생각했다.
낯설고도 낯선 이름이다. 그런데 옮긴이는 적었다. 현재 가장 많이 토론되고 있는 독일작가라고. 도대체누가, 어디에서? 막 이랬다. 주체가 빠졌으니 온당치 않은 말이라고 삐딱하고 건방지게 생각했다. 돌아보니 책을 쫌(헙!!) 읽는다 자부했던 나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렸다 여긴 모양으로, 이에 대한 혼자만의 소심한 응징이 아니었나 싶다. 아, 부끄럽고 민망하다. 어쩌랴, 그게 나인 걸.
읽기 시작.
가만 있어봐. 누가 말하는 거야, 생각이야, 말이야. 실존 인물인지, 가공한 인물인지. 역사적 사실인지, 허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문단 구분도 없고, 그저 줄줄줄 이어지는 문장, 문장들. 도레미’파’ 정도의 음조로 담담하게 이어지는 글을 쫓으려니 꽤나 힘들었다.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려 ‘솔’음으로 소리내 읽기도 했지만 솔직히 몇 번 졸기도 했다.
시종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울지도 웃지도 않고, 크게 감탄하지도 실망하지도 않는, 감정 변화가 거의 없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화자는 나지막이 읊조린다. 걸으며 보이는 풍경, 떠오르는 사람, 그곳의 역사, 사물 등에 대해서. 듣고 흘려버려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 툴툴거렸는데, 어느 순간 행여 한 단어라도 놓칠까 그의 곁에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쫑긋 귀를 세우고 있는 나를 보고 말았다.
어떤 책이든 어렵사리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아하! 하며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이 <토성의 고리>역시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른채 그저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소설의 중반에 이르자 훅! 하고 홀라당 넘어가고 만 것.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어느 순간 온몸이 흠뻑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행색이랄까.
화자가 만난 작가 마이클 햄버거. 그는 일찍이 고국 독일을 떠나 영국에 정착한 작가다. 어느 날, 그는 고향 도시를 찾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온전히 남아 있는’ 자신이 살았던 집과 마주한다. 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에피소드임에도 나는 꽤나 후들거렸다. 몇 년 전, 나의 경험과 정확히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도 그랬다. 내가 살던 집을 올려다보며 ‘내가 어떤 수수께끼를 올바로 풀어내기만 하면’ 우리가 그 집을 ‘떠난 뒤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사건들을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이제 모든 일이 내게 달린 것처럼, 정신을 약간만 집중하면 그간의 일 전체를 철회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아빠와 언니가 예전처럼 우리 곁에 살고 있을 듯했다. ‘한순간만 매우 집중하면, 수수께끼에 숨겨진 핵심 단어의 음절들을 조합해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는데... 그랬었다. 조금 슬펐던가. 잘 모르겠다. 하긴 이제와서 어쩌자고. 잊혀진 것인지, 잊어간 것인지도 모를 희미해진 기억을 애써 떠올릴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이미 모든 시간이 지나갔으며, 우리의 삶이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의 여운이 비치는 것일 따름’인 것이기에.
“햇빛과 그것이 저물던 모습....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이런 기억의 파편이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론 실제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건물이 무너졌고, 너무 많은 잔해가 그 위에 쌓였으며, 퇴적물과 빙퇴석 또한 극복할 수 없다.” (208쪽)
작품을 관통하는 어떤 정서가 있는데, (용기내어) 거칠게 단순화시켜 그것을 ‘덧없음’ 으로 적어본다. 앞에서 잠깐 얘기한 작가가 취한 글감의 사실 여부는 하등 중요하지 않구나 여겨지는 지점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리’ 라는 식의 현실을 달관 혹은 초월한 듯한 냉소적인 면모가 강하다고 할까.
밑줄을 긋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일부분을 발췌해본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들의 불가시성과 불가해함, 이것은 우리의 세계란 다른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28쪽)
“인생이란 좋든 싫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해야 하는 희비극 - 꿈은 많고 행복의 빛은 드물며, 약간의 분노에 환멸이 더해지고, 고통의 세월 뒤에 끝이 오는 것이지요.” (141쪽)
“케이스먼트의 동성애가 그에게 사회계급과 인종의 벽을 넘어서 권력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 노예화와 불구화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었다는 것이다.” (161쪽)
“역사란 해변으로 거듭 몰려오는 파도처럼 우리를 덮치는 불운과 시험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 가운데 어느 한순간도 진정으로 근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래는 오로지 우리가 현재 지닌 두려움과 희망의 형태로만 현실성을 지니며, 과거는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182쪽)
“고등식물의 목탄화, 모든 가연성 물질의 지속적인 연소는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을 확산시키는 동력이다.연소는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다. 우리가 고안해낸 기계들은 우리의 신체나 우리의 동경처럼 서서히 작열하는 심장을 갖고 있다. 인간 문명 전체는 애당초부터 매시간 더 강렬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서서히 사그라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은 우리의 도시들이 빛을 발하고, 아직은 불이 번져간다.” (199쪽)
옮긴이는 작품 속 화자가 ‘진지한 비가적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끊임없이 ‘파괴의 현장’을 만난다. ‘파괴에 대한 백과사전적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정도니 그의 슬픔이 쉽게 잦아 들리 만무하다.
“역사의 과정에서 파괴된 채 잊혀가는 것들을 복원해내고 우리 앞에 드러내는 것이 그가 소설에서 해내고자 하는 작업이다. 이런 그의 시선은 비단 유대인이나 노예화된 민족, 제국주의의 희생자, 문명의 흐름에서 비켜난 삶을 살아간 아웃사이더 등의 인간집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갑작스런 병의 확산으로 파괴된 느릅나무 숲, 버려진 공장, 몰락하는 도시, 대규모의 산업적 규모로 살해된 청어와 누에, 나아가 사라지고 잊힌 과거의 텍스트 들까지 아우르고 있어 가히 파괴에 대한 백과사전적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348쪽)
파괴의 현장을 제 발로 찾는 작가(화자, 그 구분이 사실 무의미하다.)의 속내가 궁금하다.작가는 오늘날 계몽과 진보,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기념비적’ 성과들이 그것이 낳은 파괴의 지점에서부터 성찰되고 재해석되어야 함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것으로 마무리하기엔 또 찜찜하다. 그 파괴의 현장은 결국 몰락의 현장. 그곳에서 화자는 슬픔은 물론 ‘지상의 모든 것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둘을 어떻게든 한데 잘 엮어 이 책의 주제는... 하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을 ‘관성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으려나. ‘관성의 법칙’이란 과학용어가 나오니 순간 뇌리를 스치는 ‘로슈한계’ 맨 앞 토성의 고리에 대해 작가가 인용한 부분에 나온다.
다시 처음으로!
제목이 <토성의 고리>
왜 제목을 ‘토성의 고리’라 했을까. 작가가 인용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본다.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과거에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로슈한계 : 위성이 모행성의 기조력에 부서지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한계거리)
흠.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막 적어본다.
토성은 자신이 갖고 있던 달을 파괴했다. 그런데 그 파편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파편들은 토성을 감싸 돌고 있다. 희한하게도 그로 인해 토성은 더욱더 개성있고 독자적인 존재가 되어 있다.
이런! 더더욱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개미지옥같은 ‘토성의 고리’라니!!!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아주 흐릿하게만 기억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