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장치란 무엇인가?
* 아래의 글은 푸꼬의 사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장치(dispotif)'에 대한 아감벤의 해석을 담고 있다. 이탈리아어로 씌여진 원래 제목은 <Che cos'è un dispositivo ?>를 양창렬 님께서 불어본 <Qu'est-ce qu'un dispositif >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이다. 나도 이 번역본을 www.commun -e.cyworld.com에서 퍼 왔고, 이 번역본은 초벌 번역이므로 무단으로 전제하거나 복제는 삼가주시고 부득이하게 인용하시는 분들은 이를 유념해 주시기 바란다. 아울러 들뢰즈의 푸꼬의 장치개념에 대한 글(심지어 제목도 똑같다.)도 있으니 비교해서 보시면 좋을 듯싶다.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원본 : Giorgio Agamben, Che cos'è un dispositivo ?, Nottetempo, 2006.
번역 대본 : Giorgio Agamben, Qu'est-ce qu'un dispositif ?, Éditions Payot & Rivages, 2007.
1. 철학에서 용어론적 문제들은 중요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한 철학자가 말했듯이, 용어론은 사유의 시적 순간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전문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그것을 정의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플라톤은 그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이데아를 결코 정의한 적이 없다. 다른 이들, 가령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그들의 용어론을 more geometrico(기하학적 방법에 따라) 정의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의 가설에 따르면, 장치(dispositif)라는 단어는 푸코의 사유 전략에서 결정적 용어다. 그는 특히 70년대부터 그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때 그는 '통치성'이나 '인간들에 대한 통치'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결코 고유한 의미에서 그 단어에 대한 정의를 제공하지 않지만, 1977년의 한 인터뷰에서 그것에 근접한다.
"제가 이 이름 하에서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 담론들, 제도들, 건축 정비들, 규칙 결정들, 법들, 행정 조치들, 과학적 언표들, 철학적, 도덕적, 박애적 명제들을 포함하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집합입니다. 요컨대 말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말해지지 않은 것의 집합. 바로 이것이 장치의 요소들입니다. 장치 자체는 우리가 이 요소들 사이에 세우는 네트워크인 것이죠. [...] 장치란 어떤 주어진 순간에, 어떤 긴급성에 답하는 것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일종의 - 말하자면 - 형성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장치는 지배적인 전략 기능을 갖는 것이죠 ... 저는 장치가 본성상 본질적으로 전략적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거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 힘관계들에 대한 모종의 조작, 이 힘관계들에 대한 합리적이고 계산된 개입 - 그것들을 어떤 방향으로 전개시키기 위해서, 혹은 그것들을 봉쇄하거나, 안정시키거나, 활용하기 위해서 - 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장치는 항상 권력게임에 등록되지만, 그것은 또한 권력게임에서 나오기도 하고, 그것을 조건짓기도 하는 지식의 하나 혹은 여러 제한들에 연결됩니다. 바로 이것이 장치입니다. 여러 지식 유형들을 떠받치기도 하고, 그것들에 의해 떠받쳐지기도 하는 힘관계들의 전략들."(<말해진 것과 쓰여진 것Dits et écrits>, 3권, 299쪽 이하)
위의 이야기를 세 가지로 간략히 요약해보자.
1) 어떤 것(담론들, 제도들, 건축물들, 법들, 질서유지(police) 조치들, 철학적 명제들)이 담론적이든 아니든, 그것을 잠재적으로 포함하는 이질적인 집합이 관건이다. 그 자체로 가정된 장치는 이 요소들 사이에 세워지는 네트워크다.
2) 장치는 항상 구체적인 전략적 기능을 가지며, 항상 권력 관계 안에 등록된다.
3) 그 자체로, 장치는 권력과 지식의 관계들의 교차의 결과다.
2. 나는 이 용어의 간략한 계보를 추적할 것을 제안한다. 먼저 푸코의 저작 내에서, 그 다음 보다 폭넓은 역사적 맥락 안에서.
60년대 말, 대략 푸코가 자신의 연구 대상을 정의하기 위해 『지식의 고고학L'archéologie du savoir』을 썼을 당시에, 그는 장치(dispositif)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그와 어원적으로 가까운 '실증성(positivité)'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렇다고 그가 '실증성'이라는 용어에 대해 더 많이 정의내린 것은 아니다. 나는 자주 푸코가 이 용어를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었을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장 이뽈리트(Jean Hyppolite)의 에세이, 『헤겔 역사 철학 입문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histoire de Hegel』(1948)을 다시 손에 들기 전까지 말이다. 푸코와 이뽈리트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다. 푸코는 때때로 이뽈리트를 그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이뽈리트는 먼저 앙리 4세 고등학교의 고등 사범 학교 입시 준비반에서, 그 다음에는 고등 사범 학교에서 푸코의 선생이었다.
이뽈리트의 에세이의 3장 제목은 「이성과 역사. 실증성과 운명의 이념들」이다. 저자는 거기에서 1795년과 1796년을 아우르는 '베른과 프랑크푸르트' 시기의 두 저작을 분석하는데 집중한다. 첫 번째 저작의 제목은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용어가 거기에서 나오는데, 바로 「기독교의 실증성(Die Positivität der christliche Religion)」이다. 이뽈리트에 따르면, '운명'과 '실증성'은 헤겔 사유의 두 열쇠 개념이다. 특히, '실증성'이라는 용어는 '자연 종교'와 '실증 종교' 사이의 대립 속에서 그것의 고유한 장소를 찾는다. 자연 종교가 인간 이성과 신성의 직접적이고 일반적인 관계와 관련되는 반면, '실증적' 혹은 역사적 종교는 신앙들, 규칙들, 의례들의 집합을 포함하는 바, 그것들은 한 주어진 사회에서, 그 역사의 한 주어진 순간에 외부로부터 개인들에게 부과된 것들이다. 이뽈리트가 인용하는 어느 구절에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실증 종교는 영혼 안에 다소 강제로 새겨진 감정들, 그리고 명령의 효과이자 복종의 결과이며, 직접적인 이득 없이 완수된 행위들을 함축한다."(『헤겔 역사 철학 입문』, 43쪽)
이뽈리트는 어떻게 자연과 실증성의 대립이 이런 뜻에서 자유와 강제의 변증법, 이성과 역사의 변증법에 상응하는지를 보여준다. 푸코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을 한 구절에서, 장치 개념의 간단한 전조 이상의 것을 담고 있는 한 구절에서, 이뽈리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실증성 개념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질문들의 고갱이를 보게 된다. 그리고 순수 이성(이론적이고, 특히 실천적인)과 실증성, 즉 역사적 요소를 변증법적으로 - 아직 그 자체로 의식되지는 않은 변증법 - 연결시키려는 헤겔의 계속적인 시도들을 본다. 어떤 의미에서, 헤겔은 실증성을 인간의 자유에 대한 장애물로 간주하며, 그래서 그 자체로 실증성은 비난받는다. 한 종교의 실증적 요소들, 그리고 우리가 덧붙일 수 있다면, 한 사회 상태의 실증적 요소들을 연구하는 것은 그 안에서 인간에게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것, 이성의 순수성에 얼룩을 묻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헤겔의 발전 과정에서 더 우위를 점하게 되는 실증성은 추상적 성격을 상실하고, 삶의 구체적 풍요로움에 적합하게 되는 이성과 화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왜 실증성 개념이 헤겔의 관점의 한 가운데에 있는지를 본다."(위의 책, 46쪽)
이뽈리트의 말마따나, '실증성'이란 청년 헤겔이, 규칙, 의례, 제도의 무게와 더불어, 외부의 권력에 의해 개인들에게 부과되었으며, 또한, 말하자면, 신앙과 감정체계 속에 내부화된 역사적 요소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면,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푸코는 그 자신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결정적 문제 - 생명체이자 역사적 요소로서의 개인들 사이의 관계 - 에 대해 입장을 취한다. 만일 우리가 실증성을 권력 관계가 그 안에서 구체화되는 제도들, 주체화 과정들, 규칙들의 집합으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푸코의 최종 목적은 헤겔에서처럼 이 두 요소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 두 요소들을 대립시키는 갈등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푸코는 오히려 구체적인 양식들 - 그것들을 통해 실증성들(혹은 장치들)이 관계 속에서, 권력의 메커니즘과 개인 안에서 작용하는 - 을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3. '장치'라는 용어가 푸코의 사유의 본질적인 전문 용어라고 내가 주장했던 이유가 이제 분명해졌으리라. 그것은 여러 다른 권력 기술 중 하나를 지칭하는 특수 용어가 아니라, 이뽈리트의 해석에서 청년 헤겔의 '실증성'이 갖는 만큼의 폭을 갖는 일반 용어다. 푸코의 전략에서, 이 용어는 그가 비판적인 방식으로 보편자라고 정의하는 것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잘 알려진 바대로 푸코는 항상 그가 '보편자'라고 부르는 일반 범주나 합리적 단위 실체들, 가령 국가, 주권, 법, 권력을 다루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푸코의 저작에서 일반적인 효과를 내며 작동하는 개념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푸코의 전략에서, 장치들은 정확히 이 보편자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호출된 것이다. 장치들은 이런 저런 질서 유지 조치나 이런 저런 권력 기술에 상응하지 않으며, 추상을 통해 획득된 일반성에는 더더욱 상응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1977년 인터뷰에서 "이 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네트워크"라고 지시되었던 것에 상응한다.
우리가 이제 흔히 사용되는 프랑스어 사전에 있는 '장치'라는 용어의 정의에 관심을 쏟게 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 구분을 발견하게 된다.
1) 엄밀한 뜻에서 법적 의미 : "판결 주문(注文)이란 판결 이유와 달리 결정을 담고 있는 판결의 일부분". 즉 결정하고 규정하는 판정(혹은 법)의 일부분.
2) 기술적 의미 : "기계나 메커니즘의 부품들이 배치되는 방식, 넓게는 그 메커니즘 자체".
3) 군사적 의미 : "하나의 계획에 맞게 배치된 수단들 전체".
이 의미들 각각은 어떤 의미에서 푸코가 그 단어를 썼던 용법에 현존한다. 그러나 사전들, 특히 역사적이고 어원학적인 성격이 없는 사전들은 그저 한 용어의 상이한 의미들을 나누고 분리하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이 [의미의] 분열은 일반적으로 원래는 하나였던 의미가 역사적으로 전개되고, 절합되는 것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장치'의 경우, 이 원래의 의미란 무엇일까? 분명하거니와 그 용어는, 일상적 용법이나 푸코가 제안하는 용법에서, 솔직히 담론적, 비담론적, 법률적, 기술적, 군사적 실천과 메커니즘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실천과 메커니즘의 목적은 긴급성에 직면하여 다소 직접적인 효과를 얻어내는 데 있다. 그러나 장치라는 근대적 용어는 어떤 실천(praxis) 전략과 사유 전략 안에, 어떤 사회적 맥락 안에 그 기원이 있을까?
4. 나는 지난 3년간 한 연구에 몰두했고, 이제야 그 끝을 어렴풋이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연구를 대략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교회사 초기에(소위 2-6세기 사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는 용어는 신학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는 희랍어에서 oikonomia가 oikos(가정)의 관리, 보다 일반적으로는 경영, management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듯(『정치학』, 1255b21), 지식의 패러다임이 관건이 아니라, 실천, 어떤 문제나 개별 상황에 그때그때 대면해야 하는 실천적 활동이 관건이다. 왜 교부들은 이 용어를 신학에 도입할 필요를 느꼈을까? 어떻게 신의 경제에 대해 말하는 데 도달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학사에 있어서 극히 미묘하고 중대한 문제인 삼위일체를 언급해야 한다. 2세기 당시에, 예수의 형상의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가 논의되었을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바대로, 이성적인 사람들은 교회 내에서 아주 강력한 저항을 표시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삼위일체를 도입하면] 기독교 신앙에 다신론과 이교적 태도(paganism)를 다시 도입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불안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완고한 상대들(그들은 나중에 '군주론자(단일신론자)', 즉 일인 통치의 옹호자들이라고 불리게 된다)을 물리치기 위해,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이레네우스 같은 신학자들은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를 채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주장은 대략 이렇다. "신은 그것의 존재와 그것의 실체에 있어서 분명 하나다. 그러나 그것의 오이코노미아, 즉 그가 그의 가정,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창조한 세계를 조직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는 셋이다. 좋은 아버지가 자신의 권력과 단일성을 전혀 상실하지 않고도 그의 아들에게 어떤 직무나 과제에 대한 책임을 부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은 예수에게 인간들에 대한 '경제'. 관리, 통치를 부여한다." 따라서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는 성자의 강생, 대속과 구원의 경제를 의미하기 위해 전문화된다. 때문에, 일부 영지주의 분파(그노시스파)에서 예수는 '경제의 인간(ho anthropos tès oikonomias)'이라고 불린다. 신학자들은 점차 '신학 담론(logos)'과 '경제 로고스'를 구별하는 데 익숙해진다. 오이코노미아는 삼위일체 교리와 세계에 대한 신의 섭리적 통치가 그것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도입되는 장치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신학자들이 존재의 구도 위에서 신에게서 피하고, 또 억압하려 했던 분열이 신 안에서 존재와 행위, 존재론과 실천을 나누는 휴지(休止)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 행위(경제, 그러나 또한 정치)는 존재 안에 어떤 토대도 갖지 않는다. 그것이 오이코노미아 교리가 서구 문화에 유산으로서 남겨준 분열증이다.
5. 이 간략한 설명 덕분에 우리는 오이코노미아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서 떠맡을 수 있었던 기능의 중심적 성격과 중요성을 파악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서부터, 오이코노미아 개념은 섭리 개념과 혼동되며, 결국 세계와 인간들의 역사에 대한 구원적 통치를 의미하게 된다. 라틴 교부들이 이 핵심적인 희랍 용어를 번역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가 무엇이었을까? Dispositio다. 우리의 용어 'dispositif'가 그로부터 파생된, dispositio라는 라틴 용어는 결국 신학적 oikonomia의 모든 의미상의 복잡함들을 떠안게 된다. 푸코가 말하는 '장치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 신학적 유산과 연결되어 있다. 장치들은 신 안에서 존재와 실천, 자연(혹은 본성)과 그가 피조물들의 세계를 관리하고 통치하는 작업을 분리하고 결합하는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 장치란 용어는 존재 안에 최소한의 토대 없이도 순수 통치 활동이 그것으로, 그것에 의해 실현되는 것을 명명한다. 때문에, 장치들은 항상 주체화 과정을 함축해야 한다. 장치들은 그것들의 주체를 생산해야만 한다.
이 신학적 계보에 비추어볼 때, 푸코의 장치들은 청년 헤겔의 '실증성들' 뿐만 아니라 후기 하이데거의 몰아세움(Gestell) - 그것의 어원 역시 dis-positio, dis-ponere(독일어 stellen(세우다)은 라틴어 ponere에 해당한다)와 무관하지 않다 - 이 교차했던 맥락 속에서 훨씬 더 큰 중요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가 『기술과 전향』에서 Ge-stell이 일반적으로 '장치(appareil)'(Gerät)를 의미한다고 적을 때, 하지만 그가 이 용어를 인간을 몰아세우는, 즉 인간에게 주문 요청(bestellen) 방식에 대한 실재의 탈은폐를 명하는 닦아세움(stellen)에 대한 묵상으로 이해할 때, 이 용어와 신학자들의 dispositio의 근접성, 뿐만 아니라 이 용어와 푸코의 장치들 사이의 근접성은 명백해진다. 이 모든 용어들을 아우르는 끈이 바로 경제에 대한 참조, 즉 실천, 지식, 조치, 제도의 접합 - 그것들의 목적은 인간들의 행동들, 몸짓들과 생각들을 유용하길 바라는 뜻에서 경영, 통치, 통제, 유도하는 것이다 - 에 대한 참조다.
6. 내가 연구하면서 끊임없이 적용한 방법상의 원리 중 하나는, 내가 작업하는 컨텍스트에서와 마찬가지로, 텍스트 안에서도 포이에르바하가 철학적 요소라고 불렀던 것, 즉 텍스트들의 Entwicklungsfähigkeit의 지점, 텍스트들이 밀어부쳐질 수 있는 장소와 순간을 식별해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방향으로 한 저자의 텍스트를 해석하고 전개시킬 때, 우리가 해석학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들을 어기지 않고서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늘 오기 마련이다. 이것은 연구된 텍스트의 전개가 결정불가능성의 지점 - 거기에서는 저자와 해석자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 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비록 그것은 해석자에게는 특히 행복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는 이제 자신이 분석에 회부한 그 텍스트를 버리고 자신을 위한 성찰을 이어나가야 할 시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푸코의 저작에 대한 문헌학적 맥락을 버리고, 이제 장치들을 새로운 맥락에 위치시켜야 한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존재를 두 커다란 집합 혹은 종류로 일반적이고 대대적으로 분할할 것을 제안한다. 한 편에는 생명체들(혹은 실체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장치들 - 그 안에서 생명체들이 끊임없이 포획된다 - 이 있다. 따라서 신학자들의 용어론을 다시 쓴다면, 한 편에는, 피조물들의 존재론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그 피조물을 통치하고, 선(善)으로 인도하려는 장치들의 오이코노미아가 있다.
이미 푸코의 장치들이 가졌던 아주 폭넓은 종류에 훨씬 더 큰 일반성을 부여함으로써, 나는 어쨌든 생명체들의 몸짓들, 행동들, 의견들, 담론들을 포획하고, 유도하고, 결정하고, 차단하고, 만들고, 통제하고,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을 장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감옥, 수용소, 판옵티콘, 학교, 고백, 공장, 규율, 법적 조치들 - 이것들과 권력의 절합은 어떤 의미에서 명백하다 - 뿐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핸드폰, 그리고 언어 자체도 장치이다. 언어는 아마도 가장 오래된 장치로서, 이미 수 천 년 동안 영장류 - 아마도 그를 기다렸던 결과들을 고려할 수 없었던 - 는 그 장치 안에 스스로를 붙들리게 만드는 무의식을 가졌다.
그러므로 두 종류, 즉 생명체(혹은 실체)와 장치들이 있다. 이 둘 사이에 제 3항으로서 주체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생명체와 장치가 서로 맞대면하는 관계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을 주체라고 부른다. 자연히, 고대 형이상학에서처럼, 실체들과 주체들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서로 혼동되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어, 한 동일한 개체, 한 동일한 실체가 여러 주체화 과정의 장소일 수 있다. 휴대폰 사용자, 인터넷 사용자, 시나리오 작가, 탱고 애호가, 대안 세계화 운동가 등. 우리 시대의 장치들의 무한한 발전에, 역시 무한한 주체화 과정들의 발전이 상응한다. 이 상황은 우리 시대의 고유한 주체성 범주가 동요하고, 그것의 일관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하자면, 그것은 소멸이나 지양이라기보다는, 모든 개인적 정체성에 끊임없이 수반되었던 가면극의 차원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산종(散種)의 과정인 것이다.
7.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발전의 최종 단계를 장치들의 거대한 축적과 증식으로 정의한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분명, 장치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이래로 존재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개인들의 삶의 한 순간에서만, 장치에 의해 만들어지고, 영향을 받고,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상황에 맞설 수 있을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 장치들과 대면할 때, 어떤 전략을 채택해야 할까? 그 장치들을 단순히 파괴하거나, 일부 순진한 사람들이 제안하듯, 올바르게 그 장치들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즉 개인들의 몸짓과 행동이 완전히 핸드폰에 의해 재가공된 나라에 살면서, 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훨씬 더 추상적으로 만들어버린 이 장치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품게 되었다. 비록 나는 수차례에 걸쳐 어떻게 핸드폰을 파괴하거나 제거할 수 있을지 자문하면서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서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십중팔구 장치들은 인간들이 우연히 부딪히는 사고가 아니다. 인간들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범주하에 우리가 모아놓는 동물들을 인간으로 만든 '인간화' 과정 자체 안에 그것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인간을 만들어낸 사건은 사실 생명체에게는 일종의 분열을 구성한다. 그 분열은 어떤 의미에서 오이코노미아가 신 안에서 존재와 행위 사이에 도입한 바 있는 분열을 되풀이한다. 이 분열은 생명체를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해내고, 또 생명체가 환경 - 윅스퀼(Uexküll)과 그 이후 하이데거가 le cycle récepteur-désinhibiteur[수용체-억제를 풀어주는 회로?]라고 부르는 것 - 과 맺는 직접적인 관계로부터 그것을 분리해낸다. 이 관계가 깨지고 중단되는 일이 벌어질 때, 생명체는 권태(즉, 억제를 풀어주는 것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중단시킬 수 있는 능력)와 열림(즉, 존재로서의 존재를 알고,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가능성과 더불어, 이 열림을 도구들, 사물들, 신기한 기구들, 기계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술들로 가득 채우는 장치들의 가능성 역시 즉각적으로 주어진다. 장치들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로부터 분리되고, 그럼으로써 열림 그 자체, 존재로서의 존재를 향유하는 것으로부터 분리된 동물적 행동들을 헛돌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모든 장치의 근저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욕망이 있으며, 분리된 영역 내에서의 이 욕망의 주체화와 마찬가지로 포획은 장치의 종별적 힘을 구성한다.
8. 우리가 장치들과 대면할 때 채택해야 하는 전략은 단순할 수 없다. 사실상 장치들에 의해 포획되고 분리된 것을 해방시키고, 그것을 공통적 사용에 돌려주는 것이 관건이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나는 이제 내가 최근에 작업하기에 이른 한 개념으로 방향을 돌리고 싶다. 로마법과 종교 영역에서 나온 용어인(법과 종교는 비단 로마에서만이 아니더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속화가 그것이다.
로마법에 따르면, 어쨌든 신들에게 속한 사물들은 신성하거나 종교적이었다. 그 자체로, 그런 사물들은 인간들의 자유로운 사용이나 상업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팔 수도, 담보를 위해 그것을 빌려줄 수도, 용익권으로 그것들을 양도할 수도, 혹은 그것들을 예속시킬 수도 없었다. 하늘의 신들(우리가 '신성하다'라고 불렀던)이나 지옥의 신들(우리가 간단히 '종교적'이라고 말했던) 전용으로 예비된, 이 특별한 사용불가능성을 해치고, 위반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다. 신성화하는 것(sacrare)이 인간 법의 영역 밖으로 사물들이 나가는 것을 지칭했던 반면, 세속화는 반대로 그 사물들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용에로 반환되는 것을 의미했다. 위대한 법률가 트레바티우스(Trebatius)는 다음과 같이 적을 수 있었다. "고유한 의미에서, 세속적인 것이란 신성하거나 종교적인 것이었다가 인간들의 사용과 소유에로 반환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종교란, 사물들, 장소들, 동물들 혹은 사람들을 공통적 사용에서 뽑아내서 그것들을 분리된 영역 한 가운데로 옮기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분리 없이 종교는 없을 뿐 아니라, 모든 분리는 진정으로 종교적인 핵심을 수중에 포함하거나 간직하고 있다. 분리를 작동시키고 조절하는 장치는 희생이다. 희생이란 각각의 경우에 세세한 일련의 의례들 - 다양한 문화에 따라 상이한, 허버트와 모스가 면밀히 조사한 바 있는 - 을 통해 세속적인 것에서 신성한 것에로, 인간들의 영역에서 신들의 영역에로의 이행을 표식한다. 두 영역을 분리하는 휴지(休止)는 본질적인데, 이는 희생양이 이런 저런 뜻에서 통과해야 하는 문턱이 본질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의례에 의해 분리되었던 것은, 의례에 의해 세속적 영역에로 반환될 수 있다. 세속화는 희생이 분리하고 분할했던 것을 공통적 사용에 반환하는 대항-장치(contre-dispositif)다.
9.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권력의 근대적 형상들은 종교를 정의하는 분리 과정들을 일반화시키고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만일 우리가 방금 검토한 장치들의 신학적 계보, 그리고 그 장치들을 오이코노미아라는 기독교 패러다임(즉, 세계에 대한 신의 통치)으로 연장시킬 수 있게 해준 바로 그 계보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근대적 장치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장치들과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차이 때문에 근대 장치들을 세속화하는 일은 특별히 어려워진다. 사실, 모든 장치는 주체화 과정을 함축하며, 그 과정이 없으면 장치는 통치 장치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순수한 폭력 행사에 그치게 된다. 푸코는 어떻게 규율 사회에서 장치들이 실천과 담론의 계열, 지식과 실행의 계열을 통해 유순하지만 자유로운 신체 - '세속화 과정' 속에서 주체의 정체성과 자유를 받아들이는 - 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지 보여주었다. 따라서 장치는 무엇보다 주체화들을 생산하는 기계이며, 이를 통해 장치는 또한 통치 기계인 것이다. 고백의 예는 특히 명확한 것으로 드러난다. 서구 주체성의 형성, 분할되었지만, 동시에 그 주체성에 대한 능숙하고, 확실한 형성은 고해 성사 장치의 수 백 년에 걸친 작용과 분리할 수 없다. 그 장치에서 새로운 자아는 이전의 자아의 부정과 회복을 통해 구성된다. 고해 성사 장치에 의해 작동되는 주체의 분열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원죄인으로서의 자아라는 비진리 속에서 그것의 진리를 찾아내는 새로운 주체를 생산한 것이다. 감옥 장치에 대해서도 유사한 고찰들을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감옥 장치는 다소 예기치 못한 결과로서 범죄 주체와 범죄 환경을 구성했고, 이것들은 이번에는 다시 완전히 계산된, 새로운 통치 기술의 주체가 된다.
현 자본주의 단계에서 우리가 다뤄야 하는 장치들을 정의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더 이상 장치들은 주체의 생산이 아니라, 우리가 탈주체화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을 통해 작용한다. 탈주체화의 순간은 물론 모든 주체화 과정에 포함되어 있고, 고해성사하는 자아는 우리가 본 것처럼,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만 실제로 구성되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주체화 과정과 탈주체화 과정은 상호 무차별적으로 되는 것 같고, 비전형적 증상의(잠재적) 형태, 즉 유령적 형태 하에서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주체의 재구성에 더 이상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주체의 비-진리 속에서는, 더 이상 어떤 경우에도 주체의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 '핸드폰' 장치에 붙들리도록 본인을 놔두는 자는, 그를 그 장치로 떠민 욕망의 강도가 어떻든 간에, 새로운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그저 전화 번호 하나를 획득할 뿐이다. 그것을 수단으로 그는 경우에 따라서 통제될 수 있다. 텔레비전 앞에서 저녁을 보내는 관객은 자신의 탈주체화의 대가로서 욕구불만으로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는 자의 가면을 받거나, 시청률에 포함될 뿐이다.
이 때문에 기술에 대해 좋은 의도들로 채워진 담론들은 공허한 것이다. 그러한 담론들에 따르면, 장치들의 문제는 장치들의 좋은 사용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 담론들은 다음의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한데, 만일 하나의 주체화 과정(그리고, 우리가 언급한 사례에서 하나의 탈주체화 과정)이 각각의 장치에 상응한다면, 장치의 주체가 '올바른 방식으로' 그 장치를 사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런 담론의 지지자들은 흔히 그들이 사로 잡혀 있는 미디어 장치의 결과물일 뿐이다.
10. 현대 사회는 이처럼 거대한 탈주체화 과정 - 어떤 실재적인 주체화도 그것에 응답하지 못한다 - 에 의해 관통되는 무기력한 신체처럼 나타난다. 그로부터 실재적인 주체와 정체성(노동자 운동, 부르주아지 등)을 전제하던 정치가 쇠퇴하고, 그 자신의 재생산 이외에는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 순수한 통치 활동인 경제가 승리한다. 이리하여 오늘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권력을 경영하는 우파와 좌파는, 그들을 지칭하는 그 용어들이 유래했던 정치적 맥락과는 거의 무관하게 되어버렸다. 우파와 좌파는 단순히 동일한 통치 기계의 두 축(한 축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탈주체화를 지향하고, 또 한 축은 그 탈주체화를 민주주의의 좋은 시민이라는 위선적 가면으로 뒤덮으려 하고 있다)의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특히 권력은 그것이 인류 역사상 결코 출현한 적 없는 가장 온순하고 가장 복종된 사회체와 마주하게 된 순간에, 기묘한 걱정을 하게 된다. 후기산업사회 민주주의의 위험하지 않은 시민(사람들이 효과적으로 불렀던 것처럼 블룸bloom), 그에게 하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열심히 수행하는 시민, 가장 일상적인 그의 몸짓들 - 가령 그의 건강, 자신의 활동으로서의 도피 가능성, 자신의 욕망으로서의 영양섭취 - 이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장치들에 의해 명령받고, 통제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시민, 이 시민이 따라서(그리고 아마도 정확히 위의 이유 때문에) 마치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되는 것은 단지 외견상의 역설에 불과하다. 유럽의 규범들은 모든 시민들에게, 19세기에 재범자들을 식별하기 위해 발명되었던 인체 감식 기술들(디지털 지문에서부터 인상 기록 사진에 이르기까지)을 발전시키고 완전하게 만드는 생체 인식 장치들을 부과하고 있다. 감시 카메라는 우리의 씨떼의 공적 공간들을 거대한 감옥 내부로 변환시킨다. 당국이 보기에 (아마 옳을 텐데) 일반인보다 더 테러리스트와 비슷한 것은 없다.
장치들이 우리의 삶의 각 부문에 그것들의 권력을 확산되게 놔두고, 또 흩뿌려질수록, 통치는 유순하게 그것에 복종하기 보다는 그것의 포획으로부터 벗어나는 듯이 보이는 파악 불가능한 요소와 더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이 파악 불가능한 요소가 그 자체로 혁명적 요소를 대표한다는 뜻이 아니다. 또 그것이 통치 기계를 멈추거나 혹은 단순히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쉼 없이 예고하는 역사의 종말 대신, 우리는 오히려 공짜로 통치 기계 - 일종의 신학적 오이코노미아의 그럴듯하지 않은 패러디 속에서, 세계에 대한 섭리적 통치의 유산을 떠안았던 - 의 대규모 곡예를 구경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계를 구하는 대신, 그 유산은 섭리가 원래 가지고 있는 종말론적 사명에 충실한 채 머물 것이며, 그 기계를 파국으로 이끌 것이다.
장치들을 세속화하는 문제(즉, 장치들 속에 포획되고 분리되었던 것을 공통적 사용에 반환하는 문제)는 그 어느 것보다 시급하다. 장치를 탈취한 자들이 주체화 과정이나 장치에 개입하여, 모든 정치의 시작점인 동시에 탈주 지점인 이 통치 불가능한 것을 빛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한, 이 세속화 문제는 결코 올바르게 제기될 수 없을 것이다. (양창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