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과 귀족의 백제어
이원희 지음 / 주류성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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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백제인이 지배한 고대의 왜국

천황과 귀족들이 쓰던 백제의 언어


아는 사람이야 다 아는 사실이지만 고대 한국인은 일본열도에 선진문화를 전파했고 숱한 한국인(조상)들이 섬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문명을 꽃피웠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부턴가 일본측에서 이런 팩트를 죽자하고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정하다못해 아예 완전히 거꾸로 뒤바꾸는 거짓을 일삼고 있는데 이에 대해 대놓고 분개하지야 못한다해도 그저 남의 집 불구경하듯하거나 혹은 일본의 장단에 맞추는 '한국'사람들은 대체 일본인인가 아니면 중국인인가 그도 아니면 제 3국 다른나라 민족인가?


일본역사에서 신석기 죠몬시대와 청동기 야요이시대 사람들은 같지가 않다. 야요이인들부터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고 이후 가야인들이 집단으로 구주(규슈)로 넘어갔으며(구주에서 혼슈로 이동이 확대되고 여기저기 소국으로 산재했던듯하다), 이후에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일본, 그러니 당시만 해도 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 섬나라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컸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백제가 왜와 가장 친근하여 이무렵 왜는 백제의 속국과 비슷하거나 최소한 분국 정도의 위치가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물론 그 시대상황이야 대륙에 이은 한반도 정세가 복잡한 마당에 동쪽 끄트머리 섬나라의 사정또한 무엇이 단일단순하였겠는가마는 토착왜인은 물론이요 기존의 가야에 더하여 백제계에 고구려계에 신라계에..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백제는 멸망하니 백제유민이 마지막으로 왜에 건너가면서 이후부터 왜국 일본은 심정적으로 이미 한(韓)과는 등을 돌린 듯하다.

그렇다한들 왜국에서는 왕과 귀족을 비롯한 지배층이 거의 韓민족 출신인 판이라 더구나 가장 세가 강성하였을 백제의 언어가 지배계층의 언어였겠음은 더욱 불문가지라 이에 두말하여 무엇할까. 그러나 이는 거의 2천년을 거슬러올라가는 까마득한 이야기. 200년도 아니고 세월이 천년을 훌쩍 넘었거늘 언어만이 그대로 제자리걸음하고있을 리는 만무하니 한국어의 변천도 심하지마는 일본어도 마찬가지라 그저 희미하게 남아있는 흔적을 더듬어 이리저리 연구하고 증거로 대어보는 일은 역사학자도 거리낄법한 고난하고 고달픈 작업인데 이걸 손수 독학하다시피 연구해온 분이 계시니 내가 다 고마울 지경이다.

<일본 천황과 귀족의 백제어>의 저자는 뜻밖에도 법학 전공으로 검사 변호사를 지낸 법률가인데 일전에도 우리 고대사에 관련한 서적을 낸 분이 법조인이어서 조금 어리둥절 놀랐던 기억이 있지만 법이 전공인만큼 저자의 주장이나 설명도 한층 논리적일거라는 기대감이 더 커진다. 

책의 차례는 전부 4부다.


제1부 일본열도의 백제어 

제1장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백제어

1. 신대기 상(神代紀 上) 

2. 신대기 하(神代紀 下) 

3. 초대 왜왕 신무(神武) 

4. 여러 왜왕(倭王)들

제2장 풍토기의 백제어

제3장 만엽집의 백제어

1. 만엽집

2. 천황(天皇)의 노래에 나오는 백제어

3. 침사(枕詞)와 백제어

4. 만엽집의 명사

5. 만엽집의 동사

6. 만엽집의 형용사와 부사 

7. 만엽집의 조사, 접미사, 접두사 

제2부 통치, 행정, 귀족에 관한 백제어

제3부 백제의 왜국 지배

1. 내관가(內官家)

2. 대관대사(大官大寺) 

3. 천손족(天孫族)

4. 쿠다라와 대화삼산(大和三山) 

5. 백제의 담로인 왜국

6. 왜왕 무(武)의 상표문

7. 철검에 새겨진 왁가다기로

8. 에타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의 철검

9. 칠지도 

10. 인물화상

11. 삼종신기

12. 무령왕-섬의 대왕

13. 백제 구원군의 최고지휘관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14. 부여풍(夫餘豊)은 인질인가?

15. 백제 왕자 새상(塞上)과 교기(翹岐)

16. 제명의 죽음과 부여풍의 백제 귀환

17. 왜국의 백제 신하들

18. 왜국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의 개성(改姓) 

19. 왜(倭)라는 국호

제4부 백제에서 건너간 여러 가지 말


당시를 기록한 가장 인정받는 역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도 그렇고 혹은 풍토기나 만엽집에도 백제어의 흔적은 만연하다지만 내가 국어학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언어에 관심있는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일본어는 히라가나도 모르는 처지라 일본어와 한국어를 비교하여 설명하였어도 슬프지만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는데 그래도 가끔씩 눈이 번쩍 띄이는 단어가 간혹 보인다.

일본신화에 유명한 이자나기(남신), 이자나미(여신)말인데 여기서 접미사라고 할 '나기'와 '나미'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페이지 36쪽을 보자.


i- za- na- ki  [일본서기, 고사기] 남신

i- za- na- mi [일본서기, 고사기] 여신

ka- mu- na- gi  巫覡 무격 [일본서기] 무당

서울내기 [한국어] 서울사람

내미 [한국어] 딸


이 책에서 저자는 '서울내기', '딸내미'만을 예로 들고 있는데 실은 내가 알기로는 '내기'를 '나기' 즉 예를 들면 '서울나기' '보통나기'라고도한다. "저 사람은 보통나기가 아니야"라거나 "그이는 서울나기여서.." 이런 식의 인용대화를 어릴때 책에서도 봤었다. 더구나 아들내미 딸내미라는 단어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고 엊그제도 "딸내미 귀엽네요" 어쩌고하는 댓글을 인터넷 카페에 달기까지했으니 그렇다면 내가 쓰는 단어도 그옛날 천몇백년전의 한국인 조상이나 일본인이 쓰던 말이었다는 거다. 이것참 신기하기도하고 약간은 오싹하기도한 기분이다.


일본어에 감탄사로 '아나'라는말도 있다. 페이지 38~9쪽.

a- na- ni- ye- ya [일본서기] 감탄사

a- na- ni- ya- si [고사기] 감탄사

아나 [한국어] 감탄사


여기서 a-na가 감탄사의 뿌리인데 고대 일본어의 감탄사인 a-na가 한국어에도 있어서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감탄사로 상대를 비웃거나 조롱할 때 쓰인다고한다. 

아하하..이 '아나'라는 말도 내가 어릴 때와 젊을 때 가끔 썼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 뭐라 나와있는지몰라도 내가 태어나 살고있는 지방에서는 '아나'가 그런 의미의 감탄사는 아니다. 별 뜻은 없는데 이걸 영어로 하자면 'Now'라고 할까? 이 책에는 '아나, 여기 있다'라는 예문을 들고있는데 바로 딱 그런 뜻이다. 나도 그런 말을 쓰는데 저자가 똑같은 예를 들어놨으니 참 신기하다. '아나'는 상대가 나와 대등한 관계거나 혹은 아랫사람일 경우(그것도 친근한 경우)에만 쓴다. 친구나 동생, 후배에게 사용가능하지 어른에게는 절대 쓸 수 없는 감탄사다. 


sa- na [고사기] 수력남신(手力男神)이 사는 곳

사나 [충북, 경상방언] 사나이

p.92페이지의 sa- na를 저자는 남자를 뜻하는 사나이라고 보고있는데, 이 '사나'라는 말 역시 나도 어릴때 "사나(남자)가 그것도 못하나?" 혹은 "사나(남자)가 돼가지고..쯧쯧"하며 핀잔주는 말을 옆에서 여러번 들어봤다. 


그 외에도 일본어로 田(밭 전)을 ta로 발음하는데 이는 한국어로 '', 즉 중세한국어로는 땅을 뜻한다.

그리고 '~'는 뭔가? '데'는 우리말로 '~하는 곳, 또는 ~하는 장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본 만엽집에도 de(데)가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방언도 비슷한 예가 많은데 (p.252)

~ke- ni [시마네, 돗토리, 오카야마, 시고쿠 방언] ~니까(이유)

~까네 [경상방언] ~니까(이유)


경상도 사람이라면 "~하니까네(~하니까)" 라거나 "그라니까네(그러니까)" 뭐 이런말 쓰거나 혹은 들어봤을거다. 언어의 비교에서는 토착방언도 매우 중요한데 토착방언일수록 그 언어의 역사가 깊고 쓰임새와 사용이 오래되었기때문이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겠지만, 우리말로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테야"(ex.~할 테야, ~갈 테야)가 만엽집에 te-ya로 나와있고, '~하나니, ~노나니'같은 어미가 만엽집에도 no- ni, na-ni 등으로 그대로 적혀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막상 일본인, 그것도 교수나 학자라는 사람들이 '~테야'나 '~나니'같은 접미사에 대해서는 '알 수없다'거나 '미상'이라고 주장해버리니, 이것은 일본 고대어가 한국어에 뿌리를 두고있음에도 그런 명확한 현실에 부러 귀막고 눈막고있는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랴. 덕분에 일본인들에게는 만엽집이 분명 자기네 조상이 썼는데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알 수없는 글이 되고 말았으니 이거 참 그들을 위해 웃어줘야하는건지 아니면 울어줘야하는건지.


일본이 조금만 한국어에 접근해서 비교연구해본다면 만엽집의 그 난해한 언어학적 비밀(?)은 쉽게 풀릴 거라는 이야기는 예전에 이영희도 [노래하는 역사]에서 말한 바 있지만, 이 <노래하는 역사>는 상당히 대중적이고 재미도 있는 책이어서 이 방면에 관심있는 사람이 읽어보면 좋겠다.


일본이 한국어와 고대 일본어의 관련성을 억지로 무시하고 있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왜곡하거나 소설도 아닌데 아예 창작까지 해버린 탓에 일본인 본인들에게도 더욱 피해가 커지게 된 부분이 바로 역사,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정점에 위치한 것이 고대사 분야다. 

<일본천황과 귀족의 백제어>는 특히 백제와 관련해서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고대사의 허구성을 언어의 표기와 의미를 통해 고찰하고 드러내보인다. 일본고대사에서 특히 일본인 그네들이 자랑해마지않는 신공황후가 가공의 인물인거야 유명하지마는 안타깝게도 일본의 옛역사는 당대 혹은 후대인의 왜곡과 가필로 범벅이 되어있다시피하고 우리네 고대사도 명확하게 남아있는 자료가 극히 드물기에 역사적 쟁점을 명확히하고 일본측이 내세우는 거짓된 사료나 주장을 바로잡으려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가서 그 시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지만 비로소 그네들이 승복하고 인정하게되는 걸까.


내 어릴때 교과서에는 분명히 칠지도는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하였고 또 그리 배웠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이 '하사'가 슬그머니 "선사"로 바뀌었다. 아니 그럴거없이 그냥 '갖다 바쳤다'고 하지 왜? 

칠지도가 어찌하여 선사가 아니라 왜왕에게 내린 하사품인가는 이 책의 저자도 칼에 새겨진 명문과 그 의미를 풀어 해석해놓고 있으나, 도통 강단사학이나 학계의 주류는 외눈 하나 깜짝않으니 그들이 실은 일본인의 후예인 것인지 아니면 친일파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식민사관에 찌들어 등돌리고 하품만 하고있는 것인지?

묻혔거나 왜곡되었거나 때로는 픽션 창작으로까지 전락해버린 역사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듬어 밝히려는 노력이 어째 내눈에는 재야인(재야학자)들에게서만 보이는지 모르겠다.

개인도 마찬가지겠으나 민족의 역사 또한 오로지 영광만이 오롯이 존재할 수는 없다. 당연히 오욕의 시간도 견뎌내야했고, 잘나가는 시절이 있었다면 주저앉아 도광양회하거나 혹은 비굴하게 매달리는 시절도 있었으리라. 때로는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싶은 사건이나 시대도 있지만 또 때로는 후회나 수치로 점철되어 외면하고 눈감아버리고싶은 시기도 존재함은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인들 다를 것인가.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안타까운 것은 왜곡된 역사에 눈감아버린 식민사학자들의 뜻을 받들어 그 식민사관으로 인식이 총총히 무장될 또는 무장되고있는 미래세대 혹은 작금의 젊은 청년들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었나. 나는 거기에 약간 더 첨언해서 덧붙이고싶다. 제대로 된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제대로 된 미래가 올 리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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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순례하다 - 건축을 넘어 문화와 도시를 잇는 창문 이야기
도쿄공업대 쓰카모토 요시하루 연구실 지음, 이정환 옮김, 이경훈 감수 / 푸른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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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탄성이 절로 나올만큼 아름다운 표지가 시선을 끈다.

표지부터가 예술이고 마치 그림엽서에나 나올법한 풍광이 오롯이 담겨있는 <창을 순례하다>는 건축물에서 특히 창문에만 주목하고 주력한 책이다.

건축을 넘어 문화와 도시를 잇는 창문 이야기. window scape, window behaviorology라는 단어가 책의 내용을 포괄하여 대표하고 '핀란드의 국민건축가 알바 알토가 설계한 시청사에서 현대 건축이론의 선구자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어머니의 집까지 도쿄공업대 교수가 세계 28개국에서 발견한 창문의 가치'가 한권의 책으로 묶여나왔다.

저자가 일본인이니 꼼꼼함과 세심함을 답보했으리라는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세계 전세계 28개국 76개 도시를 3년간 여행하며 139개의 창문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했다는 말에서 벌써부터 저자의 공력과 노고를 짐작해볼 수 있겠는데 좋은 책이라면 으례 그렇듯이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창문에 대해 별로 인식을 하지는 못하고 살았던 거같다. 나로서는 창문을 막연히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한 것, 바깥을 내다보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여겼던 것같다. 물론 사람은 창문이 없는 방이나 건물에서는 살지를 못한다. 옛날 원시인이었다면 동굴에서 살았겠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도 동굴은 비바람을 피하거나 아니면 주로 잠을 자기위한 장소였지 하루의 대부분을 동굴에서 지내지는 못했을 것이고 현대인이라면 당연히 창문 하나없는 건물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창문도 아트구나 예술이구나 감탄스러웠다. 우선 카테고리 분류부터가 예술스럽다. Light and Wind, Besides People, Symphonic Poem. 특히 심포닉 포엠은 나같은 인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할 제목이다.

Sculpting Windows, Windows in the Breeze, Windows in the Shadow, Windows in the Garden, Threshold Windows, 스레스홀드 윈도우는 생각도 못했고..아아..창문의 용도가 그렇게도 사용되는구나. Workaholic Windows, Sleeping Windows, Seating Windows, Observing Windows, 참 다양한데 Aligning Windows, Layering Windows, Within Windows..이런 것들은 건축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더욱 그 예술성이 두드러지겠지만 문외한 일반인이라고 전혀 느끼지 못할 바도 아니다.

건물에서 창문이 그저 기능면에서만 작용한 것도 아니었고 또 특정지역의 특정한 사회에서는 건축못지않게 창문도 어떤 의미를 띠고 있으며 어떤 사회문화적 토양위에서 그런모습을 형성하게되었는지를 이해하거나 감상할 수가 있다.

창을 순례한 지역도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로 그 범위가 세계적이지만 건축물도 궁전이나 유명한 명소(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이나 중국의 유원같은), 세계문화유산, 관광지(롱샴 대성당), 도서관이나 학교(바우하우스, 성 엘리야 유치원), 전통주택, 일반주택, 상업건물(호텔, 바, 카페, 음식점, 상점) 등으로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한옥이나 떡볶이가게도 나온다.

<창을 순례하다>책을 펼쳐보면 왼쪽 페이지에는 실측도 비슷한 도판과 짧은 설명이, 오른쪽 페이지에는 창문의 칼라사진이 실려있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건축용어를 최소화해서 비전공자도 창문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하려고 그렇게 했다고 되어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건축에 완전히 깜깜 무지한) 나로서도 오히려 건축학적 설명이 좀더 덧붙여졌으면 어떨까싶을 정도로 최소한으로 설명이 제한되어있어서 설명보다는 사진으로 그러니까 독자가 시각적으로 개인적으로 감상하거나 느끼는 부분의 몫이 훨씬 더 크도록 구성되어있다. 물론 그것도 좋다. 사진을 한장한장 넘겨보면서 정말이지 창을 테마로 한 세계여행을 하고온 기분이 드니까. 특히 인도건축에서 그처럼 섬세한 문양의 창문이 존재할 줄은. 어찌보면 인도문화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건물 바깥에서 쳐다보는 창과 건물 내부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창. 이러한 창문의 이중적 기능과, 안과 밖의 경계를 짓고 가로지르는 창문의 기능과 예술성에 대해 그리고 창문을 통해보는 사회와 문화적 가치에 대해,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살아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창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창문. 이제는 그 누가 무어라해도 당당히 말할 수 있겠다. '근대건축에서 낮게 평가되어온' 창문이 오히려 건물을 구성하는 건축의 에스프리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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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글쓰기공식
임정섭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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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 유난히 화려세련섬세만연체를 사랑하기에 그거이 아니라면 전아함 혹은 고아함의 향취라도 한줄일랑 풍기거나 그도 아니겠거든 잘 뛰고있는 타인의 심장을 쿵 소리날 정도로 내려앉게 만들거나. 행여 그렇지 못하거나 혹여 그도 못할 바에야 아예 칼을 아니 펜을 뽑아들지말거나.

간결소박단순짤막식상을 도통 질색하는 머리에다 때마침 유행에(것두 유효기간 한참지났을 외국물에) 발맞추기라도하듯 글쓰기가 기술입네 훈련입네 공식입네하는 별로 새로울것 없는 주장까지 한껏 질리는 터라 어어,,글쓰기가 스킬이었어? 아트가 아니라? 이런 시니컬이 다분한 퀘스천마크까지 대동하던 찰나에 문득 옛날옛적 듣보잡(...미안하다;;) 신문기자였던 그녀가 생각나는거다. 어머나 신문기사를 어떻게 쓰니? 그런거 써내려면 엄청 어렵고 힘들거같은데하는 수선반 걱정반 물음에 그녀는 그거 다 쓰는 방법이 있어..

...그랬다... 오오..그 방법이 바로 공식이고 훈련이고 스킬이었던거다.

물론 글쓰기에는 그런 공식과 훈련과 스킬만 보유하고있으면 모든 문제가 100% 껌으로 해결되는건 아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두고두고 몇백년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불후의 명작을 집필하는 거이 아니라면 글을 쓸 때 최소한의 그런 공식과 훈련과 스킬을 베이스로 깔고있어야한다. 왜 그걸 여태 몰랐지?..-_-

심플(임정섭 저/다산초당)의 책날개 왼쪽에는 모든 책이 다 그렇듯이 저자의 약력과 소개가 나와있다. 자랑하듯 어마화려한 경력에 웃는 얼굴이 인상도 좋구나..그러나 남자의 미소에 넘어가면 안된다. 본문을 봐라 본문을..-_-;;

프롤로그 첫장을 펼쳐보니 이런 공식이 대뜸 눈을 사로잡는다.

- 글쓰기 기술 = 화가의 눈 + 소설가의 눈 + 과학자의 눈

...첫판부터 죽이는고나..한가지 눈(eye)도 갖추기 힘든데 무려 3가지씩이나 요구하네..;;

궁시랑거리며 페이지를 재빨리 턴해본다.

- 프로만 아는 글쓰기 기술, 프로를 만드는 글쓰기 습관...

프로가 아닐수록 이런 말에 혹하기 쉬운데 이 책, 의외다.

글쓰기에 대한 책이니 얼마나 지루할까 이런 책은 소설가 지망생이나 들여다보겠지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진다.

물론 소주제는 별 재미가 없는 일종의 많이 들어본 말이다.

- (프로는) 평범함에 가치를 부여한다. 디테일에 강하다. 처음과 끝에서 승부한다.

- 언제 어디서나 메모하라, 나만의 글쓰기 창고를 마련하라, 고정시리즈를 연재하라, 명문을 체화하라, 퇴고-지우개와 싸움하라

그런데 여기에 많은 예문을 제시하면서 설명해주니까 재미있고 머리에 잘 들어온다. 글쓰기의 기본 훈련인 묘사하기,설명하기, 요약하기, 줄거리쓰기. 거기서 더 나아가 확장되는 단락법, 열거법, 비교법, 질문법.

아아..그렇다. 글쓰기도 결국엔 연출이었던거다.

-팩트는 임팩트있게. 읽고싶게 만들어라.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배치하라. 복병이 되어 허를 찔러라. 키워드를 활용하라. 성찰하고 곱씹게 만들어라. 민들레 홀씨 하나를 살포시 날려라..

물론 말이야 쉽지 이론과 실전은 그 필드가 매우매우 다른 영역이다. 하지만 이론도 모르고 실전에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피만 쏟고 물러날 수는 없잖은가. 글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차원이 좀 다른 문제인데 글쓰기에서는 일단 공식을 아는 것이 이론이고 훈련이 실전연습인거다.

연극으로 치자면 여태 계속 글을 읽는 독자는 관객의 입장이지만 글을 쓰려면 감독이나 배우의 입장에서 연극을 보고 작동원리를 알아야한다는게 저자님의 주옥같은 말씀이다. 물론 관객의 입장에만 머무르는 것이 나쁘지는않지만 글을 쓰겠다 마음먹었다면 감독의 눈으로 바라봐야하고 실제 제작해봐야(=글을 써봐야)한다. 

글쓰기 공식에 대한 이론서인 <심플>에서 어떤 금과옥조를 캐낼건지 혹여 그럴수 있을지도 실제 읽어보고 직접 해보시라는 것이 다만 소생이 할수있는 입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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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정치 기술
박찬영 지음 / 리베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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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화정>이 뭔가싶었다. 

얼핏 사람이름인가했는데 아하하..조선시대 선조의 유일한 적녀인 정명공주 이야기다. 

아니..정확히 말하자면 17세기 조선의 모습을 광해군의 이복누이인 정명공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엮었다고하는 그 시대 정권다툼의 혼란상 이야기다.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폐위당한 2명의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 연산이 폭군이라는 점에는 별 이의가 없겠으나 광해군에 대해서는 오늘날 현재도 학계에서 여전히 설왕설래 말이 많은데 그게 다 조선시대 당쟁이 지금까지도 그 맥이 완전히 끊기지가 않았다는 증거다. 따지고보면 참 무섭기도하다만. 

오늘날 학계는 조선시대 후반 서인 노론의 집권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학자들이 상당수 아니..어쩌면 99%일까..여튼 그런 인물들이 대부분 포진하고있기때문에 당연히 이들은 죽자하고 광해군을 물고 늘어진다. 광해군은 어디까지나 무능하고 혼미한 암군이었고 그 유명한 폐모살제..그러니까 계모 인목대비를 정식왕비자리에서 내쫓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폐모살제를 저지른 참으로 비인륜적 임금이었으니 서인들이 머리를 모아 맞대어 반란을 일으킨 인조반정이야말로 정당한 거사였으며 한마디로 말해서 서인집권과 노론일당독재시기는 조선이 찬란하게 빛나는 살기좋은 시절이었다는 거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이 학자 및 교수님들은 인조 이후 몇대를 거슬러 내려와서 노론과 척을 지고 대립했던 사도세자와 정조마저 열씸으로 공격해댄다. 사도세자와 정조는 지금도 외롭구나. 강단사학자들이 그리도 못잡아먹어 안달이니. 

뭐 거야 어쨌거나...여튼 <화정>은 조선시대로는 드물게 83세까지 장수했던 정명공주를 주인공(?)으로 삼고있는데 아쉽게도 그녀에 대한 기록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관련해봐야 계축일기에서 약간, 실록에서 몇 줄 언급되는 정도인데 어차피 정명공주 아니라도 특별히 스캔들을 일으킨 인물이라면 모를까 별 잡음없이 살다간 여인에 대한 기록이 풍부할 리가 없고 오히려 그렇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래서 이 책도 대부분은 선조-광해군-인조 시기의 정치상황과 사건에 대해 서술하면서 부분적으로 정명공주를 언급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보자. 책 제목인 '화정'은 정명공주가 쓴 서예글씨에서 나왔다. 華와 政인데 이 글씨를 구경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도 전에 봤는데 나야 서예도 서법도 모르지만 암튼 그 글씨가 아주 크고 힘이 있어서 여성이 쓴 것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화정>은 이 글씨를 포인트로 해서 정명공주가 추구했다고 하는 '빛나는 다스림'과 그 속의 자기수양과 애민정신을 강조하고 돌아본다.

정명공주는 그 일생을 간단히 소개하면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출생하여 사랑받은 공주였지만 부왕이 죽고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동생 영창대군을 비명에 잃었고 이후는 모친 인목대비와 서궁에 유폐되어 간난을 겪다가 인조반정으로 부귀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인목대비가 승하한 후에는 인조의 의심을 사서 한동안 어려움을 겪기도했다. 다행히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별 탈없이 왕실의 족친 어른으로서 무난하게 장수와 부귀를 누리며 살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정명공주가 말년에 막내아들에게 내렸다는 유훈이라할까 처세훈이라할까 그런 글귀를 한번 보자.


내가 원하건대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입에 올리고 정치와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나는 가장 싫어한다. 내 자손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경박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가부장적 남계 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어차피 권력과는 거리가 먼 여자의 몸이기는하지만 이 글귀를 볼 때 그녀의 삶도 결코 쉽지만은 아니했던 아니 어떤 면에서는 살얼음을 딛는 것같기도했던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표면적이건 어쨌건 암튼 정명공주를 주인공으로하고있기에 정치적인 면에서 <화정>은 광해군에 대해 야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선조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후한 평가를 하고있다. 그러나 그런 편파적 견해도 인조에 대한 평가에 이르면 어느 정도 균형을 잡고있는 것같기는하다. 

바람잘 날 없던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정명공주는 자신을 조용히 묵묵히 다스렸고 병자호란때에는 재물보다 백성의 목숨을 중히 여겨 피란민을 대피시켰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와같은 겸손함과 공순과 후덕함이 공주의 삶을 결국 안온과 평화로 이끌었을까.

서문에서 인간은 원초적으로 갈등관계이며 세상사도 따라서 갈등 그 자체. 그러니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공생코드인 관용, 친절, 배려로 서로 함께 공생할 수 있는 지혜를 찾자는 저자의 주장은 되새겨봄직한 一言이다. 세상에 선과 악의 싸움은 오히려 드물고 그보다는 선과 선의 싸움이 태반이라. 붕당에 찌든 조선도 선(善)이 선(善)을 죽이는 사회가 아니었느냐는 저자의 물음 역시 귓가를 울린다. 

화정이라는 화두, 빛나는 다스림...이는 현대에도 우리 사회에 변함없이 절실히 요망되는 사항이라 그 점 더욱 안타가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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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년사 메디치 WEA 총서 4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이런 책은 누가 볼까?

당연히 아무래도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볼 것이고 또 그런 독자라면 당연히 어느 정도 역사적 지식의 기초는 갖추고 있을 터이니 기초수준을 넘어서는 심화단계로 가는 길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겠고 이를 반기지 않을 리도 만무하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김시덕 저, 메디치미디어)는 16세기 조선땅에서 벌어진 임진왜란과 그 이후 20세기 초의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500년史를 돌아본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할 점은 한,중,일..그러니까 우리가 으례 생각하는 조선, 중국(명/청), 일본(덕천막부/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제국)으로 이루어진 국제적(?) 동북아시아의 역사가 아니라는 거다.


저자가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하는 테제는 '한반도는 지정학적 요충지인가?'하는 물음이다. 대체 언제적부터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가 되었나?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 이전에도 그러했었나? 아쉽게도 임란 이전만해도 조선은 대륙과 섬나라(일본)을 같은 저울에 놓고 비교하지를 아니하였었고 마찬가지로 대륙 중원의 한족에게도 한반도는 그들이 생각하는 중원의 주변부일뿐 지정학적 요충지로 파악하지는 아니하였었다. 허나 그랬던 과거와는 달리 7년간 벌어진 임진왜란으로 인해 한반도를 대하는 지정학적 의미는 달라지게된다. 임진왜란은 말하자면 해양세력이 대륙으로 진출을 꾀한 시도였고 이에 대응하여 대륙세력은 대륙세력대로 한반도를 완충지대로 하여 해양세력을 막아냈던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이로써 한반도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한다.

두번째 테제는 소위 삼각구도라고 일컬을만한 삼국지적 관점에서 열국지적 관점으로의 전환이다. 우리의 시야는 도통 한, 중, 일 이 3국에서만 뱅뱅 돌 뿐 좀체 그 한계선을 벗어나지를 못한다. 임진왜란은 명과 조선이 연합하여 일본을 물리친 전쟁이기도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후금이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고 또 그로써 정성공의 대만이 수립되었다. 뿐인가 시베리아를 넘어 동진해온 러시아와 접촉하게 된 최초의 사건이 나선정벌이었으며 대항해시대 유럽과 연계된 노예무역은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을 남겼다.

세번째 테제는 현재 동북아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 미, 중, 일 이 3국의 구도에서 요즘 부상하고 있는 중국인가 아니면 20세기부터 우리나라 최대의 우방국인 미국의 영향권에 계속 포섭이 될 것인가하는 시각에서 탈피하여 우리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중간 요지에 위치한 반도라는 지정학적 장점을 활용하여 자립번영을 꾀할 것인지 그걸 한번 생각해보자는 거다.


이 3가지 테제를 전개해가는 과정에서 저자는 다양한 사료, 특히 아직까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자료를 제시하면서 저자 나름의 해석을 가미함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북돋우고 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장내는 오다 노부나가를 이탈리아의 체사레 보르지아와 비교하기도하고, 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정감록>의 정도령과 연결되는지 더듬어보기도하고, 한국의 표류민 문순득과 일본의 표류민에 대해 고찰하기도하고, 오호츠크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또하나의 열국지, 사할린은 누구의 땅이며 북해도에 세워졌던 에조공화국, 유구왕국의 멸망, 20세기 중국을 호령했던 대청제국의 멸망과 조선의 멸망, 일본의 대륙 진출, 만주국의 성립, 대동아 공영권, 인도의 독립운동과 조선의 독립운동 등을 차례차례 다시 짚어나간다.

이 소장학자의 시각, 관점, 주장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참고를 하든 무시를 하든 유념을 하든 그 어떤 향방이건 불문, 그건 이 책을 읽는 독자 개개인의 자유겠으나 삼국지적 세계관에서 탈피한 다각적 관점을 토대로 자립번영의 전략을 추구하자는 주장과 우리는 우리의 이웃하는 주변부를 얼마나 아우를수 있는지 그 포용력을 묻는 自問만큼은 서늘함이 깊은 叱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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