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걱정하지 않는다 책고래숲 9
강태운 지음 / 책고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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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다. 그저 혼자 있고 싶은 날, 스스로를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싶은 날, 나밖에 필요하지 않은 날, 홀로 고요히 나에게 집중하고 싶은 날, 다른 사람의 관심조차 거리두고 싶은 날..
잔잔한 음악과 집안일을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거나 시집을 골라 필사를 한다. 때로는 나를 위해 예쁜 꽃화분을 사오거나 책장에 꽂힌 책을 둘러보며 책냄새를 맡는다. 나를 사랑하고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시간 조차 온전히 내 것인 적이 있었나 싶은 시간들.

그래, 타인을 위한 삶은 충분히 살았다. 이제 남아있는 인생은 나를 위해 살아보자, 야심찬 포부를 가져본들 가보지 않은 길은 언제나 벅차고 쉽지 않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일까?

나는 사랑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 책을 쓴 저자 강태운의 첫 그림에세이 <나는 사랑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삼성전자에 재직하면서 숨가쁘게 살다가 "눈뜨고 숨쉬고 사는 건 맞는데, 내가 없다"는 근원적인 생각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회사와 아이에게 쉼없이 던져주던 비전들과 달리 나 자신에게 게을렀다는 생각 끝에 영국행 비행기를 타고 출장처럼 시작된 여행에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었다. 나 역시 아이를 대학보내놓고 갱년기와 맞물려 나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시작했고 블로그를 통해 정체성을 붙들려는 노력을 해 보고 있듯이 사는 동안 인생을 반추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 누구에게나 있다.

문학은 좋아하지만 세상 무지한 것이 그림이었다.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가도 관심이 없고, 아는 것이 없으니 그림을 보는 일이 즐거울 리 없다. 강태운 작가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 눈높이에 맞춰 화가와 배경설명과 함께 잔잔한 이야기를 풀어내 그림과 글의 몰입도가 물흐르듯 지나간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무지했던 그림을 보는 시선은 작가를 알고 그림을 보니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작업 속에서 나의 자화상을 조우하며 결국 나의 삶을 완성하는 것은 나 자신임을 알게 해 준다.
그림과 화가의 여행에 입문하고 싶은 분, 혹은 예술의 인문적 가치에서 그치지않고 실천의 예술적 가치에 관심있는 분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림은 말과 글보다 자기방어가 적기 때문에 내면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고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오히려 단순하다는 설명에 자신감을 얻었다. 책도 한번 읽어서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듯이, 시대를 알고 작가를 알면 그 깊이가 달라지듯이 화삼독(畵三讀)을 추천하고 있다.

그림은 세 번 읽어야 한다. 화삼독(畵三讀)이다. 그림을 읽고, 작가와 그 시대를 읽고, 마지막으로 나를 읽는다. p85

그림과 문학의 공통분모가 생기니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도 문학도 그림도 한 번 읽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그림과 작가와 시대를 알고 나를 읽으면 그림의 환대가 보인다. 그 초대장을 받고 나니 그림 보는 일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인생에 있어 기쁨이 찾아올 때보다 슬픔이 찾아올 때 진짜 내 사람을 알아볼 수 있고, 진정한 나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는 더 귀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인간의 삶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면, 구겨진 마음이나 슬픔과 기쁨과 내 삶의 가치를 감정으로 휘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글쓰는 작가처럼, 그림으로 작업하며 수없이 의미를 묻고 내면으로 견고하게 구축해 나가는 화가들의 고단스러운 작업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투사한 듯한 여인을 자주 그렸던 천경자 화가의 그림속 그 여인을 바라보면 누군가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무상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 p28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침묵의 위로가 강력하듯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침묵으로 말해주는 천경자 화가를 알게 되었다.

사람이 변하면 그림도 변한다. p38
고뇌하는 화가의 그림을 두고 기억할 그리움을 짓는 풍경이 보이는 듯하다. 얼마전 읽은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사람이 변하자 초상화가 변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일맥상통하는 점이 꽤 매력있는 그림에세이다. 문학과 그림, 작가의 내면이 어우려져 그림을 보는 것이 어렵던 이전에 비해 친밀감이 느껴진다.

에바 알머슨의 행복한 그림은 설명없어도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각자 생각하는 행복의 가치와 기준은 나름대로 다르겠지만 행복한 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미소가 흘러나오는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당신의 내면에는 꽃이 있고 당신은 그것을 압니다" _p46~47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화가에게 그리는 행위는 결국 자기 고백으로 귀결된다. 그렇기에 캔버스는 대상을 올리는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자신을 비추어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는 삶의 최전선이다" p58

지나온 삶의 궤적을 담아낸 그릇 중에서 가장 찾기 쉬운 모델은 어머니가 아닐까. 기꺼이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모델이 되어준 어머니의 초상화에서 마음이 요동치는 슬픔을 느꼈다. 얼굴에 주름하나 없는 곱디고운 모습의 어린시절 기억 속의 어머니를 지나 주름진 얼굴과 손등 그리고 굽은 허리를 그리면서 아낌없이 주기만 하던 어머니를 그리는 내내 눈물을 삼켰을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젊은 시절 뒤러는 어머니를 자주 그렸다. 화가에게 어머니는 가장 찾기 쉬운 모델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러는 오랜만에 어머니를 찾았다. 그런데 어머니의 모습이 예전과 달리 생경했다. 우리 나이로 환갑을 넘긴 어머니의 얼굴에 병색이 완연했다. 그림을 준비하는 뒤러의 마음이 급해졌다. 눈앞에 어머니는 왜곡의 껍데기를 벗은 후에야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뒤러는 그림을 그리는 내내 마음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삼킨 눈물로 자기 안에 잘못 새겨진 어머니의 색을 하나둘 지워 나갔다. p62

딱 한번이라도 진실하게 그려보고 싶다.
우리의 삶은 진실일까 가면일까, 늘 껍데기로 살아온 자신을 만난다면 진실한 나를 그림으로, 혹은 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어김없이 찾아온 새봄에 나는 사랑을 걱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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