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
정애리 지음 / 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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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좋아하는 겨울비가 내린다.
내 마음의 흔적들을 씻어내려는 듯이 말갛게 내린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슷비슷할진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면서
내리는 비에 닦이고 씻기는 따뜻한 사랑비였음 좋겠다.

삶과 글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향기가 풍기는 느낌마저 온화한 배우
아니, 배우가 아닌 작가 정애리를 만났다.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촉촉한 감성이 잘 맞아서 그런지 처음부터 시를 읽는 마음으로 함께 같은 호흡으로 행간을 누볐다.

매일, 시를 쓰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수고로움을 읽어내고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언어들이 마구 내 마음에 들어왔다. 실패와 아픔을 겪어내며 얻은 지혜들로 삶이 깊어진다는 것이 책을 읽는 동안 전해져왔다.

「옹이가 많은 나무 탁자가 왠지 안쓰럽습니다.
상처를 갖고 견디며 살아온 시간이 느껴져서일까요.
나무옹이는 죽은 가지의 조직 주위를
새로운 세포조직이 감싸면서 생긴다고 합니다.
나무는 이를 내치지 않고 한몸으로 같이 살아냅니다.

옹이를 가지고 있나요?
그대는
비바람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가진 멋진 사람입니다.」

내가 나무라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그런 삶을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다.
열매, 잎, 가지들을 아낌없이 주었던 나무처럼 나의 젊음을 나눠주느라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책의 가장 뒤에 나오는 그루터기를 제일 좋아했다.
세상을 살다가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온 사람에게 나눠 줄 것이 남아있지 않은 나무는, 마음이라도 쉬어가라고 작은 의자처럼 남은 밑둥까지 행복하게 내어주는 그루터기를 가슴 아프게 심었나보다.
비바람에 견디며 내 안엔 생기지 않아도 되는 쓴뿌리들로 뒤덮인 나무일지도 모르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기세등등하게 가시를 무기삼아 강한 척 하는 가시나무일지도 모르고,
상처를 갖고 혼자 안으로 견디다 보니 뒤틀린 모양의 옹이가 많은 나무일지도 모른다.

온실 속의 화초로 키워주신 부모님을 떠나면서 시작된 야생속 나무의 삶이지만 비바람을 맞고 견디면서 어쩌면 삶의 내성이 생긴 튼튼한 나무로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힘든 일이 와도 조금 덜 아프게 이겨내고 금방 훌훌 털어낼 수 있는 새 살이 돋아난 샘이다.

삶의 흉터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견디고 견딘 시간 동안 결이 다르고 뒤틀어지기도 했겠지만 다시 온전한 자리를 찾기 위해 많은 인내과 노력을 했음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아, 헛되게 살지는 않았구나...

여름동안 무성했던 가지들은
더 좋은 과실을 얻기 위해
또는 다른 가지들을 더 튼튼하게 하기 위해
때로는 더 멋진 모양을 갖추기 위해
농부들은 자신이 키우는 나무들을 가지치기한다.
가을 낙엽이 우수수 다 떨어져야만
새봄에 건강한 초록으로 만나지게 되듯이
우리 삶에는 잘라내고 떨어뜨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건강하고 단순하게 살기위해
마음도 덜어내고 비워내야 하는 것이다.

「연탄은행을 아시나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은행입니다.

3.65킬로그램
연탄의 무게입니다.
36.5도
건강한 우리의 체온과 같네요
또 나비가 날아오르는 온도 36.5도
그리고 날마다 살아가는 1년 365일
연탄을 나르다보면 온몸이 후끈해져
땀이 송골송골 맺히지요
물론 마음은 난로를 피워놓은 듯 데워집니다.」

외롭고 허기진 세상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고 몸으로 실천하는 정애리님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정리하며 살아가는 삶이 나의 모토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삶을 마무리할지 모르는데 갑자기 내가 사라지고 없을 때 내가 머물던 곳을 다른 사람이 둘러 보아도 단정하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았다.
필요없는 건 버리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사는 것이 조금은 불편해도 한번 정리하고 비우면서 심플한 나의 삶을 즐겼다.

한달 정도 블태기와 맞물린 나의 삶의 권태기로 모든 것이 귀찮아서 대충 살았나보다. 정신차리고 둘러본 집안에는 내 손이 덜가서 쌓인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돌아다닌다.
내 마음과 머릿속의 상태를 보는 것 같아 부끄럽고 창피해졌다. 갑자기 누가 들이닥쳐도 정리되고 단정하고 물건이 많지 않은 편안한 공간이길 바랐는데 잠시 늘어져있는 삶을 사는 동안 덕지덕지 많아지고 지저분해진 주변을 보며 제일 먼저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일상은 그렇게 돌아오는 중이다.
그러던 중에 읽은 책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욕심내고 너무 많은 것을 끼고 살고 있구나.
살면서 더 나누고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우산을 건넬 수 있는 사람으로 아직은 그렇게 살고 싶구나.
예전처럼 나는 없고 남이 우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 돌보고 챙기고 사랑하는 삶으로 살아야겠구나.
그렇게 비우고 나누며 자연에서 깨달아가는 하루 하루의 시간들은 채우지 않아도 충분히 스며드는 기적임을 끄덕이게 해주는 책이다.
더 많은 것을 담아내기 보다는 잘 비워내고 그 틈으로 바람도 불고 사람의 소리도 들어가면서 더욱 자유롭게 소통하는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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