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설레게 만드는 책이 있다. 내용까지 더 좋게 만들어주는 마법처럼 제목이 다하는 그런 책.모처럼 가을 감성에 어울리는 소설을 만났다. 아직 출판 전인 가제본이라서 표지는 단순했지만 시의 제목처럼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이 떠오르는 소설 제목에 덥석 읽게 되었다.「흡사 어린 아기라도 맡게 된 기분이 들었다. 나무와 식물을 좋아하는 것과 그것을 잘 키우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일인데.수진은 과습으로 떠나보낸 숱한 식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진은 이파리 가장자리의 가는 톱니들과 잔털을 손바닥으로 스치며 세세히 그 간질이는 감각을 느꼈다.p34」식물을 과습으로 숱하게 떠나보낸 공통점에 피식 웃음이 나온 대목이기도 하고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암시하는 듯한 낮은 한숨과 간질이는 감각을 느끼는 부분이 애틋하고 아련하게 다가왔다.「어느새 수진은 혁범을 존경하게 되었다. 존경심은 수진에게 드물게 찾아오는 감정이었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함과 일관성을 가진 그는 '혼자 어디에 갖다 놔도 법없이도 잘 살 사람'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누구도 진심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p.39」사랑하는 사람의 빈틈없는 구석에 홀로 외로워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서로에게 기대고 해줄 수 있는 사랑의 증표나, 사랑으로 전해지는 위로조차 기대할 수 없는 단단한 사람이라면 나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실감으로 오열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내심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무뚝뚝한 그가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할 때 사랑은 철저하게 외롭다.「집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게 아니라 직접 들어가서 살려고 짓는 거잖아.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편해야 해. 과시하기에만 좋고 실제로 사는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집은 의미가 없어. 그래서 자기 집을 짓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밖에 없고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열려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좋아 p.73」건축가로서의 깊은 관심과 상냥한 경청을 기울이는 세심함이 돋보이는 대목이자 혁범의 성향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집에 대한 명백한 가치관과 따스함에 비해 사랑 앞에서 불투명하고 진실한 표현이 부족해서 안타까웠다.<집>이라는 것이 내포하고 있는 것의 다양한 감정과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이 있고 따스한 온기와 온전한 쉼이 있어야 하는 곳이 집이다. 건물로서 덩그라니 잠만 자고 나오는 존재로서의 집에서는 이야기를 지어낼 마음의 공간이 없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폐가로 전락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충분히 쌓여가면서 의미를 부여해 간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는 노력을 하는 중이지 않을까. 마음의 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표현하고자 했을까.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수진정확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혁범그리고 솔직하고 직선적으로 사랑을 마구 표현하는 한솔수진의 선택은 사랑하는 사람곁을 지키는 것일까세심한 사랑을 받아 누리는 것일까나와 다른 그녀의 선택에 잠시 갸우뚱거리기도 했다.「엄마도 한때는 이별이 구원할 길 없는 결말이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알게 된 많은 것들은 항상 '이별'이 알려주었다고 생각해. 자신의 의지로 버릴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가야 할 때도 있고,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잃어버린 것들도 있지. 어쨌든 이제 그것들이 내 곁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그 무게나 선명함, 그리고 소중함을 보다 강렬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어. 살다보면 알게 돼.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바로 그 잃어버린 것들 덕분에 얻은 것이란 걸.p.136」특별함이 평범함으로 바뀌는 순간 사랑은 곧 일상이 된다. 아직은 나이듦이 낯설지만 아슬아슬한 사랑의 밀도있는 행위까지 아찔하게 표현되어 연애세포가 부끄러운 듯이 꿈틀거렸다.최선을 다해 진심을 보여줬던 사랑, 완벽한 모양을 한 그 사랑이라서 두려웠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런 사랑을 이어갈 만큼 용기가 없었던 수진의 모습이 내모습인 양 낯설지 않은 듯 다가온다.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을 이야기할 때 겁을 내고 도망가거나, 계산기를 두드리듯 머리를 굴리는 것이 아니라 겁없이 다가서고, 상처까지 온몸으로 떠안아 이해하고 주저함 없는 투명한 사랑이라고 말해주는 소설이다.어른들이라고 해서 사랑에 익숙해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아진다고 해서 경험치가 늘어가는 것도 아니다.지금 마주하는 인연과의 사랑은 언제나 처음이기에 첫사랑처럼 다가오면 좋겠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내기 힘들었지만 사랑만큼은 아무런 장치없이 투명해지길 바란다. 연민하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에 보답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끌어안아주는 마음 안에서 평온함을 느껴가는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삶을 만든다."가만히 부르는 이름" 하나조용히 불러 보는 이름 하나 있다는 것이 행복한 가을.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상처받는 사람이 더 많이 사랑했던 사람은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