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김비.박조건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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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보랏빛 바탕에
내가 좋아하는 우산까지 홀로그램으로 반짝이고 있는 매력적인 표지인데 마음 한켠 후미진 곳에서는 왠지 모르게 차분하게 가라앉는 감정이 흘렀다.

김비 소설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박조건형 드로잉 작가는 우울증으로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회복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에세이형식으로 담았다.

세상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오롯이 자기 편이 되어 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기쁨
자신보다 더 큰 손이 투박하지만 따스했던 기억
사랑은 그렇게 가뭇없이 작은 온기로 스며든다.

부부가 살면서 자기의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같은 날을 굳이 챙겨가며 호들갑을 떨고, 이벤트가 없이 지나가면 무능한 남편, 센스없는 부인이 되기 십상이다.
이들의 기념일은 조용하다. 일상을 소소하게 감사하며 챙겨주는 날이 많아서 기념일에 굳이 이벤트를 열지 않아도 평범함이 이벤트가 되는 시간이라는 말이.
굳이 이벤트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 꽤나 멋지게 들려온다.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고
그 표현은 일상적이어야 힘이 있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박조건형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 더 자연스러운 부부의 세계가 훨씬 이쁘고 이런 짝지를 만나 더없이 편안하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세상의 편견에 맞선 자신의 짝지를 위해
무조건 짝지 편이 되어준다는 든든한 남편.
그에겐 평생 따라다닌 우울증이 괴롭힌다.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할 우울증의 무게를 함께 하면서 벽하나를 두고 마음으로 끌어안는 부부의 모습이 이쁘고 뭉클하게 다가온다.

나이 50을 트로피라고 말하는 김비 작가는
자신의 본명 김병필을 불러대는 유일한 사람 남편에게 사랑스러운 여자이다.
어릴 때부터 아팠고 허약했는데 게다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성전환수술까지 하느라 고단한 몸은 얼마나 살아갈 날이 남았는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쟁같은 세상, 이기적인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우습게 들릴 수 있는 정글같은 사회에서
다시 한번 사랑을 믿게 하는 글들과
사랑할 용기를 아낌없이 퍼부어댄다.
연약한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약함을 숨기지 않고 회복해 나가는 일상이 아름다워서 반짝인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처럼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이 두려워 머뭇거리는 연인들에게 사랑의 힘을 믿게 해주는 아주 사소한 기록만으로 감동적이다.
작은 것에도 감격하고 감사하며
미안한 일에 정확하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면
서로에게 얼마나 위안이 될까.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을 하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면서 누릴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아프지말고 행복하자는 말에 담긴 사랑
그리고 서로의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날들이 많지만
이 사회가 던지는 질문에 언제나 대답을 해야하는 쪽은 자신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는 어른다움이 있다.

"여전히 나는 여기 이 세상의 언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살지만, 그럼에도 다행히 나답게 살고 있다.
언제나 답을 찾는 일은 내 몫이다. 이 사회가 나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나는 그 말들을 씹어 삼킨다. 어떤 말이든 꾸역꾸역 씹어 배 속에 밀어 넣는다"
-김비

김비의 글과 박조건형의 글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성소수자로서 살아가는 부인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부인이 더이상의 아픔과 무례함을 적게 겪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과 사랑이 그대로 묻어났다. 사랑하는 남편의 우울증을 바라보며 무던히도 애쓰는 그 마음을 끌어안고 귀한 삶으로 인정하고 포기하지 않고 올곧게 서 있는 모습으로서 그들은 서로에게 완전한 의미가 되어간다.

결핍이란 때때로 사람을 든든하게 묶어주고 단단하게 결속시켜주는 힘이 있다.
서로에게만 무장해제되는 것
진정 살아있는 사랑의 참모습이 보인다.
어떤 우산이 되든 양산이든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것,
그들이 말하는 자신만의 '짝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축복일까 싶어 내심 부러웠다.

적어도 둘만이 사는 세상 안에서 그들은 가장 행복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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