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네임 - 이름이 지워진 한 성폭력 생존자의 진술서 너머 이야기
샤넬 밀러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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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스탠퍼드 대학교 캠퍼스에서 밀러를 성폭행하다가 붙잡힌 브록 터너는 여러 면에서 완벽한 유죄였다. 목격자가 있었고, 터너는 도주했으며 현장에는 많은 증거가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완벽한 유죄의 피해자는 오히려 재판과정에서 마주한 상상을 초월하는 고립감과 수치심에 휩싸인다. 가해자는 유망한 수영선수라는 이유로 여론의 안타까움을 샀고 결국 6개월 선고에 감형을 받아 징역 3개월이 고작이다.

이렇게 묻힐 뻔한 이야기는 밀러가 2016년 재판에서 낭독한 가해자에게 쓴 편지 형식의 <에밀리 도의 피해자 의견 진술서>가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나흘동안 1100만명 이상이 읽었으며 전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의회에서는 낭독회가 열렸다. 마침내 이 진술서는 캘리포니아주의 법을 바꾸게 했고, 담당 판사의 파면을 이끌어냈다. 밀러에겐 성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놓을 용기를 얻었다는 편지가 쏟아졌다.

재판과정에서 어의없는, 사건과 추호의 관계도 없는 여성의 인권을 조롱하는 질문들이 오갔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가해자는 수영을 잘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는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 오랜 시간 이름을 잃고 침묵하던 밀러는 진술서에 당당한 목소리로 속시원하게 퍼붓는다.

"나는 요리를 잘합니다. 그것도 기사에 넣으세요"

신원 보호를 위해 4년간 '에밀리 도'로 살았던 밀러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이름을 드러낸다.
이 책은 성폭력 범죄가 일어났을 때 가해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문화를 조명하고 피해자가 좌절할 수 밖에 없도록 설계된 사범 시스템을 고발한다.

누군가는 싸울 때 맞닥뜨리는 어지러운 현실에 대해 필요한 용기를 주는 사람이 있다. 용감하고 강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밀러는 사건의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문학으로 전환했다는 점이 놀랍다.
성폭력의 피해자를 직접 만나는 경찰과 수사관, 검사와 판사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처음으로 당신이 혼자 남겨진 수난. 당신에게서 빠져나온 무언가. 내가 어디에 갔던 거지. 뭐가 사라졌지. 그것은 침묵 안에서 억눌러진 공포다. 위는 위이고 아래는 아래이던 세상과의 작별. 이 순간은 통증도 히스테리도 울부짖음도 아니다. 당신의 내부가 차가운 돌로 변해가는 시간이다. 알아차림과 짝을 이룬 완벽한 혼란이다. 천천히 성장하던 사치는 이제 끝이다.
잔인한 각성의 순간은 그렇게 시작된다."

"나는 돈만 있으면 감방 문이 활짝 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발생했을 때 여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이 여자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폭력이 일어났을 때 남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으면 사람들이 그 남자를 동정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내 끊긴 기억이 그에게 기회가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피해자가 된다는 건 신뢰받지 못한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몰랐다."

"마지막으로 모든 곳에 있는 소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이 외롭다고 느끼는 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의심하거나 묵살할 때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매일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싸움을 멈추지 마세요. 내가 당신을 믿습니다. 작가 앤 라모트의 말처럼 "등대는 구해줄 배를 찾으려고 섬 전체를 달리지 않습니다. 그저 그곳에 서서 빛날 뿐입니다"
내가 모든 배를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늘의 발언을 통해 당신의 약간의 빛을, 당신을 침묵시킬 수 없다는 작은 깨달음을, 정의가 이루어졌다는 작은 만족을, 우리가 어딘가에 도달하고 있다는 작은 확신을, 당신은 중요하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함부로 만져서는 안되는 존재이고, 당신은 아름답고 매일 매순간, 이론의 여지없이 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받아야하고, 당신은 강력하고, 누구도 당신으로부터 그것을 빼았을 수 없다는 크나큰 앎을 흡수했기를 바랍니다."

멋진 연설문과 견줄 수 있는 통쾌하고 뚜렷한, 자신의 이름에 잠식되지 않고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진술서였다. 얼마나 모진 시간을 견디다가 강해질 수 밖에 없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름을 잃고 피해자의 신원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숨어지내면서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자신을 난도질하는 기사를 보며 소리죽여 얼마나 울었을지...

가까이에서 당한 일은 아니지만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본 간접경험을 떠올려 보아도 한편으로 기울어져 수사하고 단정짓는 일이 어이없이 빈번하다.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함께 빛을 모아 강해지고 스스로 지킬 힘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폭력과 공포, 성범죄를 태하는 태도에 대해, 분노하고 왜곡된 것들에 대해,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는 것에 대해 제대로 말하고 들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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