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초판본, 양장)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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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를 처음 읽은 것은 출간 50년 후에 베스트셀러에 올라 역주행의 신화로 세상이 떠뜰썩하던 몇 해전이었다. 2016년 즈음 큰 기대로 읽었던 책은 나에게 커다란 의미가 없이 지루하게 읽혀졌고, 그저 그런 소설로 제목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소설로 <스토너>를 꺼내면 의아하면서도 언젠가는 꼭 다시 읽어야겠다는 결심으로 2018년에 책을 사두고 차일피일 미뤄졌다.

스토너를 처음 만날때 내 모습은 때론 절망적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희망적이기도 했다. 어둡고 깊은 터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언젠가 빛을 볼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으로 혼자 애쓰며 헤쳐나오던 시기였다. 내가 힘들고 지친다는 이유로 스토너의 슬프고 고독한 인생을 마음에서 밀어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독히도 나와 닮아 있는 연민에 지루하다고 멀찍히 두고 바라보는 책이었다.

이번에 <스토너>를 다시 읽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알에이치코리아 출판사에 감사한다.
<스토너> 초판본은 절판되었던 1965년 표지를 그대로 복원한 의미있는 사전 서평단 이벤트에 내 이름이 올라 기뻤다.
의미있는 책을 소장하게 되는 일은 굉장히 가슴이 벅차오르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다.

4년 전과 후의 내가 작게나마 어떤 성장의 진동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마음잡고 정독을 해 나갔다.
농부의 아들 윌리엄 스토너가 대학에 입학하고 문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교수가 되어 사랑하고 결혼하며 쇠락해가는 가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임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남들에게 인생소설이라는 것을 내가 느끼지 못해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지루함이 아니라 젼혀 새로운 소설로 다가왔다.
마지막에는 나도 모르게 가슴 속 진하게 올라오는 뭉클함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특별한 어떤 장치나 반전이 통쾌하게 그려지고 독자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대목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 뿜어져 나오는 잔잔한 이야기에 한동안 머물러 있게 되었다.
책은 그대로인데 내가 느끼는 감정은 확연히 달랐다. 스토너의 변화와 성장처럼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그려지는 이디스의 부분은 아쉬웠던 부분이라서 내가 여성 스토너가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디스를 남자로 바꿔서 이입해 읽어보기도 했다.)

"길고 주름진 얼굴이 예전에는 얇은 가죽처럼 강인해 보였지만, 지금은 아주 오래돼서 바짝 말라버린 종이처럼 약해 보였다. 스토너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죽음을 향해 가고 계시는구나. 1년, 2년, 아니 10년 뒤라도 선생님은 돌아가시는 거구나. 때 이른 상실감이 몰려와서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해 여름에 그는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만 생각했다. 전장에서 터져 나오는 폭력이나 파열된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처럼 다른 종류의 죽음이 존재하는 까닭, 그리고 그 차이가 지니는 의미가 궁금했다."

자신을 문학적인 세계로 인도해준 스승의 죽음을 감지하며 상실감을 느끼고, 전장에서 죽음을 맞은 친구의 죽음을 기억하며 씁쓸해하는 스토너의 마음에 애틋해졌다. 누구나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잊고 살다가 가까운 친구나 지인의 죽음을 바라보고나면 크게 와닿을 때가 있다. 상실감은 인정하기 싫은 죽음의 공포와 충격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없는 슬롯을 땅에 묻으며,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도 울어줄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망자의 고독에 울음으로 보낸 사람은 스토너였다. 친구였으며, 동지였으며, 스승이던 교수 슬론의 죽음으로 함께 보낸 젊은 시절도 땅 속에 묻고 애착관계가 떨어져 나가는 마음에 가엾기도 했다.
죽음이 주는 상실감을 견디고 나면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도 한다. 남은 삶을 더욱 가치있게 살고 싶어지므로.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

나도 나이 마흔에 아이와 둘이 세상에 떨어져 나와 살면서 남들이 일찍 알고 배워버린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스토너의 마음에 내가 얹어질 수 있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편안한 마음으로 스토너의 서툰 사랑에 묻어가게 되었다.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거리낌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 가는
스토너의 인생에 대한 관점과 모습이 비쳐진다.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를 향한 마지막 인사에 눈물이 났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고 있을까?
우정을 원했다. 친구를 가까이 두고 친밀한 우정으로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열정적인 사람을 원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랑을 하게되면 포기할 것도 있고 혼돈 속에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또한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는 사람이 있을까?
삶을 다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시간에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나의 삶을 관조하게 될 때 실패와 성공의 기준이 있을까?

한동안 김훈 작가에게 빠져서 <자전거여행>을 읽으며 마음에 담아두었던 구절이 있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더욱 평탄하다."

인생을 돌아보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연속이지만 어느 순간 안정된 평지에 이른다. 결국 마지막에는 그것들이 땅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기고 더욱 평탄한 길이 나온다는 표헌은 힘든 여정에 들어선 나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스토너>를 읽고나서 희망과 절망의 쌍곡선이 결국은 죽음 앞에서 평지가 되는 것이라는 절묘함이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너무나도 평범한 일생이기에 오히려 더욱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의 말처럼 세월의 뒤안길을 돌고 돌다가 어느 날 거울 앞에서 마주한 누이같은 소설이라는 말에 동감이다.

자신의 삶을 실패라고 할 것도 없다. 희망과 사랑에 배신당하고 실패하고 실망과 불신을 만들고 나의 의도와 다른 삶을 살게 될지라도 결국은 그 자체로 나의 삶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며 스스로 관조하는 삶을 만들어간다.
결국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치열한 삶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어떤 쓸모도 없음을 느끼며 자신의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이 고요히 힘이 빠지며 침묵하는 삶으로 종결되는 스토너의 마지막 순간처럼 그것이 우리의 인생일지 모른다. 빛처럼 환하게 비추다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는 것...
찬란한 빛 주변에 어둠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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