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천천히 안녕
나카지마 교코 지음, 이수미 옮김 / 엔케이컨텐츠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행복 목욕탕> 나카노 료타 감독의 영화로 만날 수 있는 원작 소설이다.
조금씩 기억을 잃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병에 걸린 남편을 돌보는 요코는 각자 떨어져 사느라 명절에도 만나기 어려운 딸 세자매를 불러 모은다. 인지증이 심해진 아버지를 마주한 딸들은 그동안 미뤄왔던 아버지의 간병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어차피 시시한 물건일게 틀림없었다. 어머니는 들꽃이라든가 형편없는 솜씨의 종이접기 같은 걸 자주 건네곤 했다. 하루오는 어머니의 다정한 눈빛을 추억하며 손수건에 쌓여있는 선물을 꺼냈다. 꾸러미를 펴고, 거기 있는 물건을 보고, 입을 반쯤 벌리고, 외면했다가 다시 한 번 그 물체를 응시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던 엄마 마저 망막박리 증세로 수술을 받고 입원하게 된다. 혼자서는 생활이 불가능해진 아버지의 간병을 엄마를 대신해서 며칠 동안 딸들이 도맡게 되지만 가족의 어려움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나는 이런 인지증이나 알츠하이머 병으로 불리우는 치매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치매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점점 어린아이처럼 변해가는 할머니 곁에 늘 할아버지가 계셨다.
몇 년동안 홀로 간병하신 외할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은 명절에나 볼 수 있었지만 오래동안 아름다운 노년의 사랑으로, 그리고 한켠에는 한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외로운 죽음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일상의 소중함과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도 함께했던 추억이 남았으니 괜찮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막상 곁에서 보았을 때 간병하는 가족의 삶은 살얼음판과 같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사라지거나 길을 잃거나 집에서도 넘어져서 다치는 일이 다반사이다.
정말 오래 가는 '긴 이별'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치매라는 병은 쉽게 고쳐지지도 않고 오래오래 서서히 멀어져 가는 병이다.
또한,, 홀로 고독하게 자신만의 방에 갇혀 있는 병이다.

"남편은 내 이름을 잊었다. 결혼 기념일도, 세 딸을 함께 키웠다는 사실도, 우리 집의 주소도, 그 곳이 자기 집이란 사실도 잊었다.
아내라는 단어도 가족이라는 단어도 잊어버렸다.
그래도 남편은 내가 가까이 없으면 불안한 듯 찾는다.
언어도 잃었다. 기억도, 지성도 대부분 잃었다.
하지만 긴 결혼 생활을 함께 하는 동안 둘 사이에 항상 존재했던 어떤 때는 강하게 어떤 때는 그리 강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틀림없이 존재했던 무언가를 통해 남편은 나와 유대감을 나누고 있다.
이따금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초조해하며 사람을 밀치거나 큰소리를 내는 경우는 있지만 거기엔 늘 이유가 있었다. 웃는 얼굴이 사라져 없어져버린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이 많은 것을 잊었다 해도 이 사람이 아닌 그 누군가로 바뀐 건 아니다.
내 남편은 나를 잊었어요,
근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요."

'잊는다'는 단어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남편은 아내의 이름을 잊었다.
그게 뭐 대수라고....
가볍게 흘리듯 말하는 요코의 심장이 더 아팠을거 생각된다.

서서히 진행되는 병의 징후는 시시때대로 변하기 때문에 행동을 예측하기 어렵다.
존재했던 어떤 것을 강하게 지우고 싶다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순간 기억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리는 일.
막연한 상상으로 가늠되지 않는 슬픔이다.
감정도 서서히 무뎌진다.
의학적으로는 뇌의 이상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느끼기에는 마음의 병처럼 다가와
한없이 흐릿한 삶들의 기록이 비탄에 젖게 만든다.

인지증이나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가족을 간병하는 주변의 어려움을 따뜻한 이야기로 담아내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때문에 나왔는지,
어떻게 하면 집에 돌아갈 수 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눈 앞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관람차에 이끌리듯 다가와 서 있는 모습에 막연한 상실과 고뇌로 꽉 차 있다.

가족 중에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
간병하는 사람이 오히려 병을 얻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암진단을 받으셨는데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를 하던 남편이 오히려 병이 들어 먼저 하늘나라로 가 버리고 선생님은 완치를 했다.
그런 사연을 알고 선생님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슬픈 그림자가 드리운 듯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남는다는 것은
커다란 상실감이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조금씩, 천천히 안녕
고리타분한 옛날 드라마처럼 신파적인 내용이 아니라 비교적 밝게 만들어진 일화들이었지만
공간도 시간도 점점 잃어버리는 한 인간의 마지막이
안타까웠다.
연줄이 서로 얽혀서 끊어지는 고통의 순간을 만나듯 어느 순간 잠시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당혹스러운데 자신이 잊고 살아간다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관람차를 타고 시간여행을 하듯
한바퀴 돌고나면 다시 제자리의 기억으로 돌아와주길...
사색을 자유롭게 오가는 나의 하늘과 기억들이 선명해져서
침범당하는 일이 부디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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