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작가의 책은 <새의 선물>을 재작년 즈음에 읽었으니 그나마 가장 최근에 읽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들만의 색이 드러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성격의 글도 만나는 재미가 있다.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해서 출간소식을 듣고 궁금했던 책이다. 
장편 소설<새의 선물>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은희경 작가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혔다.
이 책 속에서 만난 은희경의 세계는
역시 은희경 작가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신형철님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어서 나의 기대는 한층 더 커졌다.

"비너스란다.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나는 장면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그렇게 슬퍼졌을까.
초록색이 도는 우윳빛의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럽고 아름다운 얼굴.
가냘픈 알몸을 휘감은 채 바람에 날리고 있는 긴 금발의 머리카락과 커다랗게 열린 조개껍데기를 밟고 선 무방비해 보이는 하얀 맨발.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는 눈 속 깊은 곳의 
그 신비로운 슬픔 때문이었을까."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마치 그림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설명과 묘사가 뛰어나 나의 상상대로 비너스를 그려 놓는다. 사물이나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들이 근사해서 닮고 싶은 몇몇의 작가들이 있다. 내가 문장이나 글에 멋을 더하는 은유나 묘사에는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만나면 따라 적고 싶은 문장들이
넘실거리는 것도 즐겁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것의 이름을 외우는 일마저 포기하면 그 때부터는 노년 인생에서 점점 더 많은 일을 포기해야할 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많은 걸 포기해야 했음에도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체념과 거기에 대한 강요였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자신의 삶의 좌표는 지도의 어디 쯤에 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단편이 있다. 
<지도중독>

"선배가 생각하는 진화란 게 뭐예요?"
"모두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진화야.
인간들은 다르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게 돼 있어. 하지만 야생에서는 달라야만 서로 존중을 받지,
거기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왜 그렇게 열심히 지도를 보세요?"
"좌표가 있으니까. 지도는 내가 풀어본 중에 가장 쉬운 2차방정식이야. 원정 O가 확실하면 P의 위치는 구할 수 있는 법이거든"
"P의 위치가 구해지면 가야 할 방향이 보이겠죠?"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축을 중심으로 만든 좌표상에서 시작점을 정확하게 알고 나면 원하는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을까? 
네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에 여행을 갈 때면 늘 챙겼던 교통지도. 여전히 방향을 알 수 없던 기억이 문득 떠 오른다.
지금 나의 위치를 제대로 알면 가고자 하는 곳의 위치를 원하는 곳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소중했던 지도.
그러나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원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소녀B의 몽상으로 시작하는 단편
<날씨와 생활>은 나의 사춘기시절에 함께 했던 세계명작전집 이야기를 함께 따라 읽으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그 당시엔 책이 귀하고 도서관도 많지 않았다.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나도 어느 날 엄마께서 월부판매로 사 주신 전집이 생겨서 읽은 책을 몇번이나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 때에 읽었던 책은 나의 유년 시절동안 많은 생각을 지배해 왔을 것이다.

소공녀 세라처럼 어느날 부잣집의 상속녀가 되기도 하고,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처럼 하얀시트가 덮인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가냘픈 소녀가 되어보기도 했다. 키다리 아저씨의 사랑을 받는 쥬디도 되어보고, 미운오리 새끼 속의 백조 한마리가 되어 훨훨 날아가고 싶기도 했다. 사랑의 학교처럼 꿈을 키우고 싶었고, 작은 아씨들의 큰언니 매그처럼 주위를 챙기면서 주인공 소녀 못지 않은 몽상가로 살아온 셈이다.
그 시절의 월부책장사에게 책좋아하는 딸을 위해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았을 엄마 생각을 하며 재밌게 읽었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라는 표제작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들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와의 만났던 이태리 식당에서 벽에 걸린 그림 '보티첼리의 비너스'에 대한 애착과 인정에 대한 결핍이 한 인간을 고립시키고 외롭게 만든다. 
아름다움을 만들어가는 소재로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결국은 필사적인 다이어트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인 욕망으로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 완벽한 비율을 뽐내며 서 있는 비너스를 보며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고.

아름다움에는 여러가지 관점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축복받지 못한 출생으로 인한 결핍이 만들어 낸 슬픈 은유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달라지기로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순된 삶의 질감을 표현한 것같아 마음에 들었다.
대학 때 읽고 꽤나 좋아했던 양귀자의 소설 제목이 스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인간은 모순된 것을 알면서도 나의 길을 가고
허락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탐하며
또 그것들을 좇아 욕망에 눈이 멀어
결국은 아름다운 것들이 멸시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상투적인 말로 도배가 되어버린 책도 읽게 되고 터무니없는 억지같은 이야기로 도무지 감을 잡을 수없는 책도 읽는다.
기타를 처음 잡아 연습할 때, 말랑말랑하던 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히고 굳은 살이 박히는 것처럼 내 안에 가끔은 어떤 글로도 마음에 굳은 살이 박힌 듯이 감흥이 생기지 않는 책도 있다.
이 책은 단편들마다 색다른 주제인듯하면서도 삶의 잃어버린 좌표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처럼 하나의 길로 이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기회를 빌어 은희경 작가님의 또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섬세하게 사람의 고독함, 이유와 존재에 대한 통증들까지 매일 달라지는 날씨처럼 
은희경작가만의 색채로 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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