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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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언니는 살해당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나의 언니,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묻어두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책을 받고 표지가 이뻐서 산책길에 들고 나가 야외에서 사진을 찍었다. 빛을 받은 표지에서 반짝거리는 여자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어떤 소설일지 궁금해하며 읽기 시작했다.

일단 에드거상 수상작이라고 하니 서늘한 스릴러나 살인 미스터리물일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그만큼 스토리가 탄탄하고 이미 인정을 받은 작품이니 믿고 읽게 된다.

"아뇨. 경찰이 언니 말을 믿어주지 않았거든요"
경찰은 언니가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언니의 진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언니가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거나, 몸을 팔려다가 과격하게 거절당했을 거라고 의심했다. 그 경찰들은 언니가 마신 술의 양과 언니가 울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집착했던, 마지막으로 남은 구시대의 경찰이었다."

경찰들이 개인의 감정까지 고려하며 사건을 수사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진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억울한 일로 기억될 것이다.
여자라고 혹은 미성녀자라고해서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는 일은 물리적인 상해 뿐 아니라 언어폭력도 심각하다.
심지어 보호받아야 마땅할 경찰에게서까지...

노라는 15년 전 언니의 폭행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경찰들이 이번에도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깔려있는 문단이다.
억울한 사람을 얼마나 더 억울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제대로 된 헌신적인 경찰들도 있지만 여자라서, 어려서, 술을 마셔서...등등의 이유로 제대로 진술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의심하고 넘겨짚는 대목은 함께 분노하게 만든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절벽 끄트머리 위로 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산등성이 아래 교수의 집에 사람이 있다. 그 집 지붕과 굴뚝이 보일 때까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증기가 꼬이는 형상으로 피어오르다가 눈 속으로 사란진다."

"가슴이 쓰라리고 아파져 위를 올려다본다. 이제 그친 눈은 가로로 정신없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공중을 빙빙 맴돈다. 절벽 끄트머리에서 배배 꼬여 있는 키 작은 나무들을 통과해 능선을 걸어 내려간다. 바람 때문에 크게 자라지 못한 나무들은 내 키를 간신히 넘겼다. 뻣뻣하고 노란 천 조각이 걸려 있는 나무에 가지 하나가 튀어나와 있다."

장면이나 풍경의 묘사는
사건을 바라보는 동생 노라의 감정을 정교하게, 아름답고 서정적이라서 더욱 슬퍼지는 기분이다.
두 눈을 감고 언니 생각을 하면 자꾸 후회가 떠밀려온다.
같이 있어 주었다면..
조금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누구든 사람을 잃고나면 해준 것보다는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오는 모양이다.

"중요한건, 그날 아침 내가 언니를 보려고 몸을 돌리지도 않았었다는 사실이다. 그 후 몇번이고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한쪽 어깨를 짚고 일어나 몸을 돌려 언니를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
언니 얼굴은 밖에서 들어온 푸르스름한 네온빛으로 창백해보였을 것이고, 언니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양갈래로 나뉘어 앞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걱정마, 내가 같이 가줄게" 이렇게 말했더라면.
조책감에 사로잡히고, 죽은 것보단 살아있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에 몸서리치며 두 눈을 감는다."

"내 목구멍 안쪽에서 나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가며 마른 침을 삼킨다.
내가 조금만 빨리 갔더라면 언니는 살아 있을 텐데."

15년전의 언니가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하던 장면은 읽으면서 너무 아찔했다. 알지 못하는 남자가 길을 가다가 폭행을 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충격일 것이다.
일종의 묻지마 폭행의 피해자!
읽는 동안 함께 폭행당한 것처럼 땅바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함께 아픔에 숨소리가 나고 넘어질 듯 숨이 막히는 장면으로 그려냈다. 문장이 유려하고 섬세하다. 눈에 보일듯이 그려지고 상상이 될 정도로...

끔찍한 언니의 살인 사건을 발견한 노라를 중심으로 생생한 긴장감과 더불어 군더더기 없는 정밀한 추리들은 몰입감을 높인다.

언니와 싸우지 않은 자매는 없을 것이다.
비록 사이가 좋았던 기억을 가진 노라이든,
나쁜 기억을 가진 언니이든, 가족을 잃은 슬픔이란 이루말할 수 없는 깊은 상실감과 우울감이다.

문득.. <환상의 빛>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남편의 죽음앞에 홀로 남은 주인공은 극한 상실감에 혼잣말을 하게 된다. 듣는 이 없는 말을 캐내면서 이겨내야하는 내면의 상실감을 과연 누가 알아줄 수 있을까.

"언니 생각을 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추억 하나가 꼬리를 물고 다른 추억으로 이어지고,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는 것만 같다. 몇 시간이고 추억을 곱씹으며 앉아 있으려니 마침내 첫차를 타는 직장인들이 죽상을 지은 채 하나둘 나타나 어두컴컴한 플랫폼에서 새벽기차를 기다린다."

"언니와 여기 있는 동안 나는 이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떠날 생각을 하고있었다. 머물면서 매번, 돌아갈 생각을 동시에 하다니.
"언니는 콘월의 제일 좋은 점이 뭐야?"
이렇게 묻기는 했지만 진짜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정말 묻고 싶었던 건 언니는 살아 있어서 제일 좋은 점이 뭐냐는 거였다."

살아있어서 좋은 점이라...
생각해 볼 시간을 스치듯 던져준다.

언니의 살인 사건을 목격한 동생은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리워하면서도 주위의 모든 관계를 모두 의심하고 추리해 나가며 경찰보다 더 행동한다. 오히려 범인으로 몰리는 가운데서도 슬픔의 과정에 몰입한다.
스릴러와 살인 미스터리가 함께 섞인 소설이라 깔린 감정들은 암울한데 사건이나 풍경, 그리고 심리묘사가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나는 이런 문체의 소설이 읽기 좋다.

우리는 과연 가족을 얼마나 이해하고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언니와의 기억과 후회, 사랑과 미움, 분노와 화해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끝까지 사로잡혀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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