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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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있는 소설이었다.
크레이지 사야카 작가 <편의점 인간>이라는
소설도 읽지 않아서 모르는 일본 작가였다.
적의를 담는다는 뉘앙스의 제목이 썩 맘에 들지 않았지만 서정적인 문체와 섬세하고 미묘한 심리 묘사가 매력적이었다.
아마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애써 싫다고 하는 양면성을 드러내는 의미있는 제목임을 알 것 같다.

첫 문장부터 싯구처럼 마음에 들어왔다.
아주 가볍게 읽기 시작했지만 의외로 사춘기를 지나는 청소년들의 친구관계와 2차 성징에 따른 민감한 내용들을 흥미롭게, 그림처럼 펼쳐낸 소설이었다.

"멀리서 이 마을이 서서히 부플어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운동장 너머에서 노란색과 오렌지 색의 기린같아 보이는 중장비들이 얼마 전까지 우리가 가재를 잡으며 놀던 공터를 부수고 있었다."

그저 마을을 공사하고 재개발하는 장면을 나타낸 것으로 읽다보니,
이 '마을'이란 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는 것은 서서히 사춘기를 준비하며 호기심과 여러가지 감정들이 부풀어 오르는 과정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여전히 우리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쿵,쿵, 공터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귀에 익은 그 소리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주변의 여러가지 상황이 일어나고 변화하는 중에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고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글로 읽혀졌다.

초등학교 5학년 친했던 친구들의 이야기들은 내가 딸을 키우며 보아온 과정들과 비슷했지만, 일본의 특이한 것인지 조금 더 성숙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자신의 몸의 변화나 친구들 관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빨리 오는 아이들이 겪는 혼란스러운 마음들이 잘 나타난다.
삼삼오오 짝지어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고 관심있는 이성의 이야기를 은밀하게 나누는 모습들이 귀엽기도 했다.

"요즘 들어 가슴이 욱신거린다.
가슴이 커지면서 생기는 통증이라고 성교육 시간에 배웠다.
부풀어가는 이 마을도 이런 아픔을 느끼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았다.
모래로 뒤덮인 공사현장이 자그마한 사막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나는 발버둥치며 사막 아래로 가라앉는 기린 같은 크레인을 올려다보며 아랫입술에 살며시 손을 댔다.

이부키가 언제까지고 작은 어린애이기를. 언제까지고 내 장난감이기를."

사춘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몸과 마음이 좀더 빨리 성숙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조금 느린 어린애처럼 순수한 아이가 있기 마련이다.
다니자와는 이부키의 순수함을 마음대로 하고 싶고, 혼자 갖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어린애처럼 순수함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되지만, 좋아하는 남자애를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르지 않은 가치관인듯 해서 안타까웠다.

아직 여물지 않은 뼈에서 성장통을 겪듯이 마음 한구석이 아파 오는 장면들이 지나간다.

"다리 안에서 자라나는 뼈가 욱신거렸다.
멀리서 들리는 공사 소리와 뼈의 삐걱거림이 한데 겹쳤다."

초등학교에서 중학생으로 넘어가면서 여러가지로 변화하는 것들을 나열해간다.
등급이 알게 모르게 나뉘어져 그룹지어 몰려다니는 여자 아이들의 습성이 그려진다.
성적으로든, 외로모든, 보이는 것으로 사람이 등급이 매겨지는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만든 올무같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는 이 정도로까지 확실히 급이 나뉘어 있지 않았다.
여자애들 사이의 급이 나뉘는 기준은 더욱 애매했디. 남자들의 시선을 통해서도 급이 나뉘게 된 중학교 교실은 그때보다 훨씬 가혹했다.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다들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개중에는 드물게 교실에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애들도 있었다.
정말 드물었지만, 그런 둔감한 성격을 가진 행복한 애들을 나는 마음속으로 '행복이'라고 불렀다."

"공사 소음이 사라진 마을에서는 밤이면 빛이 사라졌다. 마을은 놀라우리만치 순순히 밤의 어둠에 삼켜졌다. 가로등도, 주택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도 드문드문 퍼져 있을 뿐이었다. 시골의 밤과 달리 동물과 식물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암흑이 청결한 거리를 뒤덮었다.
우리는 하얀 세상과 검은 세상을 왕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

첫사랑의 혼란함과 성적인 호기심으로 가득한 다니자와는 이부키만을 바라본다.
이부키의 올바름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워한다.
다니자와의 마음처럼 소중히 지켜온, 가슴에 둥지를 튼 첫사랑이라는 종교는 발설하는 순간, 비웃음거리가 되어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는 것일까.

"바깥은 아직 환했다. 하얀색과 빛의 세상이었다. 빛 속에서 나의 모든 추함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어느샌가 나는 달리고 있었따. 살짝 뒤돌아보자 두개골 같은 학교 건물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출구없는 청결한 세상을 내달렸다.
(....)
출구가 없다. 검은 세상에 잠겨도, 바깥 세상으로 달려가려 해도, 우리는 이 하얀 세상으로 다시 끌려오고 만다. "

주인공 다니자와는 하얀 건물이 가득한 동네를 너무 힘들어하고 싫어한다. 서예학원에서 글씨를 쓰며 먹을 가는 장면도 이런 마음을 대신해주는 것 같이 묘사하고 있다. 벼루 속의 하얀 물이 먹으로 갈면서 탁해지는 장면들이나 친구와 싸우다 넘어졌을 때 가슴쪽으로 흐르는 먹물 같은 장치들이 자꾸 죄의식을 갖게 만드는 것 같아 안스러웠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가는 자의식과 성 가치관의 혼란한 양면성이 홀로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말은 색연필같다. 지금까지는 태양을 칠할 때는 붉은 색, 바다를 칠할 때는 푸른 색연필을,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따라 꺼냈다. 하지만 태양을 새파랗게, 바다를 짙은 녹색으로, 좋아하는 색연필을 꺼내 칠해도 상관없었다.
그런 당연한 일들을 노부코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창 밖으로 거대한 뼈의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이 새하얀 뼈의 마을은 거대한 무덤이었다,
'내가 싫어하는 나'가 죽기 위한 무덤이었다."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표현이 서툴어 방황하며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름답게 묘사되는 부분이 많아서 읽으면서 함께 기분이 맑아진다.
학창시절 가장 행복하고 , 가장 틀어지기 쉬워 상처 받기도 쉬운 친구관계와 따돌림, 그리고 소중하지만 어렵고 생소한 첫사랑이라는 마음들이 청소년을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에서 쓰여진 소설이었다.

"나는 내게 상처가 되지 않을 정도의
파문 속에서 그 활홀경에 젖어
빛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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