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 짓기 - 이별의 순간, 아버지와 함께 만든 것
데이비드 기펄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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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 된 소설 속의 아버지는 여전히 부지런하게 일하신다. 그것을 늘 지켜보는 것이 행복인 아들이 있다.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가 이렇게 가까운 관계는 드문것 같은데 함께 공동작업을 해 나가는 일지의 기록이 뭉클하고 인상적인 에세이이다. 

"내 기억에 근육질로 남아 있는 아버지의 팔은 지금은 주름이 졌고 피부가 푸석푸석하다. 그렇지만 내가 있는 그대로 보려 할 때도 아버지의 팔은 여전히 예전 모습처럼 단단하고 튼튼해 보였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하얗다.
하지만 그 머리털이 내 눈에서 내 마음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흰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억센 팔, 곱스곱슬한 밤색 머리털.
이것들이 내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은 기본적인 진실이고, 세월의 배신은 여전히 나를 놀라게 한다. 
기억은 사실보다 강한 법이다."

우리의 젊음도 가고 있으면서 부모님의 세월에 더 큰 깊이를 느낀다. 
나이든 아버지와 아들이 한 공간에서 작업을 한다. 그것도 유년시절 추억이 가득한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배워가며 아들은 자신이 죽어서 눕게 될 <관>을 만들어간다.

이 때서야 알았다.
제목의 의미를...영혼의 집짓기

한때 자신의 유언장 만들기, 죽음을 가상 체험하기 위해 관 속에 들어가기..등등이 유행했었다.
작가는 그것과 달리 자신이 눕게 될 관을 직접 설계하고 재료를 구하고 자르고 잇고 사포질을 해간다. 

어버지의 작업장에는 온갖 종류의 연장들이 있다. 자신은 잘 다루지 못하는 연장들을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신사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관리해 두셨다.

"나는 이렇듯 도구를 통해 부모님을 더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와 나누었던 어떤 대화보다도 어머니의 조그만 십자말풀이 표와 그를 위한 광범위한 참고 서적을 통해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풍부한 증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부모님이 살아 생전에 줄겨 사용하던 물건을 바라보며 부모님을 더욱 알게 되는 것은 맞는 말일 듯 싶다. 부모님께서 남기는 흔적들을 바라보는 일이란 상상만으로도 벌써 눈가가 촉촉해진다. 

"아버지에 대한 가장 좋은 기억은 아버지를 지켜 보았던 것, 아버지를 도와주었던 것,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그 서류상자는 내게는 더 없이 소중한 의미를 지닌 상자였다.
그 상자는 이제 막 시작하는 내 인생에서 내가 앞으로 쓰려고 계획하고 있는 모든 글을 준비하고 정리하게 될 공간일 뿐 아니라, 
내가 배웠던 모든 것을 입증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또한 내가 여전히 아버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보통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들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에서 주워들은 부자의 관계에서는 조금 어색한 문화인 듯하다.
하지만 가장 좋은 기억을 갖게 해주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우리 아빠도 무언가를 여쭤보고 자신이 아직 쓸모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리가 되면 은근히 좋아하시는 것 같다. 나는 화초를 잘 몰라서 주로 화초나 한자어를 많이 여쭤본다. 네이버에 물어봐도 되지만 아빠 찬스를 쓰면 기분 좋아하는 마법에 걸리시니 이것도 효도의 방법이라 여겨 종종 사용한다. 아빠어깨가 으쓱!!^^

아무리 친근한 관계여도 아버지와 함께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관>을 만드는 일은 좀 생소한 일이다. 절대 화장을 하지 않겠다는 단호함과 자신의 관을 직접 설계한다는 스토리는 단지 그것이 나무상자<관>을 뜻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점점 더 커져서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욱 절박하고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관 프로젝트의 진행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 속에서 나는 종종 나의 경우와 들어맞아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요소들이 많아 즐거웠다.
주인공과 아버지의 나이가 나와 우리 아빠의 연세와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 차가 일곱살이 더 많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은 주인공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먼저 1년 전에 돌아가신 아픔이 있다. 그 뒤를 이어 친구 존의 부고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폐암 소식과 치료를 하는 중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그 과정이다. 내가 그리워한 것도 과정이었다."

"몇 주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슬퍼한 것뿐이었다. 
내가 알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슬픔은 모든 것에 대해 슬퍼하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내 아들이 야구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을 슬퍼하게 만들었다. 생일 케이크를 슬퍼하게 만들었다. 
석양을 슬퍼하게 만들었다.
늙는다는것은 일단 숫자 계산을 하기 시작하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늙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슬퍼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장소와 시간에 슬퍼할 것을 아들은 안다. 
슬픔은 나눌 수가 없다...
오롯이 혼자만의 것이다. 
슬픔을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죽음에 대한 애도....
끝없이 밀려드는 상실감..
울어도 울어도 멈추지 않는 눈물.....
죽음에 대한 슬픔은 모든 것을 슬프게 한다는 작가의 말에 격하게 공감되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부재는 황망한 슬픔과 휑뎅그렁한 허전함, 
그리고 세상에 울타리가 사라진 것같은 막막함....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그 삶을 기리고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는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힘든 것이다....

"슬픔은 콜라주다.​
명확한 순서없이 한꺼번에 던져진 생생한 이미지, 그것을 해독하는 일이 보는 사람에게 맡겨진 이미지다.
미래는 현재를 뚫고 나가는 과거다. 그리고 과거는 그런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관이 필요하다. 
주위에서 누군가의 부고가 자꾸 들린다면 나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오는 느낌이 든다. 
친구 존의 암과 어머니의 암, 그리고 아버지의 암까지...
누구도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이고 아버지의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관을 만드는 것이 죽음의 당혹스러움을 이겨내는 방법일 수 있다고 믿고 아버지와 함께 뭔가를 한다는 행위 자체를 누린 것이다.

서정적인 문장들에 머물고, 관을 짜며 아버지와 의논하는 일에 눈길과 마음이 먹먹하다. 
그것은 가족의 삶과 친구의 삶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을날 떡갈나무 같다
떡갈나무 이파리 죽어서 땅에 떨어진다
내 몸 죽어서 땅으로 돌아가듯이
그러나 떡갈나무 여전히 살아서
봄을 기다린다.
내 영혼도 그렇게 살아남아
영원한 봄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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