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렬지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중국 소설이나 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문외한이었다. '옌렌커'라는 작가 역시 낯선 이름이지만 읽다보니 영화같고 무협지 같은 서사들이 조금은 장황하고 과장된 스토리가 천명관의 <고래> 읽을 때가 생각났다.
원한을 가지고 있는 두 집안의 대를 이은 복수와 사랑으로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상대를 가해자로, 나는 피해자로 생각하며 편을 가르고 분열하고 미워하는 삶이 피폐함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인생의 희노애락의 극치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표지마저 짙은 빨강으로 중국의 색채가 물씬 풍긴다.
루쉰 문학상 수상 작가이고 노벨문학상에 거론되는 중국의 작가라는 소개를 보고 신청했던 책이다. 내용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마지막까지 결말이 궁금해서 침침한 눈을 부릅떠가며 650페이지의 장편을 읽었다.
3일 정도 나누어 읽으면서 결말을 향해 갈수록 조마조마했다.
용서와 화해, 사랑과 배신, 복수와 명예...
과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여자와 남자는 서로 사랑을 빌미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다가 또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도 하고 혹은 그것이 사랑으로 변해가면 마음을 다 바친다.
뒤늦은 후회와 타이밍이 어긋나는 사랑의 조각들은 생을 다 할 때까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남자는 명예과 권력을 따라가기 위해 사랑을 배신하기도 하고 사랑없는 결혼을 하기도 한다.
촌장 주칭팡의 딸 주잉으로 이어지는 '주'씨 일가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쿵둥더와 그의 네 아들 '쿵'일가의 일대기가 중국의 한 마을의 역사와 함께 장엄하게 펼쳐진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던 지레는 목숨걸고 돈을 벌어 들이는 수법으로 부자가 된 쿵밍량을 추앙하고 그를 따라 돈을 벌기를 원한다.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지만 돈을 벌게 된 그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마을 전체가 잘 살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게 '현'이 되고 '진'이 되고 '시'로 승격하는 장면들이 끝과 시작을 이룬다.
주잉의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된 쿵씨 일가를 향한 복수의 기다림. 주잉은 그 때를 기다리며 쿵씨 일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해 나간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 헤어지고 인생을 소비하는 미움과 증오, 그리고 복수의 대물림은 한 사람만을 향한게 아니라 그 집안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엄청난 재력가이며 미모를 가지고 머리까지 비상해서 사람들을 잘 다루는 주잉.
여자로서의 삶은 재산이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주잉이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한 날은 아버지가 사망한 지 이레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무덤과 비석 앞에서 절하고 지전을 태운 다음 의연하게 마음을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숙한 표정과 굳은 눈빛을 띤 채.
유일하게 한 일이라면 쿵가 대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듯 침을 뱉은 것뿐이었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다른 가족의 몰락이었을까?
복수를 다짐하는 순간부터 아마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중국이 가난한 시골에서 번화한 도시를 흉내내어 급속하게 진행되는 변혁들 속의 많은 부조리와 얻는 것과 잃어가는 것들을 소설 속에서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청렴함을 가장한 권력과 명예를 향한 욕심의 끝은 어디일까?
"세상의 근심은 내가 먼저 걱정하고
세상의 즐거움은 내가 나중에 누린다."
"촌장으로 확정되 후 쿵밍량은 문득 지난 1년 동안 마을 사람들이 산속 무덤에 통곡하러 가지 않았다는게 떠올랐다. 슬픔과 아픔이 있을 때면 조상 무덤을 찾아가 대성통곡하던 풍습을 잊고 살았다.
사실 그건 정말로 운다기보다 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속내를 털어놓는 행위에 가까웠다.
쿵밍량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무덤 앞에서 한바탕 후련하게 울고 싶었다."
"그녀는 혼서를 빼앗아 확인하려고 허공으로 손을 뻗다가 식탁 모서리에 있는 국그릇을 치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국그릇이 세조각 나고 달걀탕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연회에서 그릇이 깨지는 것은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그래서 모두 깜짝 놀라 누렇게 얼굴이 떴다.
오직 주잉만 깨진 그릇을 보고도 반짝반짝 빛나는 무대의 붉은 장막처럼 웃을 뿐이었다."
엄청난 필력으로 두 가문과 형제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시가지를 탈바꿈하기 위해 권력과 재력으로 승부하는 인간들의 황당하고 무질서한 이야기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독자에게는 문학이 늘 삶을 인도하지만
작가에게는 삶이 항상
문학을 강요한다
--작가의 말
오늘날 중국은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방식으로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유럽과 미국의 역사 단계를 추월하려하고 있다보니 규칙과 과정이 목적으로 대체되곤한다.
역사 속에서는 언제나 영웅적인 인물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시대적으로 어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빨리만 갈 수 있다면 발전과 부귀와 승리를 위해 권련과 재력은 암암리에 영혼을 갉아먹기도 한다.
때로는 소설같은 황당하고 복잡한 일들이 인생 속에는 얼마나 더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문학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나 글을 쓸 때의 시대적 배경들을 참고하면 이해가 쉬어진다.
이 작품 역시 중국이라는 오래된 나라이면서 새로움을 갈망하지만 봉건적이고 전제적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으니 흥미로웠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미처 따라가거나 넘지 못하는 진실과 가능성 등에 대해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들을 상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