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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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희 번역가의 글은 정말 재밌다
정세랑(소설가)

일분 문학 팬들이 믿고 읽는 번역가이자 소소하고 중독성있는 글을 쓰는 작가 권남희의 에세이.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처럼 은근히 재미난 문체의 글들이 진솔하게 드러나며 쿨내 진동하는 사람냄새가 가식없이 읽혀서 좋았다.

권남희 작가는 30여 년간 300권 가까이 책을 번역해 낸 번역가라고 한다.
세상에!!!
내가 읽은 일본 소설 대부분일 것 같은데 번역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사실 일본 소설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을 번역하고 매년 노벨 문학상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거론될 때마다 번역가로서 인터뷰도 쇄도한다고 한다. 번역가란 때론 고되고 또 다른 창조의 문학 분야를 담당하는 직업이지만 행복감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 오래하지 못할 것 같다.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있는 권남희 작가의 일상이 돋보인다.

<이방인>을 통해 역자들이 번역으로 인해 얼마나 세심하게 작업하는지 역자노트에서 오래 보았기에 더욱 친근하게 읽었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읽은 은행나무 출판사의 미우라 시온 작가<사랑없는 세계>소설도 권남희 작가의 번역 소설이었으니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책을 고를 때 출판사를 보기도 하고 제목에 끌리거나 표지에 끌려 고르기도 한다. 때론 작가 이름만으로 당연히 읽어야 할 책이 되듯이 이제는 번역가를 골라 읽게 될 것 같다.

"진상을 만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 직업의 큰 장점이다. 편집자는 말도 글도 이쁘게 하고 정중하다. 내가 나름 경력이 오래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생초보시절을 돌이켜 봐도 초짜여서 무시당하거나 서러움을 받은 기억은 없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직업군이 편집자다. 처음 주고 받는 메일에도 정이 뚝뚝, 처음 만났는데도 반가워서 수다가 술술. "

편집자와 번역가의 만남을 상상해 본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만남이라니 너무 설렌다.
책만 보지 말고 드라마를 보라며 아는 동생에게 추천받아서 다시 보기로 열심히 본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책 만드는 사람들과 편집자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그런 드라마를 많이 보고 싶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수고를 알고 책을 귀히 여기고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지는 따뜻하고 다정한 세상을 꿈꿔본다.

"서로 잘 지내라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추억 속의 사람들은 잠시 소환했다가 제자리에 돌려 놓는게 좋다. 긴 공백은 무엇으로도 메우지 못한다. 안부는 바람을 통해 듣도록 하자. 그 시절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50대가 된 지금도 하늘 아래 어디선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기도한다.
나는 잘 지내요."

누군가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오랜 시간 공백이 있다가 만난 사람이 의외로 서먹할 때의 낯선 침묵이 나도 별루 좋지 않다. 마음을 오래 나눈 사람이라면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편안한 친구처럼 좋지만, 굳이 끄집어내어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작가의 말인듯하다. 그래도 나도 잘 지내요^^
같은 하늘아래 지내고 있을 나의 옛 동무들에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는게 아니라
좋은 관계 나쁜 관계가 있을 뿐이다.
흔히 관계가 파괴된 후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하고 상대방을 비난하지만,
관계가 나빠진 것이지 사람이 나빠진 건 아니다.
살아가면서 변하지 않는 관계는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자신이 없다.
학교 다닐 때는 화장실 같이 갈 친구,
도시락 같이 먹을 친구,
그런 친구 관계가 절실히 필요하겠지만,
점점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아도
사는데 불편이 없다.
그래서 귀차니스트인 나는 쉬이 관계를 끊는다.
이러다 세상과도 관계를 끊을 기세다."

예전엔 마당발처럼 사람관계가 풍성한, 발이 넓은 사람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거저 얻어지는 관계는 없으니 그들이 얼마나 애쓰고 공을 들이며 사는 것인지 살면서 알게 되었다. 어쩌면 피곤한 관계도 있을텐데 직업상, 사업상 맺어지고 이어져야 하는 관계들...

진정한 친구를 얻기 위한 노력도 소홀하면 안되지만 변화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감정과 노력을 줄여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귀차니스트라고 했지만 어쩌면 편의하게 자리잡는 현명한 선택적 관계를 유지하는 팁이 아닐까.

"냄새에 민감하고 비위가 약한 나는 점점 심해지는 아버지 방의 악취 때문에 친정에 가도 머무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이기적이고, 고집도 세고, 다혈질이고, 구두쇠여서 평생 가족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 어느 모로 보나 최악의 남편이고 최악의 아버지였던 사람. 그렇게누워서 보내는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도 친정을 갔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나를 멈칫하게 만든다. 평생 딸바보 사랑하는 나의 아빠를 아직도 난 떠나보낼 준비를 하지 못한다. 주위에서 아빠연세의 어른들이 이미 하늘나라에 가시기도 하고, 내 친구들도 친정 아빠가 계시는 나를 부러워한다. 아직은 친정이 있어 그나마 갈 곳이 있다. 그 곳이 사라진다는 생각만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바람이 일어난다. 아직도 받고있는 아빠의 사랑을 내 딸은 일찍부터 받지 못해서 늘 미안한 자리를 내 아빠가 채워주고 계시기 때문일까.

작가의 아빠처럼 힘들게 한 아빠도 아니고 가장으로서 든든한 버팀목이고 큰 산이셨던 아빠를 나는 아직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특유의 투명한 언어들로 그려놓았다. 조금은 멀게 느껴지던 번역 작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읽는 내내 즐거웠다. 그리고 싱글맘으로서 딸과 지내는 모습들이 나와 다르지 않아 더욱 소중하게 귀 기울여 읽게 되었다. 작가가 아닌 번역가의 고된 작업으로 우리가 세계의 문학들을 손쉽게 접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앞으로는 작가이름 소개와 더불어 변역가의 이름도 올려야겠다.
작가로서, 번역가로서, 엄마로서, 여자로서의 삶 속에 배어있는 시시콜콜하지만 공감이 되는 일상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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