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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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장편소설

이 소설은 어떻게 소개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조금은 특별하고 묘한 설정 그리고 순수한 로맨스를 절묘하게 버무린 서사에 흠뻑 빠져 읽었다. 식물들과 바닷 속을 연상시키는 푸른 빛이 어우러지고 매끈하게 반짝이는 표지가 예뻐서 요리 조리 사진을 찍게 만든다.
정감넘치는 작은 식당에서 요리를 만들고 손님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리사를 꿈꾸는 후지마루. 그리고 T대학교의 대학원 식물학 전공의 대학원생 모토무라가 만나면서 소설이 전개된다.
첫 만남에 그녀는 입술 모양의 그림 티셔츠를 입고 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식물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잎의 기공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프린트한 옷을 입은 것이다.
T대 연구실에 배달 주문이 올 때마다 후지마루는 가슴이 설레고 모토무라와 함께 연구실에 있는시간이 즐겁다.

지난해 여름 딸과 함께 들었던 조지타운대 최영은 교수의 강의가 떠올랐다. 동물의 발생학과 유전학을 통해 여러 가지 질의응답을 했었다.
사람의 손가락의 길이는 왜 다를까?같은...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질문으로
단풍잎의 잎은 왜 길이가 다를까?
은행잎과 단풍잎의 잎 모양과 색은 왜 다를까?
유전학과 변이, 그리고 염색체의 배열 등에 궁금함이 생겼다.
이런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연구가 시작되는 것이겠지.

"마치 아른거리는 꿈 속에 있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잎사귀 안에 초롱초롱 펼쳐져 있는 세포의 우주. 후지마루가 지금까지 요리해 온 채소와 고기, 생선 속에도 같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
"내 몸을 현미경으로 보면 어디나 모두 세포가 가득 늘어서 있다는 거네요."
기분 나쁜 것 같기도 하고, 고귀한 것 같기도 한 느낌이 든다. 식물도, 동물도, 채소도, 인간도, 모두 알알이 가득 찬 세포를 필사적으로 일하게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니 왠지 가엽다는 생각도 든다.

매커니즘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세포의 상태를 더 쉽게 관찰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 DNA가 복제되는 동안에 세포가 빛을 내도록 장치를 해놓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후지마루는 한번 더 현미경을 들여다봤다. 생명활동의 증거를 빛으로 발하고 있는 죽은 세포들의 무리. 작은 잎 안에 존재하는 아름답고 쓸쓸한 은하."

내가 물을 못키우는 똥손에서 조금 탈출하면서 느낀 것은 타고난 똥손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이 부족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식물에 대해 지식과 정보로 접근해서 햇빛의 양과 물을 주는 양과 온도등을 각각 다르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초록 식물들이다.
게다가 식물을 연구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더욱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일까?
현미경으로 관찰한 잎의 세포를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어려운 과학이 아니라 정말 식물과 사랑에 빠질것만 같다.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도 없고, 기온이나 계절이라는 개념조차 없는데도, 식물은 정확히 봄을 알리고 있다. 온도계나 일기장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건 초겨울의 날씨가 아니라 진짜 봄이다. 슬슬 여느 해와 같이 활발하게 생명활동을 할 시기가 왔다.'라고 판단하고 기억한다.

반대로 인간은 뇌와 언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고뇌도 기쁨도 모두 뇌가 내놓는 것이고, 그것에 휘둘리는 것은 물론 인간이기에 맛볼 수 있는 묘미겠지만, 관점을 바꿔놓고 보면 인간은 뇌의 포로라고 할 수도 있다. 실은 화분의 식물보다도 더 좁은 범위에서밖에 세계를 인식할 수 없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

요리에만 몰두하던 열혈청년 후지마루에게 찾아온 로맨스는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모토무라와 발걸음을 맞춰 나간다.
다만 후지마루의 감정의 양에 비해 모토무라의 모든 과심은 식물에만 있다. 새로운 논문과 발표과제를 위한 연구때문에 한치도 들어갈 공간이 없다. 후지마루는 사랑 앞에서 기죽지 않는 모습이다. 상대는 대학원 식물학 박사과정이고 자신은 작은 식당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이지만 순수한 사랑으로 모토무라 편에서 응원하고 사랑한다.

"이해는 사랑과 비례하지 않는다. 상대를 알면 알수록 사랑이 식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모토무라에 대한 후지마루의 마음은 그것과는 반대였다.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랑하는 마음도 늘어가기만 했다. 후지마루는 후회는 하지 않았다. 후지마루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사람, 식물을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방충망 너머로 올려다본 하늘에 달이 떠있다. 이제 곧 보름달이 되기 직전의 살찐 달이다. 선인장만이 아니라 맞은편 집 무궁화도 달빛을 받아 어둠 속에 하얗게 떠올라 있다.
우리는 모두빛을 먹고 살고 있다. 언젠가 죽어서 흙이나 재가 되어도, 인류가 멸종되어도 지구 위에서 분명 앞으로도 빛을 먹고 사는 생명의 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정말로 신기하다. 각각의 생명체가 갖고 있는 정묘한 매커니즘이. 식물이나 동물은 왜 태어나는지. 태어났는데 왜 또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리고 가는 길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왜 모두 어둠이 아니라 빛을 식량으로 삼아 살아가는지"
작가가 말하는 사랑없는 세계란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간에서 사랑이 무너진 관계와 비정한 사람들이 모여든 세계일까?
표지가 블루 계열이지만 식물들의 어우러짐이 따스한 느낌을 준 것처럼, 막상 책을 읽다면 사랑이 넘실거려 안온한 기운이 감돈다.

읽으면 읽을수록 식물학에 빠져드는 이 책에서 남녀의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는 없다. 다만 오로지 식물을 향한 열정과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간의 인간미가 넘실거린다. 모토무라가 식물의 일거수일투족에 정신을 빼앗긴다면 후지마루는 오직 모토무라의 모든 일에 눈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미지의 세계였던 식물의 세계로 함께 들어간다. 사랑은 없지만 땅을 뒤덮는 식물의 세계를 사랑하기로 한다.

연구실의 리얼한 묘사와 연구과정의 실패와 성공을 보면서 사랑에 관심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뜬금없는 식물학 공부에 빠진다.
보통의 연애소설은 아니지만 식물을 매개로 한 두 청춘의 로맨스가 설레고 세번째 고백을 기대하고 응원하게 된다.

일반 소설에서 볼 수 없는 고루하고 어려운 과학 이야기
식물의 유전자 변이를 소재로 다양하게 연구하는 사람의 심리를 알 수 있도록 깊이 묘사한 부분이 놀라웠다.
서정적인 글맛을 유쾌하게 살려낸 번역가의 힘도 큰 것 같다.
곧 다가오는 봄에 식물과의 로맨스를 즐겨보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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