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마녀 새소설 4
김하서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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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두 여자의 간절함이 빛의 위로가 되다.
<새소설>은 한국문학의 가장 참신하고 첨예한 작가들의 시선을 담는 소설 시리즈이다.자음과 모음의 새소설 시리즈는 지난번 안보윤 작가의 [밤의 행방]을 인상깊게 읽었다. 이번엔 그 뒤의 작품으로 네번째 번호에 안착한 소설 김하서의 [빛의 마녀]이다.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젊고 새로운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취지답게 신선함에 빠져들게 되는 마법같은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마녀가 나오는 제목처럼 SF소설인가 했다. 니콜의 시선으로는 경어체로 서술을 했고 태주의 이야기는 예사말로 서술을 해서 교차편집되는 듯하게 서로 엇갈려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니콜은 영국과 독일에서 사는 이야기를 편안하게 해서 문득 외국작가의 소설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국적이면서 환상적이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선함과 악함을 끌어내는 오묘하고 독특한 설정과 반전이 매력적인 책이다.
자신의 아이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기혐오’와 ‘피해의식’ 속에서 결국 비정상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은 과연 상처를 극복해낼 수 있을까?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갖고 살아가는 선의 방식 안에 때때로 들끓는 악의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생각으로라도 잠시 나쁜 생각을 해 보는 것과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행동으로 실천해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우린 악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스로 마녀가 된 니콜의 회고록 같은 이야기. 그리고 태주가 잃어버린 아이를 살리기 위해 천사원의 어린 천사는 한 손가락을 잃어야했고 초희라는 미성년자 엄마의 아이를 위험에 빠뜨릴뻔한다. 태주는 자신의 아이를 살리고자 다른 생명이 제물로 사라져야함을 서슴지않고 감행한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초희 뱃속의 아이는 살아있음으로 살아가야 하고 자신의 아이는 이미 죽음에 이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남의 생명을 뺏아 다른 생명을 살게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악마의 속삭임이란 어쩌면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마법이 뭔지알아?"
'믿는거야.'

의미심장한 말들이 곳곳에 박혀있다. 아이잃은 엄마 태주는 26시간 만에 하늘 나라에 가버린 자신의 아이를 놓지 못한다. 그 엄청난 상실감을 처절하게 그려냈다. 니콜은 또 다른 모습으로 마녀가 되었다. 그 둘이 우연히 만나 서로의 상실을 이야기하고 빛이 되어 위로를 해가는 과정이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며 이국적이다. 진짜 마녀라도 있어서 홀린 듯 궁금한 마음으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혼자 살아남은 어미의 애끓는 가슴. 유리 조각이 깔린 길을 온종일 걸어 피투성이가 되어도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할 거예요.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어요. 그녀의 불행이 자기에게 옮겨붙을까 봐 달아나기 바빴죠.
사람들의 염려는 틀리지 않아요. 불행은 회색 먼지 같아서 누구의 어깨에나 내려앉아요. 그게 불행의 법칙이에요. 부자든, 가난하든, 젊었든, 늙었든, 공평하게, 예고 없이, 순식간에 악의 꽃을 피우죠.
p.27-28

아주머니는 벽에 머리박는 애를 떼어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한테 엄마처럼 다 해주면 돼. 먹여주고 치워주고 재워주고."
당신이 틀렸어. 엄마는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지않아. 아주머니는 우는 아이를 무성의하게 한팔에 하나씩 안아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내려 놓았다. 엄마는 한순간도 아이를 짐짝 옮기듯 하지 않아.
엄마는 아이를 그리워하며 먼 가시밭길을 걸어가, 발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아이를 생각하며 웃음을 짓지. 살은 녹아내리고 머리칼은 새하얗게 변해 바람에 날아가. 비 바람 소리처럼 처연하게.
p.101

그 순간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있는 그 자를 보며 깨달았네. 나를 배신한 건 아내가 아니라 내 삶이었다는 것을 말이야.
니콜, 속이고 있다고 믿지만 속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라네. 인간이야말로 불가해한 존재야.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고 또 속지. 그렇게 삶에게 잠식당하는 거야.
p.166

삶의 참혹한 비밀은 투명한 젤리 속에 감춰져 있었죠. 모든 소중한 것들은 너무 쉽게 으스러지고 뭉개져버린다는 것을 당신은 아나요?
삶은 때로 부서지기 쉬운 젤리와 같다는 걸. 젤리가 으깨지고 나면 깨닫게 되겠죠. 삶 속의 진짜 당신 모습을.
p.214

그날 나는 그림자가 사라진 듯 삶의 일부를 잃어버린 기분이었어요. 내가 잃어버린 건 무엇이었을까요. 분명한 건 누구도 생의 함정을 피해갈 수 없을 거라는 거예요. 당신도 나처럼 소중한 걸 잃어버린 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삶의 그림자라는 걸 알려주고싶어요.
기억이 떠오르나요? 당신도 모르는 사이, 무얼 잃어버렸는지.
p.244

어려운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회피하고 싶은 마음과 그것을 인정해야하는 마음 그리고 어떻게든 이겨내야하는 마음, 때로는 불의와 타협해서라도 남을 해쳐서라도 내 것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들이 복잡하게 얽힐 때가 있다. 그런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상실과 연대하는 공통분모를 만들어 엄마로서 아이를 잃은 상실감, 생명의 소중함과 아픔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과 잃는 것 그리고 얻게되는 진심어린 위로들이 작가 특유의 문체로 전개된다. 진짜 마녀의 마법에 걸려 대단한 것이 나올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심리는 인간이 가닿지 못하는 신의 세계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믿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마법의 순간이다. 간절히 원할 때 우리는 분별력없이 그 어떤 주술에 빠지듯이 끌려들어간다. 그 안에 있을 때는 마치 무엇에 홀린듯이 다른 것을 볼 수가 없다. 그 안에서 나와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안개 속에 갇혀 헤매던 자신을 보게된다. 빛의 마녀라는 이름처럼 잠시나마 동화 속에 빠지듯 마법의 주문이 이끌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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