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대장성(大藏省, 지금의 재무부옮긴이)은 도시 5인 가족의 한 달 표준 생계비를 500엔으로 산출해, ‘500엔 생활‘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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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연락선(関連船, 
혼슈 서쪽 끝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왕래한 여객선
옮긴이) 말고도, 1923년에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로가 
개설되어 제주도의 여러 항구에서
 배를 타면 갈아타지 않고도 
오사카에 갈수 있게 되었다. 
조선반도 남단의 섬과 일본의
 대도시를 직접 연결하는항로가 
개설됨으로써 오사카에는 
제주도 출신자가 3만 명이나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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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송환
앞서 얘기한 ‘계획송환‘
(1946년 4~12월)은 
남조선 정세의 혼란이 한층 더 
격렬해지는 시기에 실시되었다. 
게다가 귀환자가 지니고
 갈 수 있는 돈(지참금)은 1,000엔, 
갖고 갈 수 있는 동산은 250파운드
(약 113킬로그램)까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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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은 얼마나 됐을까. 일본 내각통계국이 발행한 <일본제국 통계연감》에는 재류(在留, 한동안 머물러 있다는 의미. 기관명이나 공식 문서 등에 사용된 경우를빼고는 ‘체류‘로 통일옮긴이) 외국인 인구통계가 실려 있는데, 조선인 체류자 수는 1882년에 4명, 1883년에 16명 등으로 1896년까지는 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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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 너머의 역사

[고난과 희망의 100년, 재일조선인의 사회사]
이 땅에선 흔히 재일동포라고 부르는 재일조선인. 
아주 낯선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잘 모른다. 
그러면서도 아니 그래서 더욱 우리 관점으로만 
그들을 바라본다. 생각해보면, ‘재일동포‘라는 호칭부터 
핏줄과 민족, 국적과 얽힌 어떤 편향성, 욕구가 투사되어 있다. 복잡다단하고 기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곡절도 깊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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