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산책
김종완 지음 / 김영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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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적지 않은 프로젝트를 할 수 있던 이유는 우리 스튜디오의 진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지의 세계에 있는 상상 속 인물의 행복을 기원하며 가치를 그려내는 직업.”

<공간 산책>은 공간 디자이너 김종완이 그려낸 수많은 공간들과 그 과정을 담은 책이다. 공간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음으로써 가치를 그려내는 이야기. 이 책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냄으로써 한계를 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물의 수많은 발자취라고 할 수 있겠다.

치밀한 전략과 탁월한 감각으로 탄생한 스물다섯 개의 공간은 ‘브랜딩’ ‘사무실’ ‘SI’ ‘상업 공간’ ‘전시’로 구분했으며, 목적과 쓰임에 따라 어떤 차별성을 중점에 두고 디자인했는지 한눈에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삶의 일부가 되는 공간의 무한한 매력을 통해 저마다의 취향을 발견해보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온전히 마음으로 기억되는 공간을 만들어내기까지, 사람들의 걸음과 시선이 닿는 모든 것에 정성을 기울인 김종완 소장만의 공간 디자인 세계를 만나보시길 바란다. (출판사 서평)

공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공간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적절한 방식으로 커버하는 디자인 방식이 놀라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공간 디자인은 ‘카페 ㅊa'였는데, 저자는 해당 공간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브랜드의 가치, 카페의 인기 비결, 심지어는 한국의 차 문화까지 분석하고 정리하며 디자인을 고안해내고 있었다. 카페 내의 여러 공간이 혼재되어 있고, 각 공간이 차지하는 역할이 완벽히 분리되지 않은 채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다는 부분에서 한국적인 전통미를 찾아낸 점도 좋았다. 일부러 전통적인 요소를 찾아 넣지 않아도 공간과 공간이 서로 자연스레 뒤섞임으로써 익숙한 편안함을 자아낸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어떤 손님이라도 친근하고 아늑한 마음으로 맞이해줄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말 그대로 ‘산책’하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저자의 힘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공간들을 보고 있자면,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수없이 숙고하며 애썼을 끈기의 시간들이 촘촘히 배어 있는 것만 같다. 그 여러 겹의 노력들이 모여 쉽게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자신감이 되고, 이는 그가 맡은 공간에게도 적절한 생기와 여유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이제 하나의 공간에 담긴 수만 개의 마음들을 알게 되었으니, 어떤 공간에 가든 전보다는 경건한 태도로 감상하게 될 것 같다. 구석에 있는 하나의 오브제에도 여실히 담겨 있을 디자이너의 깊은 사유를 가늠하며.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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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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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무언가를 기다리다 못해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작가는 자신의 기억, 그리고 기억의 부재 속에서도 살아 있는 경험에 대해 말한다. 이 산문에는 후회로 점철된 과거와 알 수 없는 현재 그리고 불안으로 물든 미래가 있고, 그 속에서 정처 없이 걷는 사람이 있다.

작가는 투병 중 잃어버린 기억을 그의 가족들의 말들을 하나씩 조합함으로써 재구성해나갔다고 한다. 희미한 기억을 상대의 기억으로 더 생생하게 만드는 경험은 해본 적 있어도 아예 없는 기억을 다른 이의 기억을 토대로 새롭게 생성하는 경험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라 놀랍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떤 기억이든지 당시 느꼈던 감정이 포함되기 마련이므로 조금씩 왜곡되거나 편향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증언으로 재구성한 기억이 자신의 기억보다 훨씬 믿을 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잊어버린 자신이 아니라, 전혀 경험하지도 만나지도 못했던 자신을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가늠하고 만져보는 일은 어떤 기분을 야기하고 어떤 사유를 낳을지 궁금해졌다.

베르크호프 요양원에 관해 서술한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다. 모든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면제된 채로, 포근하게 수평으로 누워서 별을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 곳. 누구든지 그곳에 한번 가면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지는 서술을 들여다보면 아마 작가도 이러한 공간에서 ‘수평인간’으로 살아보는 경험을 바랐던 적이 있는 것만 같다.

p.101
써야 할 글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신용카드 결제일이 다가오는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유예되고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제되며 누군가로부터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것은 퇴행이었다. 그런 마음이 나타나는 족족 그것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있다는 게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그저 ‘보살핌을 받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계속해서 머무르고 싶었다는 작가의 고백이 깊이 와닿았다. 성인이 되고 책임져야 할 일과 스스로 알아내야만 하는 것들이 덮쳐올수록 나는 어른임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아이로 정체화하게 된다. 작가처럼 응급실에 가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지하철로 통학하는 시간만큼을 병원 침대에 누워 쉴 수 있고 학업과 인간관계로부터 벗어나 건강 회복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희열을 느꼈었다.

자동차에 블루베리 나무를 가득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부부와, 계절이 바뀌면 열매와 꽃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나무들. 읽는 내내 상쾌한 기분이 드는 장면들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묘사가 아니라 작가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쓴 진실된 표현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작가는 미래를 향한 빛나는 꿈도, ‘나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없으므로 그저 지금을 살 뿐이라고 서술하지만, 이러한 삶이야말로 진정 현재만을 바라보며 즐기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은 알 수 없기에 즐거워-같은 낙관이 아닌 어차피 알 수 없으니까 현재 주어진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하자-라는 식의 태도가 좋았다.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지금 필요한 것들을 이고 지고 다니는 삶. 그 속에는 즐거움도 서러움도 기쁨도 괴로움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감정들은 닥쳐오기 전까지는 알 도리가 전혀 없고, 우리는 어쩌면 그렇기에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 걱정 없이 오늘도 잘 자라는 나무와 정처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정처 없이도 거뜬히 살아지는 삶에 관한 이야기.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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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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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정말 이성적인가?
•인간은 합리적인가?
•누가 제정신이고, 누가 제정신이 아닌가?
•당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가?

필리프 슈테르처의 저서 <제정신이라는 착각: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는 위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책은 극단의 시대 속에서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이성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으며 다양한 논증을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저자의 설득력 있는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믿고 있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해 계속해서 의심하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렵고 복잡할 수 있는 개념도 일상 속 사례를 함께 들어주고 있어 이해하기 쉬웠다.

책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궁금해했을만한, 그러나 스스로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해답에 도달하기 힘들었을 문제들을 다룬다. ‘인간이 집단에 소속될 때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 ‘지나친 자기확신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 ‘인간이 본능적으로 규칙을 찾으려 하는 이유’와 같은 주제들을 뇌과학, 심리학적 이론을 기반으로 한 명확한 근거와 함께 논하는 것이다. 망상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는데, 음모론에 대한 믿음과 망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들어 비교해주므로 이에 관한 개념을 정립하기에 용이하다. 또한 긍정적 환상이 진화적 적합성에 직접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미치기도 하며, 주관적으로 건강하다고 느끼는 것이 장수를 촉진할 수 있다는 내용도 흥미로웠다.

이성은 사라지고 신념만 남았을 때의 무서움을 피부로 감각하는 일이 잦아진 요즘, 합리적 추론과 비합리적 헛소리를 명쾌하게 구별해주는 반가운 책을 만났다. 거짓 주장과 허울뿐인 신념으로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키워나가야 할 개인의 역량과 지혜를 배울 수 있었고, 합리와 비합리를 구분짓는 통찰을 기를 수 있었다. 자신의 신념이 합리적인 것인지 자주 의심하게 되는 사람이나,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 위에서 진정한 이성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극단의 시대,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이성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이 책은, 이성이라는 환상에 발목 잡힌 현대인을 위한 필수 교양서가 되어줄 것이다. -출판사 서평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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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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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잇다’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함께 읽는 시리즈로, 백신애-최진영, 지하련-임솔아를 지나 이선희와 천희란이 그 찬란한 세계를 이어나갈 세 번째 주자로 등장했다. 책에는 이선희 작가의 소설 <계산서>와 <여인 명령>, 그리고 천희란 작가의 소설 <백룸>이 서로 손을 잡고 이어진 채 나란히 담겨 있다.

이선희 작가는 개인의 욕망과 참혹한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그 사실을 폭로하는 데서 나아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자각하고자 노력했다. 희박한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문학을 지향하는 천희란 작가에게, 이선희 작가는 ‘지속된 한계’를 벗어던지기 위해 새로운 지옥을 찾아 나선 여성이다. 작가는 소설 <백룸>을 쓰는 내내 그저 그 지옥을 함께 걷고자 했다고 말한다.

근대 여성 작가 이선희의 장편소설 <여인 명령>에 잔뜩 매료되어 읽었다.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전개 속도가 빠르게 느껴졌으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성 인물 ‘숙채’가 삶을 개척하는 방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숙채는 알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없음’의 형태로 남겨두는 대신 그 답을 찾아 어디든 떠나는 인물이다. 분명 당대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식으로 행동할 것이다-라는 클리셰를 부수는 행보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주체적 여성이다. 여러 고난에 가로막힌들 슬픔에 빠진 채로 방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금세 어딘가로 향하는 걸음이 당차게 느껴져 좋으면서도, 계속해서 어딘가로 떠나야만 하는 처지가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매 순간 떠나기를, 스스로 만들어낸 여정을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고 자신의 뜻을 내보이기를 ‘선택’했다고 여겼다. 그녀가 결정하지 못한 건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도 일체 없을 터다. 이 소설은 스스로의 세계를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여인의 명령에 관한 이야기다.

이어진 천희란 작가의 단편소설 <백룸>은 완전히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앞서 읽은 이선희 작가의 소설들과 맞닿은 지점이 분명히 있다고 느껴졌다. 인물이 마주하는 현실과 이를 극복하려 하지만 결국 다시 되돌아오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 해결되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마치 아무리 다른 괴물들과 싸워 이겨도 또 다른 퀘스트가 주어지는 게임처럼. 여성들이 이어나가는 삶은 마치 ‘백룸’과도 같아서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감정만 존재하고 언어화되지 않던 생각들이 소설과 평론을 읽고 나서 조금 유연해졌다.

p.489
그러나 우리는 이 바깥에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더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믿어야만 지금 눈앞에 ‘보임으로써 믿어지는 것’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

글쎄, 지금 내가 원하는 세상이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믿어야만 나아갈 수 있다면, 또 다시 몸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다. 다만 나와 함께 크고작은 믿음을 지니고 바깥으로 향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기에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걷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를 가로막는 사회제도 너머 그 바깥의 세계를 믿고 나아가고자 한 숙채처럼, 보이지 않는 바깥을 향해 손발을 뻗어나가고 싶다. 폭력적으로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더듬는 대신 허공에 손을 내밀어 함께할 사람을 찾고, 결코 뚫리지 않는 바닥에 발을 구르는 대신 바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바깥으로 힘찬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알 수 없음’의 연속이고 그 너머에는 다시 백룸이 끝없이 이어져 있을지라도, 이러한 나아감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몇 번이고 손을 뻗을 때 어딘가에서 선연하게 떠오를 빛의 존재를 믿으므로.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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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문학의 탄생 - 한국문학을 K 문학으로 만든 번역 이야기
조의연 외 지음 / 김영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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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한국문학 번역이 지금 ‘K 문학’이라는 브랜드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한국문학이 지금보다 더 흥미로운 초국가적 이야기를 생산하고 번역가의 목소리가 지금처럼 확대되어 나아가는 한, 이러한 성장은 지속될 것이다. 결국 머지않은 미래에 ‘K 문학’이 아닌 ‘한국문학’으로서 영미, 유럽, 일본 문학처럼 세계문학 안에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는 어떤 고통이 따를까. 번역이란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작가의 문체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언어를 재구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많은 번역가들의 목소리를 듣고 난 후에는, 작품의 두 번째 작가로서 문장을 짜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작품이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해치지 않으면서, 각국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가닿을지에 관해 수없이 고민하는 지난한 과정이 포함되는 일이었다.

제이미 장의 번역에는, 인물의 생애와 스스로의 생애를 비교하고 가늠하며 그의 삶을 아주 오래도록 깊이 있게 헤아리는 과정이 있었다. 문학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만큼 자신의 해석에 몰두해 인물을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한들 스스로의 감상을 배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번역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균형적으로 사유하며 인물의 삶을 부드럽게 파고든다. 직접 인물과 만나는 경험을 상상함으로써 독자에게 전달될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언어로 투입한다. 가벼운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p.143
충실성에 떠밀려 쉽게 고려되지 않는 창조성을 질문하면서, 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번역 작업은 부서지기 쉬운 작은 배를 타고 파도가 일렁이는 대양을 건너는 일이라고. 충실성의 가치가 번역의 닻이자 덫이라면, 창조성은 그 배를 출렁이게 하는 파도의 힘이다.

언어의 창조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장르인 시를 번역하다 보면 충실성과 창조성의 사이에서 고뇌하게 될 것이다. 정은귀는 ‘시를 번역하는 일은 시인의 창조적 감각을 번역가에게 이입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시어는 함축적이고 그 속에 수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그 다양한 선택지 중 단 하나를 골라 담아내는 일에는 끝없는 고민과 용기가 필요할 터다. 서로 다른 언어가 등가적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고, 따라서 충실성만으로 번역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창조성이라는 파도가 함께할 때, 바다를 건너가는 구절은 새로운 빛의 언어의 물결을 타고 나아갈 것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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