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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ㅣ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평점 :
‘소설, 잇다’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함께 읽는 시리즈로, 백신애-최진영, 지하련-임솔아를 지나 이선희와 천희란이 그 찬란한 세계를 이어나갈 세 번째 주자로 등장했다. 책에는 이선희 작가의 소설 <계산서>와 <여인 명령>, 그리고 천희란 작가의 소설 <백룸>이 서로 손을 잡고 이어진 채 나란히 담겨 있다.
이선희 작가는 개인의 욕망과 참혹한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그 사실을 폭로하는 데서 나아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자각하고자 노력했다. 희박한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문학을 지향하는 천희란 작가에게, 이선희 작가는 ‘지속된 한계’를 벗어던지기 위해 새로운 지옥을 찾아 나선 여성이다. 작가는 소설 <백룸>을 쓰는 내내 그저 그 지옥을 함께 걷고자 했다고 말한다.
근대 여성 작가 이선희의 장편소설 <여인 명령>에 잔뜩 매료되어 읽었다.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전개 속도가 빠르게 느껴졌으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성 인물 ‘숙채’가 삶을 개척하는 방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숙채는 알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없음’의 형태로 남겨두는 대신 그 답을 찾아 어디든 떠나는 인물이다. 분명 당대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식으로 행동할 것이다-라는 클리셰를 부수는 행보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주체적 여성이다. 여러 고난에 가로막힌들 슬픔에 빠진 채로 방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금세 어딘가로 향하는 걸음이 당차게 느껴져 좋으면서도, 계속해서 어딘가로 떠나야만 하는 처지가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매 순간 떠나기를, 스스로 만들어낸 여정을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고 자신의 뜻을 내보이기를 ‘선택’했다고 여겼다. 그녀가 결정하지 못한 건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도 일체 없을 터다. 이 소설은 스스로의 세계를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여인의 명령에 관한 이야기다.
이어진 천희란 작가의 단편소설 <백룸>은 완전히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앞서 읽은 이선희 작가의 소설들과 맞닿은 지점이 분명히 있다고 느껴졌다. 인물이 마주하는 현실과 이를 극복하려 하지만 결국 다시 되돌아오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 해결되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마치 아무리 다른 괴물들과 싸워 이겨도 또 다른 퀘스트가 주어지는 게임처럼. 여성들이 이어나가는 삶은 마치 ‘백룸’과도 같아서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감정만 존재하고 언어화되지 않던 생각들이 소설과 평론을 읽고 나서 조금 유연해졌다.
p.489
그러나 우리는 이 바깥에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더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믿어야만 지금 눈앞에 ‘보임으로써 믿어지는 것’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
글쎄, 지금 내가 원하는 세상이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믿어야만 나아갈 수 있다면, 또 다시 몸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다. 다만 나와 함께 크고작은 믿음을 지니고 바깥으로 향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기에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걷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를 가로막는 사회제도 너머 그 바깥의 세계를 믿고 나아가고자 한 숙채처럼, 보이지 않는 바깥을 향해 손발을 뻗어나가고 싶다. 폭력적으로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더듬는 대신 허공에 손을 내밀어 함께할 사람을 찾고, 결코 뚫리지 않는 바닥에 발을 구르는 대신 바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바깥으로 힘찬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알 수 없음’의 연속이고 그 너머에는 다시 백룸이 끝없이 이어져 있을지라도, 이러한 나아감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몇 번이고 손을 뻗을 때 어딘가에서 선연하게 떠오를 빛의 존재를 믿으므로.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