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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1월
평점 :
늘 무언가를 기다리다 못해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작가는 자신의 기억, 그리고 기억의 부재 속에서도 살아 있는 경험에 대해 말한다. 이 산문에는 후회로 점철된 과거와 알 수 없는 현재 그리고 불안으로 물든 미래가 있고, 그 속에서 정처 없이 걷는 사람이 있다.
작가는 투병 중 잃어버린 기억을 그의 가족들의 말들을 하나씩 조합함으로써 재구성해나갔다고 한다. 희미한 기억을 상대의 기억으로 더 생생하게 만드는 경험은 해본 적 있어도 아예 없는 기억을 다른 이의 기억을 토대로 새롭게 생성하는 경험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라 놀랍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떤 기억이든지 당시 느꼈던 감정이 포함되기 마련이므로 조금씩 왜곡되거나 편향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증언으로 재구성한 기억이 자신의 기억보다 훨씬 믿을 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잊어버린 자신이 아니라, 전혀 경험하지도 만나지도 못했던 자신을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가늠하고 만져보는 일은 어떤 기분을 야기하고 어떤 사유를 낳을지 궁금해졌다.
베르크호프 요양원에 관해 서술한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다. 모든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면제된 채로, 포근하게 수평으로 누워서 별을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 곳. 누구든지 그곳에 한번 가면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지는 서술을 들여다보면 아마 작가도 이러한 공간에서 ‘수평인간’으로 살아보는 경험을 바랐던 적이 있는 것만 같다.
p.101
써야 할 글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신용카드 결제일이 다가오는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유예되고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제되며 누군가로부터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고 싶었다. 그것은 퇴행이었다. 그런 마음이 나타나는 족족 그것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있다는 게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그저 ‘보살핌을 받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계속해서 머무르고 싶었다는 작가의 고백이 깊이 와닿았다. 성인이 되고 책임져야 할 일과 스스로 알아내야만 하는 것들이 덮쳐올수록 나는 어른임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아이로 정체화하게 된다. 작가처럼 응급실에 가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지하철로 통학하는 시간만큼을 병원 침대에 누워 쉴 수 있고 학업과 인간관계로부터 벗어나 건강 회복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희열을 느꼈었다.
자동차에 블루베리 나무를 가득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부부와, 계절이 바뀌면 열매와 꽃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나무들. 읽는 내내 상쾌한 기분이 드는 장면들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묘사가 아니라 작가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쓴 진실된 표현이어서 더욱 반가웠다.
작가는 미래를 향한 빛나는 꿈도, ‘나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없으므로 그저 지금을 살 뿐이라고 서술하지만, 이러한 삶이야말로 진정 현재만을 바라보며 즐기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은 알 수 없기에 즐거워-같은 낙관이 아닌 어차피 알 수 없으니까 현재 주어진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하자-라는 식의 태도가 좋았다.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지금 필요한 것들을 이고 지고 다니는 삶. 그 속에는 즐거움도 서러움도 기쁨도 괴로움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감정들은 닥쳐오기 전까지는 알 도리가 전혀 없고, 우리는 어쩌면 그렇기에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 걱정 없이 오늘도 잘 자라는 나무와 정처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정처 없이도 거뜬히 살아지는 삶에 관한 이야기.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