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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가다 ㅣ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평점 :
<겨울을 지나가다>는 상실을 딛고 일어서기보다는 그 상실 곁에 오래오래 머물며 누군가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깊고 찬란한 겨울과 소복한 움직임을 담아낸 소설이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읽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는데, 특별히 화려한 서사 없이도 이토록 눈부신 겨울을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하며 읽었다. 일단 책의 첫부분에 실린 에세이스트 김혼비의 글부터 진정 완연한 겨울의 소설을 찬사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부푼 기대를 안고 읽었는데, 이러한 기대를 세밀한 감정, 따뜻한 시선과 빛나는 목소리로 가득히 채워준 소설이었다.
p.132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가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미연이 정연의 집에 방문하며 서로의 공간에, 각자의 마음에 살아 있을 엄마의 안부를 묻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둘이서 계속 엄마의 안부를 묻는다면, 그렇게 둘의 기억 속에서 영원할 수 있다면, 언제나 어디서든 엄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 아닐까.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어떤 상실에도 건강하게 슬퍼할 수 있을 것이다.
정연과 영준의 관계성도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었는데, 정연이 정미를 데리고 평소엔 잘 가지 않던방향으로 산책을 하던 길에 정미가 목공소를 향해 힘껏 달려감으로써 두 사람 간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서로의 상처를 돌보고 소중한 이를 애도함으로써 비로소 상실을 그 형태 그대로 받아들이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들에게 온전한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소설이 끝날 땐 회색 털신을 신고 밀가루 반죽을 하고 정미와 산책하는 정연의 일상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쉽기도 했다.
겨울이 지닌 포근한 속성을 조해진만의 섬세한 언어로 표현해낸 소설. 소설 속 인물의 발걸음이 닿은 곳마다 흐붓한 눈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겨울에 홀로 살얼음이 낀 천 주변을 산책할 때, 식당에서 따끈한 칼국수를 먹을 때, 환하게 불이 켜진 목공소를 발견할 때, 그 외에도 겨울이 몸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순간마다 이 소설을 떠올릴 것 같다.
누군가의 마음 속에 영원토록 살아 있을 모든 존재들에게, 결코 꺼지지 않을 환한 빛을 선사하는 소설. 이 소설을 마음에 새긴 사람들은 앞으로 마주할 어떤 겨울도 아프지 않게 지나갈 수 있으리라.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