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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자는 농담을 양말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양말과 같은 농담’, 그런 농담을 닮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 복자가 눈썹을 그려준 반려견의 얼굴과 같은 것일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과 살아가는 삶이란 어떠할까.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은 상호 간 유쾌한 놀림과 자기 비하를 주고받으며 웃었다면, 둘 사이는 위아래가 없는 평등한 관계임을 입증한다고 썼다. (전중환, ‘즐겁고 유쾌한 웃음’, 경향신문, 2026. 7. 9.) 농담이 오가는 쾌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안에서 살아갈 것 같다.
<복자에게>를 조금씩 읽은 지 3일째 되는 날, 이야기가 들쩍지근하니 몸에 감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영초롱이 끌고 가는 이야기는 조용하고 잔잔하게 밀물처럼 들어와 갯벌 같은 내 일상에 문득문득 들고났다. 꼭 다시 바로 펼쳐봐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40쪽 넘어가는 길목에서 잠시 멈췄다. 금요일 3교시 수업, 교탁에 교과서를 올려두자마자, 한 학생이 맨 뒷자리에 선 채로 페트병과 우유갑을 각각 하나씩 양손에 들고 책상 위로 던져서 바로 세우는 짓을 반복한다. 입학 후 3개월 내내 여러 형태로 말썽의 중심에 있는 학생이다. 그만하고 자리에 앉으라고 하니, 이것만 세우고 앉겠다고 하면서 쿵쿵 소리를 내면서 계속한다. 엄한 목소리로 자리에 앉으라 하니 그제야 털썩 앉는다. 이내 덥다면서 냉난방기 조절기가 있는 앞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더니 조절기에 손을 댄다. 교사의 허락 없이 자리 이동을 했다고 알리고, 어서 들어가라 했더니, 못 들은 척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끄어어어’ 하는 소리를 낸다. 이름을 부르며 수업 중에 이상한 소리 내지 말라 하니 자기가 안 그랬단다. 뻔뻔한 거짓말에 자기도 어이없는지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닫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엎드린 채 잔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평상심을 회복하고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 책상 위에 놓인 <복자에게>를 펼치니, 이 문장이 곧바로 읽힌다. “죄를 견디는 일보다 사람을 견디는 일이 힘들고 영혼을 너덜너덜하게 만든 달까.” 판사 이영초롱이 좌천성 인사 발령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제주도에 도착해서 한 독백이다. 3년 후에는 그 학생이 졸업을 하니, 기한 없는 견딤이 아니어서 다행일까. 홍유가 이영초롱에게 말했던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된다.”라는 말을 새겨야겠다고 다짐했다.
1주일이 지난 후, 다른 반 교실을 막 들어서자마자 어떤 학생이 삐딱하게 앉은 채로 대뜸 오늘 수업하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을 하기 전에 수업 준비를 먼저 하고, 내가 출석을 확인한 후에 질문하라 했더니, 사물함에 가서 교과서를 들고 와서는 자기 책상 위에 ‘빡’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복도로 불러내어 조목조목 타이르는 내내 턱을 곧추세우고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내려본다. 14살 중학교 1학년 아이가. 교실로 들어와 수업을 진행하는데, 건너편에 있는 학생 일에 나서서 참견하고, 옆자리에 있는 학생과 킥킥대며 이야기한다. 수업 중간마다 제지, 지적, 훈계 등을 하느라 수업이 엉망이 되었다. 끝날 무렵, 한두 명의 학생 지도로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여러 학생에게 사과하니, 그 학생이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예’라고 답한다. 뻔뻔하고 조롱 섞인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그 학생 머리를 잡고 고개 숙이라고 말하면서 내리눌렀다. 손끝에 힘을 꽉 쥐었다. 종료령을 듣자마자 교실에서 나왔다. 이날, 7교시 수업이 없어서 교무실에 있는데, 다른 선생님에게 이끌려 그 학생과 다른 학생이 교무실에 왔다. 교사가 있는 데에서 다른 학생과 대화하면서 욕설을 내뱉었단다. 그 교사는 두 학생에게 상황 설명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한 후 교실로 갔다. 글을 쓰는 내내 상대 학생과 언쟁하고 멍청이 운운하며 떠든다. 둘을 일어나게 해서 거리를 두게 한 채 한 명은 사물함을 보고, 그 학생은 출입문을 보고 서 있게 했다. 자꾸 고개를 돌리자 문 보고 똑바로 서 있으라 지시했다. 내 일을 하다 그 학생을 보니 나를 보고 있다. “문 보고 서 있으라 했지.”라는 내 말을 거부한다. 다가가서 목덜미를 잡고 얼굴을 벽으로 향하게 했다. 버티면서 뒤돌아보는 눈빛이 이글거린다. 교실에 갔던 그 교사가 들어와서 나를 제지하고, 그 학생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따라 나가면서 내가 “개망나니 같은 놈, 교사 지시 불이행하는 놈”이라고 소리를 지르니, 끌려가는 중에 뒤를 돌아보면서 나를 내내 노려본다. 종례, 회의, 퇴근 등을 준비하고 귀가하는 내내, 그리고 밤새 나는 불안, 초조, 수치스러움이 뒤섞인 상태로 보냈다.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못했다. 큰소리로 화를 내고 목덜미를 쥔 일에 대한 보호자의 민원과 동료 교사들의 분분한 뒷말이 두렵다. 내일이 걱정된다. 후회스럽다. 언제나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영초롱의 선배 판사인 양선배의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은 엄마가 집에서 자동차 열쇠를 2시간 동안 애써가며 찾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기가 숨긴 열쇠를 내밀었다. 엄마의 고통을 즐기는 아들이 수업 시간에 수업 방해하는 학생들을 질책하면서 괴로워하고 화를 내는 교사의 모습을 재미있는 듯 구경하는 일부의 학생을 닮은 것 같다.
<복자에게>를 거의 다 읽어가고 있던 무렵, 나도 이영초롱의 친고모인 이정희가 겪었던 1990년대의 삶을, 나의 1990년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10년 동안의 나를 나에게 말하거나 글로써 내 흔적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문질러보고 싶었다. 흔적은 긁힘으로 남겨진다. 긁힘의 세기, 모양새, 긁히고 있는 순간의 상황 등이 그 흔적을 다르게 한다. 박정희 정권부터 이어진 군부 독재가 노태우 정부로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때가 1990년대다. 10년 동안 이토록 굵직한 정치적 변혁이 여러 번 일어난 적이 1990년대 말고 또 있었나 싶다. 노동운동은 소련 붕괴 전후 상황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비합법 투쟁을 전면에 내걸었고, 군부 독재에 맞서 분신이라는 극한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민정부 수립 이후 투쟁 열기는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IMF 구조조정과 김대중 정부 수립 이후 민주주의를 두고 벌어진 투쟁은 제도권에 안착 또는 갇혔다. 스무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고향집을 나오면서 시작된 나의 1990년대는 서른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고향 지역에서 교직을 맡으면서 끝났다. 내 생애에서 굴곡이 가장 심했던 때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의 이십 대가 그랬을 것 같다. <복자에게>의 이정희가 겪은 이십 대는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혹독했다. 자살 방조 혐의를 받는 친구 규정의 유죄 입증에 자신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자 규정은 정희와 단절한다. 정희는 자책한다. 정희는 감옥에 있는 규정에게 편지를 쓰면서 화해를 시도하지만 이뤄지지 않는다. 훗날 규정이 출소하고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 준욱을 양육한다.
정희와 규정 간의 이야기 대칭점에 이영초롱과 고복자의 이야기가 있다. 이영초롱은 제주도 옆 고고리섬의 보건소 의사로 일하는 고모(이정희)에게 맡겨져 그 섬에 있는 다랑초등학교로 1999년에 전학한다. 한 시간이면 다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봄날 청보리밭이 유명한 섬, ‘이삭’이라는 뜻의 제주어 ‘고고리’를 이름으로 받은 섬이다. 복자는 낯선 곳에 고립된 이영초롱에게 처음 말을 건넨 또래 친구다. 복자는 기르는 개에게 눈썹을 그려주면서 특별한 존재로 소중하게 여긴다. 장래 희망이 과학자로서, 과학부 활동을 하고 엄정한 개념을 익히기 위해 라디오를 들으면서 표준어를 열심히 학습한다. 둘만 알기로 했던 비밀을 영초롱이 발설하자 복자도 맞서서 비밀을 폭로하면서 거리가 멀어졌다. 영초롱이 이선 고모네 집에 배관공이 자주 온다는 말을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복자는 영초롱의 고모에게 영초롱이 고모의 편지를 부치지 않고 몰래 읽었다고 고자질한 것이다. 복자는 영초롱과 단절했다. 그 후 이십여 년이 지나 영초롱이 성산지원에 판사로 부임하고 복자가 영광의료원을 상대로 산업재해 소송을 벌이는 중에 둘은 오랜만에 만난다.
“생선은 구우면 고소해지지만 조리면 맛이 화려해진다.”라는 말은 <복자에게>에서 두세 번 나온다. 생선조림의 맛깔스러움(미각)을 화려함(시각)으로 묘사한 것을 우리네 삶으로 가져오면 ‘다채로움’이 더 적절하다. 아름답고 빛나기도 하지만 암울할 정도로 가혹하고 쓰디쓰고 환멸스럽기까지 하는 것이 인간 삶의 모습이니까. 정희와 규정, 그리고 이선 고모처럼 영초롱과 복자는 늘 현재, 지금을 요망지게(야무지게) 사는 사람이다. 이영초롱은 청소년 시절에 성희롱하는 성인 남성을 마주 보고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당찼다.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친절하고 다정하지 못한 판사로서 법정에서 피고인을 향해 두 차례 ‘엿 까세요’란 욕설을 해서 징계를 받았다. 엄하기보다는 거친 언사로 갑질하는 판사로 낙인찍혔다. 복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영광의료원 간호사들이 겪은 유산과 기형아 출산 원인이 안전장치 없이 약을 빻는 파우더링 작업에 있으니 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민사소송을 이끌고 있다. 퇴원한 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약 처방 기록을 확인해서 승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오세는 영초롱이 중학생이 된 후 제주를 떠나 다시 서울로 갈 때 서울 집 주소를 유일하게 물어본 다랑초등학교 또래 아이다. 영초롱이 서울로 전학한 후 영초롱이 틀리게 알려준 주소로 여러 차례 편지를 했고, 답장이 없자 직접 서울까지 찾아온 요망진 아이다. 자기가 쓴 편지를 읽은 남자와 줄곧 알고 지낸다. 그 남자가 연 카페 ‘여름 안에서’를 영초롱은 퇴직 후에 친동생과 함께 찾는다. 그가 건넨 땅콩 한 줌을 받고 영초롱은 오세의 편지를 쥔 느낌을 받았다는데, 무슨 이유에서 그랬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엘리자벳은 복자가 소송 중인 영광의료원의 원장 부인이다. 토호(土豪)인 그는 대화 중에 ‘대리출석’의 줄임말인 ‘대출’을 못 알아들어 자존심이 상하자 ‘표독스러운’ 얼굴빛을 보인다. 영초롱에게 과일 깎기를 요청하며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려 든다. 영초롱의 멘토로서, 삼국지와 볼테르의 <관용론> 독서를 권한 고은수 판사는 여러 사람을 수용하는 넉넉한 인품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영초롱의 아빠, 이선 고모, 영초롱의 전 연인 윤호 등 잠깐씩 나오는 여러 인물을 포함해서, <복자에게>가 보여주는 여러 사람의 삶은 무와 감자를 함께 넣고 고추장과 고춧가루로 조린 생선 요리 맛처럼 다채롭다.
<복자에게>에서 편지는 여럿이다. 정희가 규정에게 보내는 편지, 고오세가 이영초롱에게 쓴 편지, 이영초롱이 고복자에게 쓴 편지 등이다. 편지는 쌍방 소통을 희망하는 일방적인 글쓰기다. 상대를 염두에 두고 나를 드러내는 일련의 과정이다. 편지는 소통의 물길을 내는 방식이지만 자기중심적 비대면 방식이기 때문에 상대는 부담을 짊어질 수 있다. 그만큼 편지를 쓰는 사람은 쓰는 행위를 통해 무거움을 덜어낼 수도 있다. 특히 과거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 점에서 이기적 글쓰기다. 이영초롱의 과거처럼 나의 과거도 ‘무거워서 어딘가에 놓고 왔을 법한 과거’일까. 이영초롱의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던 유년 시절, 사법 시험 합격 소식을 직접 전하려고 오랜만에 들른 본가에서 마주한 아빠의 모습 등은 그에게 잊고 지내고 싶었을 옛일 중의 하나이다. <복자에게>는 현재보다 과거를 더 많이 보여준다. 아니, 과거를 더 묵직하게 느끼게 한다. 내게 그런 과거는 무엇이고 나는 누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덜어낼 수 있을까. 영초롱이 법복을 벗은 이유는 영광의료원 간호사 소송과도 관련이 있지만, 법원 내부에서 작성한 판사 성향 분석표에 ‘안전함’이란 평판에도 있다. 요주의 인사도 아니고 윗선에 잘 보인 화이트리스트도 아닌, 들러리 리스트에 자기가 있다는 데 ‘큰 상처’를 입었고, 성산법원에서 보낸 시간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랬는지 나는 모르겠다.
농담을 닮은 삶은 어떠한지, 어떻게 사람을 견디는 삶을 살 수 있는지, 한 줌의 땅콩과 오세의 편지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안전함이란 평판이 영초롱을 왜 무너지게 했는지 궁금하다. 고오세가 이영초롱에 붙인 별명인 ‘앙골아주’는 뭘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서 ‘안 가르쳐줘’란 뜻의 제주말이란다. <복자에게>는 이영초롱처럼 나의 물음에 대해 앙골아주라 한다. 알고 이해하는 건 순전히 내가 할 일이다. 생선조림을 여러 번 만들면서 다채로운 맛을 맛보다 보면 알게 될까 싶다. 더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까. 이렇게 독후감을 마무리하려는데 라디오 FM 방송에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가 나온다. 종잡을 수 없는 여러 감정이 일어난다. 이 세상의 모든 복자, 그리고 복자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다채롭게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지금, 현재를 잘 견디면서 영혼을 탄탄하게 다지며 잘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