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
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의 공포를 안고 압록강을 건넌 후, 어느 언덕에 올라 중국 쪽의 진지함과 너머 조선의 쾌활함을 마음에 담은 이미륵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를 내가 접한 기억에는 몇 가지가 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겹치거나 혼동하는 수도 있다. 80년대 말 대학교 초년생일 무렵 '생의 한가운데'와 함께 선배들 사이에서 오고간 소설일 수 있다. 그 당시 일제강점기, 해방전후 독립운동 관련 소설이 북한 소설과 함께 많이 출간되었다. 최근에 어떤 소설, 아마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에서 보았을까. 1960년대 독일로 간호사와 광부로 일하러 간 한국인 이야기를 담은 그 소설에서 이미륵이 나왔을 것 같은데. 그저 지나는 바람이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호로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힘겨운 나날의 기록으로 여겼다. 지난 주에 동료가 이 책을 구매했다고, 도서실 사서 선생님에게 추천 도서로 알렸다고 하면서 읽고 빌려주겠다고 했다. 읽어야 할 책, 읽을 책이 여러 권인데, 여기에 한 권을 더 추가해야 해서 마뜩찮았다. 

  3일 전 '우와, 엄청나요.'라는 감탄과 함께 이 책을 동료가 내밀었다. 그리고 2일 전 오후, 다른 책을 일별하고 스윽 한번 볼 요량으로 펼쳤다. 1쇄, 소제목, 수암, 첫 문장 '수암은 나와 같이 자란 내 사촌 형의 이름이다.'를 읽자마자 그냥 빠져들고 말았다. 독일어로 쓴 글인데, 한국어로 옮긴 글인데, 울퉁불퉁한 이야기가 매끄러운 글 위에서 산들바람과 함께 흘러간다. 어디쯤에서 덮고 잠을 청했는지 모르겠다. 반절 이상을 홀린 듯 읽으면서 '나' 미륵의 삶을 내 것인 양 관조하였다. 그 사이에 저녁 설거지를 하였다. 어제는 저절로 손이 책에 닿았고, 저녁 약속으로 2시간 외출, 설거지, 큰아이 운전 연습 사이사이에 압록강이 흐르듯 이미륵을 좇다가 자정을 넘겼다. 책과 내가 하나가 된 것인지, 평안하고 부드러웠다. 후회, 두려움, 설렘, 불안, 기쁨, 즐거운, 슬픔 등의 온갖 감정을 거칠게 드러내지 않고 드러내는 글의 힘의 원천은 온전히 이미륵에 있겠다. 여기에 여든 살을 넘긴 안삼환 님의 글은 원저자와 옮긴이의 일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것 같다.

  옮긴이가 '옮긴이의 말'에서 인상적인 대목으로 짚은 마지막 세 개 문단에서 나는 맨 마지막 문단을 적는다. '바로 그날 아침에 나는 먼 고향으로부터 첫 소식을 받았다. 첫째 누님이 내게 쓴 편지였는데, 우리 어머니께서 지난가을에 단지 며칠만 신고하신 끝에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이 문단에 앞서 이미륵은 어느 낯선 집의 정원에 있는 '꽈리 관목 한 그루'에서 '장과'의 새빨간 씨주머니를 발견한다. 주인집 아낙이 가지 하나를 잘라 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작점이라면, 이미륵에게는 꽈리 관목에 핀 장과(漿果)이었을까. 13권 중에서 2권을 읽고 접어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어서 읽고 싶은 마음이 인다.

  모두에게 있는 과거의 시간을 죽기 전에 한 번은 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