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라니, 지금의 이경은 생각한다. 배려라니. 그 거짓말은 수이를위한 것도,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남고 싶은 욕심이고 위선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이경은 몰랐다수이는 그런 식의 싸구려 거짓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사실도이경은 그때 수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한다. - P52
손가락 하나 잡지 않고도, 조금도 스치지 않고도 수이 옆에 다가서면 돌이 반응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수이의 손을 잡았을 때,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창고 구석에서 수이를 처음 안으면서 이경은 자신이 뼈와 살과 피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감사했고, 언젠가 죽을 때가 되면기억에 남는 건 이런 일들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둘이 함께한 첫해의 여름은 그렇게 흘렀다. - P13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사랑만큼 불공평한 감정은 없는 것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 P181
내 마음속, 그 모든 확신이 적힌 카드들을 들춰 보면서 나는 그 카드의 뒷면에 쓰인 말들을 읽었다. 나는 다그치는사람,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 오해하고 단죄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 누구보다도 모래에게 마음을 기댔던 사이 모든 사실을 부정했던 사람…..…셋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마른 몸으로 울던 모래를 떠올렸다. 그날 모래의 말과 눈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닫게 됐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피치 못할 선택을한 사람들에게 자신들 삶의 모순을 또박또박 말하는 건 잔인한 짓이될 테니. 그 시간들을 거치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런 비판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알았다.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이내 말에 모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모래를 어떻게 아프게 할지 모래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모래도 알고 있지 않나, 공무의 형이 공무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공무를 향한 그의 학대를 용인해준 아버지가 어떤 인간인지도, 그걸 알면서도 모래가 공무의 감정보다도 공무 아버지의 감정을 먼저 살피는 것 같아 나는 불편해졌다. "그 사람 감정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 모래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나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지금 가장 괴로운 사람들이아." 나는 모래의 그 순진한 태도에 화가 났다. 어떻게 나에게 그 사람들을 이해하라고 강요할 수 있지.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수 있지.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니. 너무 나쁜 사람들을 너무 나쁘다고하지 그럼 뭐라고 얘기해?" "난…..…" 모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단지 공무가 걱정될뿐이야. 크게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어, 아까 공무, 그 사람들을 비난하는 만큼 공무가 덜 아프다면 나도 그렇게 비난할 거야. 그런데 그건아니잖아."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어린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폐 그 자체인 내 존재에 대한 빚을 갚을 수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를 이해하려고노력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부모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를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짜 이유라도 만들어서 믿고 싶었다. 공무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사랑을 하면서 이경은 많은 일들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입장에서이해할 수 있었다. 수이의 단단한 사랑을 받고 나니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에 대한 판단이 예전만큼 겁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