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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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치유를 예감하는 가만한 응시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소설집 <비 온 뒤>에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삶의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지나가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비가 퍼부어 시야가 흐리고 거센 빗방울에 바닥의 흙이 파여 엉망이지만 언젠가 비가 그치면 맑게 갠 하늘에 무지개가 뜰 것을 그들은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상처를 응시하며 말없이 고통을 삼킨다.


“이제 가야 돼.” 그가 친구의 아파트에서 말한다. 밑에 지나가던 행인 관찰을 중단한다. 다시 그들은 포옹하고 이제 그는 떠난다. 그녀의 입술 감촉이 그와 함께 떠난다. 그녀의 아쉬움 넘치는 웃음, 그날 오후 오랫동안 그의 손안에 있던 그녀의 연약한 손가락. 그는 차량을 뚫고 운전한다. 길을 완벽하게 알기 때문에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아파트에서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고, 거기에서 위안을 찾는다. 다른 여자를 갖는 것은 그의 권리다. 호텔 테라스에서 그녀는 그렇게 결정했다. 아직 없애지 않은 편지를 들고 거기 앉아 있던 한 시간 동안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절대 발견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자신이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278쪽, ‘하루’,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비 온 뒤>에 실린 ‘하루’라는 단편에는 과거 남편의 외도를 발견하고 눈 감았던 여인이 원치 않는 소식이 날아들 것을 예감하며 보내는 하루가 그려져 있다. 오랜 결혼 생활은 사랑과 신뢰로 단단하게 두 사람을 엮어 두었지만 불임인 그녀에겐 씻어낼 수 없는 불안과 상실감이 있다. 간신히 붙인 균열을 삶의 깊은 곳에 숨긴 채 살아왔던 그녀가 그것이 드러나고 말 것을 예감하는 하루는 살얼음 위를 걷듯 조마조마하다.



윌리엄 트레버의 문장은 소설 속 인물이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심리의 변화를 촘촘하게 따라간다. 판단이나 평가 없이 인물 내면에서 흘러가는 생각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주변의 모습을 고요히 옮겨 적을 뿐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을 무너지게 하는 사건은 있지만 그로 인한 소란은 없다. 금이 가거나 깨진 접시는 보이지만 음소거라도 한 듯 요란한 소리는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균열에서는 어김없이 피가 번진다. 흐르는 법 없이 삶 속으로 번져 들어가는 핏자국. 트레버는 그 상처의 자리를 가만히, 지극히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때론 정적과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한다.


지금 술을 마시는 욕실 페인트에 어울리는 불투명한 파란 컵은 칫솔 통으로, 수수한 칵테일 잔보다 술이 많이 들어간다. 거의 세 배는 들어간다. 맛도 다르다. 플라스틱 통은 손에 쥐는 느낌도 달라 유리잔처럼 손으로 잡는 부분도 없고 서늘하지도 않고 입술에서는 더 따뜻하다. 오후가 다가오면서 지나간 아침이 멀게 느껴진다. 오후는 어제의 오후 또 그 전날의 오후와 연결되고, 이런 반복은 어딘가에 출발점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273쪽, ‘하루’,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트레버의 가만한 응시는 상처의 아픔보다는 상처의 치유를 예감하게 한다. 이야기는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으니. “오후는 어제의 오후 또 그 전날의 오후와 연결되고, 이런 반복은 어딘가에 출발점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273쪽) 그렇듯 내일의 오후가, 그다음 날의 오후가, 인생에서는 지속될 것이다. 흠집이 생기고 금이 간 오늘의 오후는 그 반복 속에 사라져 언젠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연인과 이별(‘비 온 뒤’)하고 죽마고우를 잃더라도(‘우정’), 하나뿐인 자식에게 상처 입고(‘티머시의 생일’)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더라도(‘하루’) 말이다.



삶은 흘러간다는 진실


삶의 뿌리를 뒤흔드는 사건이 있더라도 그 균열을 지닌 채 삶은 흘러갈 수 있다고 노작가는 말한다. 상처는 피할 수 없을 테지만 변함없는 삶의 반복이 흉터를 옅어지게 할 순 있다고. “종종, 저녁에, 그녀의 남편이 그들의 집으로 돌아올 때” 볼 수 있는 부엌의 익숙한 모습이 편안함을 건네 듯,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늘 그렇듯이, 그녀를 안아 옮길 때” 그가 부드러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듯, 다만 변함없는 것에 기대어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트레버의 고요한 응시는 그렇게 상처를 위로로 어루만진다.


부엌의 알록달록한 조리대 위에서 고기는 레스웨스 부인이 둔 그 자리에 있고, 기름 일부는 잘려나갔고, 칼은 여전히 돼지갈비 조각에서 기름을 떼어내고 있다. 아까 낮에 껍질을 벗긴 감자는 찬물이 담긴 냄비에 있고, 껍질을 까놓은 콩은 다른 냄비에 있다. 종종, 저녁에, 그녀의 남편이 그들의 집으로 돌아올 때 부엌은 그런 모습이다. 그는 늘 그렇듯이, 그녀를 안아 옮길 때 부드럽다.

281쪽, ‘하루’,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어느 시점이 되면 열심히 쌓아온 삶이라는 모래성이 파도에 닿아 서서히 침식하는 걸 목격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파도의 존재를 모른 채 자기만의 모래성을 쌓기 위해 질주했던 시간이 끝나면 결국 마모의 시간만이 남는 걸까.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삶은 흐르기 마련이라는 진실이,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안도감을 건넨다. 삶의 어떤 것도 영원히 박제될 수 없다는 것이. 기쁨과 행복이 잠시 머물고 사라지듯 고통과 절망도 희미해지게 마련이다. 시간에 기대어 삶은 닳아갈 테다. 시간이 건네는 망각이라는 ‘선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삶이라는 공정한 저울


벨이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고, 그런 주장에 따라 피해를 입거나 파괴당하는 뭔가가 생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늘 이기는 법이니 결국에는 벨이 이길 터였다. 그 또한 공정해보였으니, 바이얼릿은 처음에 이겨 더 나은 시절을 누렸기 때문이다.

27~28쪽, ‘조율사의 아내들’,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삶이라는 거짓 없는 저울에 진실되게 자신을 올리고 묵묵히 자신의 몫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이 책에서 본다. 피아노 조율사의 두 번째 아내 벨은 눈멀고 나이 든 남편에게서 죽은 첫 번째 아내의 존재를 느끼지만 살면서 그 흔적마저 옅어질 것을 예감한다(‘조율사의 아내들’). 둘 다 남편을 잃은 과부 처지임에도 자신과 달리 애도 속에 남편의 사랑을 간직하는 캐서린의 모습에 질투심을 느끼는 얼리샤(‘과부들’). 그녀에게 결혼은 불행한 것이었지만 그걸 보상하는 아름다움이 그녀에겐 있었다. 삶이라는 전 과정에서 각자의 몫은 그렇게 공평할 것이라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미 살면서 보아왔듯, 지금도 경험하고 있듯. 그러니 절망할 필요도 없고 자만하며 우쭐해서도 안 될 것이다. 트레버 소설 속 사람들처럼 언제나 고요하지만 촘촘한 시선으로 삶을 응시해야겠다.




아일랜드 출신의 윌리엄 트레버는 안톤 체호프와 제임스 조이스를 잇는 단편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소설집 15권에 달하는 수백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뉴요커》는 그에 대해 “영어로 단편소설을 쓰는, 생존해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격찬했고, 줌파 라히리는 “트레버의 작품에 견줄 만한 이야기를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겠다”라고 존경을 표하는 등 수많은 영미권 작가들로부터 애정 어린 찬사를 받았다.



그의 나이 67세에 출간된 <비 온 뒤>에는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 소설의 아름다움과 힘을 절제된 문체로 빼어나게 담아냈다. 담담하게 쓰인 소설처럼, 상처 입고 쓰러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담담하게 버티어 내는 게 삶의 자세라고 노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삶이 지닌 공정함이라는 저울을 잊지 말라고 조언한다. 지금 얻는 게 있다면 언젠가 잃은 것이 있을 테고, 지금 잃은 게 있다면 언젠가 얻은 것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가 책 속에 되살려낸 삶의 조각들처럼 실제 삶도 그렇게만 공정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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