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거짓 없는 저울에 진실되게 자신을 올리고 묵묵히 자신의 몫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이 책에서 본다. 피아노 조율사의 두 번째 아내 벨은 눈멀고 나이 든 남편에게서 죽은 첫 번째 아내의 존재를 느끼지만 살면서 그 흔적마저 옅어질 것을 예감한다(‘조율사의 아내들’). 둘 다 남편을 잃은 과부 처지임에도 자신과 달리 애도 속에 남편의 사랑을 간직하는 캐서린의 모습에 질투심을 느끼는 얼리샤(‘과부들’). 그녀에게 결혼은 불행한 것이었지만 그걸 보상하는 아름다움이 그녀에겐 있었다. 삶이라는 전 과정에서 각자의 몫은 그렇게 공평할 것이라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이미 살면서 보아왔듯, 지금도 경험하고 있듯. 그러니 절망할 필요도 없고 자만하며 우쭐해서도 안 될 것이다. 트레버 소설 속 사람들처럼 언제나 고요하지만 촘촘한 시선으로 삶을 응시해야겠다.
아일랜드 출신의 윌리엄 트레버는 안톤 체호프와 제임스 조이스를 잇는 단편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소설집 15권에 달하는 수백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뉴요커》는 그에 대해 “영어로 단편소설을 쓰는, 생존해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격찬했고, 줌파 라히리는 “트레버의 작품에 견줄 만한 이야기를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겠다”라고 존경을 표하는 등 수많은 영미권 작가들로부터 애정 어린 찬사를 받았다.
그의 나이 67세에 출간된 <비 온 뒤>에는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 소설의 아름다움과 힘을 절제된 문체로 빼어나게 담아냈다. 담담하게 쓰인 소설처럼, 상처 입고 쓰러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담담하게 버티어 내는 게 삶의 자세라고 노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삶이 지닌 공정함이라는 저울을 잊지 말라고 조언한다. 지금 얻는 게 있다면 언젠가 잃은 것이 있을 테고, 지금 잃은 게 있다면 언젠가 얻은 것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가 책 속에 되살려낸 삶의 조각들처럼 실제 삶도 그렇게만 공정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