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니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기니>(1938년 출간)는 편지글 형식을 띠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다. <자기만의 방>의 후속편 격으로 여겨지는 이 글에서 화자는 전쟁을 막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구하는 남성 단체의 편지를 받고 이에 대한 답을 세 개의 파트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다. 당시 유럽 사회는 히틀러의 독재로 위기를 맞고 있었고 울프 주변의 많은 이들이 파시즘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주의자였던 버지니아 울프는 어떤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느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울프는 전쟁을 추동하는 가부장제의 폭압에 저항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른 목소리가 필요함을 <세월>과 <3기니>에 풀어냈다.



<세월>이 버지니아 울프가 경험한 삶과 거기서 얻은 영감과 생각, 가치를 통합하여 그려내면서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했던 노력을 소설로 표출한 시도였다면 <3기니>는 그러한 의도를 사회 구조의 변혁을 요구하는 구체적 목소리로 설파한 에세이다. 본래 <파지터가의 사람들>이라는 하나의 소설에 담아내려했던 두 개의 목소리를, '소설'과 '강연'으로 구분하여 <세월>과 <3기니>로 나누어 엮었다.



<3기니>의 전체 골격은 ‘전쟁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편지에 대한 회신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각 파트에서 펼쳐내는 화자의 주장에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자유를 옹호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의 목소리와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가 낳은 폐해(전쟁과 독재)를 해결하기 위한 비전과 고민이 담겨있다.



책의 첫번째 파트에서는 전쟁에 대한 혐오를 교육하는데 있어 남성 엘리트 교육이 실패했음을 지적하고 그것과 다른 방식의(여성,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고학력 남성의 딸들’에게 생활비를 버는 것이 왜 중요하며, 돈을 버는 것으로 얻게 되는 자립의 힘을 강조한다. 두번째 파트에서는 여성이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기회는 생겼지만 대다수 고위전문직은 남성들이 독식하고 있으며 보수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비판한다. 또한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소유에 대한 집착, 권리에 대한 집착, 호전성, 탐욕”에 갇혀 있음을 지적하며 직업 세계에 발을 담근 여성들이 남성적 가치를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글의 화자는 (남성 전문직 종사자들처럼) 탐욕으로 돈의 노예가 되고 재능과 힘을 과시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 가부장제가 세습하는 자부심에 대해 무시할 것을 요구한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직업의 기회가 주어지도록 서로 돕고 애쓸 것을, 남성적 대열에 합류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여성들의 이러한 움직임이 확대되고 사회가 여성에게 적절한 급료를 지급한다면 일의 노예가 되어 있는 남성들의 형편도 달라질 것이라 예측하며 가정과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길 꿈꾼다.



"전문직이 돈을 갖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찾아낸 전문직에 대한 사실들을 감안할 때, 돈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 바람직할까? 부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가르침이 2천 년이 넘게 인간의 삶에서 엄청난 권위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당신도 기억할 것이다.

(…)

너무 부자인 것은 너무 가난한 것과 똑 같은 정도로, 그리고 똑 같은 이유로 나쁘다는 이 증거에 당신도 동의할 것이 아닌가? 너무 부자인 것과 너무 가난한 것이 둘 다 나쁘다면, 그 두 지점 사이의 어딘가에 나쁘지 않은 중간 지점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그 지점은 어디인가?

(…)

우리가 저 대열의 꽁무니를 애써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먼 지평선의 비전을 내다볼 수 있으려면 먼저 이 사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128~129쪽



세번째 파트에서는 오래된 성적 금기(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생각)를 들춰 내고 남성들의 생각을 고착시키고 강화해 온 사회를 비판한다. 그러한 시선 속에는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사회가 파시즘을 발현시키고 그에 동조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담겨 있으며 가부장제 사회의 압제와 굴종에서 벗어나는 것이 파시즘에 저항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속박에 대한 두려움)과 남성(금기가 깨지고 지배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모두 일종의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데, 그 감정은 깊숙한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화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이 두려움을 깨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유아기 고착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고, 유아기 고착이 왜 생겨나는가와 관련된 설명도 막연한 일반론을 벗어날 수 없다. (…) 남성이 우위에 있다는 통념, 심지어 여성이 열등하다는 통념(여성은 곧 ‘불완전한 남성’이라고 느끼는 잠재의식에서 비롯되는 통념)의 배경에 바로 이런 유아기 고착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 많은 사람들이 여성이 교회의 직분, 그중에서도 특히 성소의 직분을 얻게 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사실 자체가 본 논의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거다. 이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것은 불합리한 성적 금기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227쪽


"미스터 젝스 블레이크가 딸에게 원한 것은 아버지인 자신의 수중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아버지인 자기에게 돈을 받는다는 것은 아버지인 자기의 수중에 그대로 있다는 뜻인 반면, 딸이 다른 남자에게 돈을 받는다는 것은 아버지인 자기에게 의지하지 않게 된다는 뜻일 뿐 아니라 다른 남자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238쪽


"이 감정이 이렇게까지 강력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사회가 유아기 고착을 비호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본성, 법, 자산 이 세가지가 모두 기꺼이 유아기 고착을 양해해주고 은폐해주었습니다.

(…) 사회는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아기 고착이라는 병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243~244쪽



저자의 결론은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이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의 조력이 필수적이며, 기존의 남성적, 가부장적, 독재적 가치관이 지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와 수단(아웃 사이더적/여성적 시선과 가치관을 반영한)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지닌 ‘전쟁’이라는 파멸적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방식의 사고와 언어가 필요한데, 이는 여성들(아웃 사이더)이 가지고 있었던 방식과 가치관에서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종의 연결,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 공적인 세계와 사적인 세계는 서로 불가분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 어느 한쪽 세계의 압제와 굴종은 곧 다른 한쪽 세계의 압제와 굴종이라는 것을 이 사진은 일러주니까요. (…) 우리 자신 또한 이 형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곧 이 형상이라는 것, 우리는 평생 저항 없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생각과 우리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이 형상을 바꾸어나갈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라는 것을 이 형상은 일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으니, 귀하의 세계와 저희의 세계가 하나로 이어진다는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체들과 무너진 집들이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256쪽


"저희가 귀하의 전쟁 방지 노력에 도움이 될 최선의 방법은, 귀하가 사용하는 말을 반복하고 귀하가 동원하는 수단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을 찾아내고 새로운 수단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귀 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귀 단체의 외부에 남아 있으면서 귀 단체의 목적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귀하와 저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한 명 한 명 정의와 평등과 자유라는 대원칙에 따라 존중받을 권리”를 천명하는 것입니다." 258쪽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극명하게 가르는 히틀러 독재는 가부장 독재의 가장 폭력적인 형태이며, 당시 사회와 교육제도가 가부장 독재를 공고히하는 형태를 띠고 있음을 고발하고 파시즘 독재와 전쟁을 막기 위해 가부장 독재를 옹호하는 사회의 구조적 변혁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가정에서의 가부장 독재와 사회 조직 내에서 일부 남성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권력과 부의 편중을 확인하고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입장을 고찰했다. 그리고 지배력 강화와 힘의 과시, 폭력성을 옹호하는 남성주의에 반하는 가치를 여성 사회와 소수집단(아웃 사이더*)에서 찾으려 시도했다.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닌, 남성 사회가 답습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일궈야 함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그렇다.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고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에서 다른 사회, 새로운 언어, 새로운 수단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하며 변화할 것을 제안한다.

(*책에서는 '여성' 또는 '아웃 사이더'라고 명명된 이 집단은 현대적 시각에서 여성을 포함한 모든 소외 계층과 소수 집단으로 바꾸어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3기니>에서 감지되는 버니지아 울프의 여성주의적 시선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또한 과거 가부장제 폭압의 현실과 남성 지배적 사회 구조의 실체, 그 이면에 내포된 남성적 본성과 성적 금기, 그리고 여성의 열악한 상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가부장제의 역사 뿐만 아니라 여성 억압의 역사와 여성의 권리(선거권이나 재산권 등)획득과 신장의 과정을 확인하는 일은 현재의 위치를 가늠하고 미래를 예견하는데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므로 울프의 의견이 근원적 문제 제기에 그치고 해결책에 대한 제안이 모호하거나 낭만적인 방식에 머문다는 아쉬움이 있을지라도, 남성 중심 사회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 <3기니>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남성 중심의 사회적 가치가 파시즘과 전쟁이라는 파멸을 향해 달려갈 때 여성주의적, 소수 지향적(아웃 사이더적) 목소리의 필요성, 사회 변화를 위한 새로운 시선과 수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당시에도 의미가 큰 글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 문제-환경 오염, 빈부 격차의 심화, 차별과 혐오, 극단적 폭력 등-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한 세기 전 울프의 제안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서지고 갈라지고 고장난 세계를 치유하고 엮어 줄 힘은 우정을 바탕으로 한 공생과 연대, 보살핌과 돌봄 등 여성적이며 소수 지향적 태도와 가치관에 있지 않을까. 다른 삶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 기존의 경쟁적 파괴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향해 가기 위해 우리 또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