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입장들 3
정지돈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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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서 무단 이탈했다면, 급진적 본능이 있는 이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식 서사 내부에 숨은 대안적 과거를 발굴하고, 팝의 공식 서사 후미에서 기이하되 비옥한 줄기와 걷지 않은 길을 찾아내 역사의 지도를 다시 그림으로써, 과거를 낯선 외국으로 바꿔놓는다."

<일기/기록/스크립트>에 인용된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의 일부, <<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문학과지성사

 

 

 

역동적인 변화, 또는 진보가 이끌어낼 미래는 더 이상 나에게 해당하는 시간이 아닌 것 같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신기술로 급변한 미래가 아닌 과거나 현재의 긍정적인 가치가 유지되는 미래이고 어떤 면에서는 변화가 더딘 과거의 모습을 지향한다. 한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시간의 축, 그 위에서 가능한 빨리 도달해야하는 점으로서의 미래, 불가능을 가능의 세계로 끌어 놓는 진보와 개발, 혁신의 미래는 단순히 매혹의 대상만은 아니다. 진보라고 부르짖었던 미래가 당도했을 때 더 큰 좌절을 겪었던 경험은 미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미래는 여전히 꿈꿀 만한 것일까. 미래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정지돈의 단편 소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중)는 정치적 격변과 경제개발의 물결에 휩쓸렸던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오사카 만국박람회(엑스포70)를 중심으로 재조명하고 미래의 의미를 묻는다. 소설은 시대 변화에 주축이 되었던 남성이 아닌 그 안에 속해 있었지만 소외되었던 여성, 태순의 목소리로 진행된다. 건축가인 조영무(1932년~)와 김원(1943년~), 그의 스승인 김수근(1931년~1986년)등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은 역사적 사료 같은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정태순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등장하면서 주류의 시선을 소수의 것으로 확장시킨 것이 이 소설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실린 소설집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에서 소외된 인물을 통해 역사적 경험을 재해석하는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소설집의 첫번째 작품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에 등장하는 ‘재닛 프리드’ 역시 기억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엑스포 70 한국관 안내원으로 선발된 정태순이 작품의 화자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다. 엑스포 70 자료에서 한국관 멤버들의 단체 사진을 보았는데 이후 한국의 대표 건축가가 된 남자들 사이에 홀로 있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녀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개발도상국의 예술가와 건축가,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각에는 늘 동조와 비판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한다.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미래에 대한 매혹과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할 순 없을까. 작가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되었고 이야기는 정태순의 목소리를 빌어 흘러나오게 된다. 정태순은 당시 한국 사회의 미래를 상정하는데 활발하게 활동했던 단체에 속해있었지만 동조와 비판의 시스템에서조차 소외된 관찰자이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소수자였다.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본다면 어떨까. 모두가 예정된 길을 가는 듯 했지만 그 길 밖에 서 있던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참고 https://m.blog.naver.com/jump_arko/221497194850

 

 

식민 지배와 이념 갈등의 여파로 반 토막 난 동아시아 국가에서 태어나 10대에 혁명과 독재를 경험하고 대학에 입학한 여성, 정태순에게 서울은 어떤 곳이었을까. 1968년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온 대구 출생의 태순은 서울에서는 ‘수업을 듣고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풍경만 보고 살았다’. 명동과 종로를 걸어다니며 새로 지어진 빌딩과 아케이드를 걸어다녔고 사람들의 차림을 구경하고 고가도로가 올라가며 하루 하루 눈에 띄게 변해가는 서울의 풍경을 관찰했다. 그런 분위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들뜨거나 풀이 죽는’ 기분을 느끼거나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불쑥 솟아오르게 했다. 시각적으로는 모든 게 변하고 있었던 시대, 하지만 정말 변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격변기였다.

 

 

 

"태순아, 여자가 웃긴 건 미덕이 아니야 하는 큰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웃기고 있네, 웃기지도 않은 주제에. 태순은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생각난 걸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말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말하지 않는 게 편해졌고 받아칠 타이밍도 잊어버렸고 난 더 이상 웃기지 않나봐 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기도 했지만 내가 나를 웃기니 그걸로 됐어, 웃기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거나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쓰고 내일 있을 것 같은 일을 쓰고 더 기분이 좋을 때는 10년 후의, 30년 후의 일에 대해 일기를 쓰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30년 후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때는 나도 오십이 넘고 손녀 손자에 볼 장 다 봤을 나이고 텔레커뮤니케이션으로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세기말이니까 여자가 웃긴다고 지랄할 사람은 없겠지, 안 그래, 양코씨? 하고 태순은 생각했다."

64-65쪽,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 것이다>>, 정지돈, 워크룸프레스

 

 

 

태순과 일본인 양코씨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소설에서 태순의 말은 대부분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태순의 독백은 생각하는 것을 말로 할 수 없었던 그 시대 여성의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발화되지 못한 말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태순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떠오르는 생각을 검열하느라 말하는 법을 잊었고,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자 몸이 있어야할 공간조차 사라진다. 그에게 꿈꿀 수 있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가능성은 지금 ‘이 곳(공간)’이 아니라 언젠가의 ‘미래’라는 시간에만 있었다.

 

 

 

"이후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때의 지루함을 생각하면 왜 이것이 이어지게 내버려두었는지, 양코 씨는 왜 어두운 낯을 하고도 바로크빌딩으로 기어들어 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모두 왠지 모를 힘에 이끌려 낯선 공간과 관계 맺어지는데 그 힘을 일컬어 시간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그때는 미래라는 말이 너무 좋고 일기에 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쓰며 아이를 낳게 되면 아들딸 구분 없이 미래라고 하자, 미래에는 남녀 구분이 사라질지도 모르고, 미래에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아이가 있을지 모르고, 미래에는 미로로 만들어진 방과 건물, 도시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도 지치지 않고 두렵지 않고 예기치 않은 조우와 나무가 우거진 광장을 가로지르는 자전거, 테라스를 맴도는 새 떼의 울음소리, 쇼윈도에 비친 초록색 베레모와 다리 아래를 오가는 작은 자동차 무리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일지도 모르니 미래를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69쪽,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떠들썩한 만국박람회의 현장, 누군가에게는 성과이자 업적, 곧 도래할 미래의 현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요란한 잔치, 혹은 거대한 이벤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미래지 우리 미래가 아니요, 그들의 진보지 우리 진보가 아닙니다’라는 일본인 양코의 말처럼 아수라장 속에 사고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외침과 진보에 대한 찬양은 공염불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태순은 회의장에서 논의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한국관을 목격했다. 가까운 미래조차 현재에서 꿈꾸었던 것과 달랐다. 그가 일기에 적었던 미래, 유일하게 꿈꿀 수 있었던 미래라는 시간은 도래할 수 있는 것일까.

 

 

 

 

"저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곤 합니다, 왜 미래학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한국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토록 다르고 판국관과 한국관을 만든 사람들이 이토록 다르며 만박과 만박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다른 것이지요, 저는 어디에도 피트하게 들어맞지 않는데 이것은 제게 장소보다 시간을 꿈꾸게 합니다, 기술을 찬양하는 것과 기술을 비판하는 것, 박람회에 참가하는 것과 박람회를 분쇄하는 것, 국가에 동조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 모두 몸에 맞는 옷을 선택해 입는 것이며 그런 옷을 입을 수 있는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였지요, 라고 태순은 말하며 그녀가 보기에 양코 씨와 김원, 조영무는 모두 그러한 몸을 가진 사내들로 몸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저는 누구보다 오래 한국관에 머물렀고 신문 기사에도 나왔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라고 말했다."

79쪽,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태순은 현실의 괴리 속에서 자신에게 들어맞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과 상관없이 이분법으로 나뉜 현실의 공간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선택해 입을 몸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는 태순. ‘누구보다 오래 한국관에 머물렀고 신문 기사에도 나왔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변화의 중심, 휩쓸리는 물결 속에 있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도, 선택할 권리조차 없던 그의 말은 방백이 되어버린다. 태순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사이 진보나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시간은 어떤 허상을 그리고 지우며 흘러왔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국가와 정치, 이념과 주의는 거대한 흐름을 장악하고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고 그것이 전부이거나, 당연한 귀결이라는 듯 거들먹거렸던 것은 아닐까. 소외된 사람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권력의 제스춰는 요란한 서커스에 불과했다.

 

 

 

 

"자신은 인천공항에서 내려 미니밴을 타고 자유로로 진입했는데 도로를 달리는 내내 흐렸던 겨울 하늘에서는 비가 퍼붓기 시작했고 냉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강변북로에 갇혀 몇 시간이고 한강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은 희미한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는데 만약 김수근 선생에게 다이너마이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여의도를 영원히 물에 잠기게 했을까요, 반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은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 라고 말했다."

81쪽,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소설의 끝, 2012년 서울로 돌아온 태순은 40여년 전 만국박람회에서 그리던 미래(혹은 미래 이후의 미래)에 당도했다. 하지만 태순이 좋아했던 것들은 사라졌고 꿈꾸었던 미래는 없는 것 같다. ‘미래를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태순은 여전히 묻는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 진보의 개념을 포괄하는 미래는 여전히 긍정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가요, 우리는 진정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라고. 이 질문 앞에서 어떠한 답도 할 수 없는 막막한 심정이 되어 서성거렸다. 미래에 대한 매혹조차 사라진 요즘, 미래의 가능성이라니.

 

 

코로나 19라는 감염병의 등장과 함께 기후 위기가 거론되는 요즘, 미래는 거대한 재난 영화와 같은 이미지로 우리 앞에 떠오른다. 통제불가능한 전염병의 창궐로 언컨택트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했다. 환경과 교육, 빈부격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 앞에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전대미문의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미래를 긍정할 수 있을까. 다가올 미래는 과거의 반복도 아닌 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동일한 소설집에 실린 <해변을 가로지르며/바다를 바라보며>에는 브라질의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의 새로운 시간 관념이 인용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순이 묻는 미래의 의미는 직선형의 시간 개념 하에서 더 이상 답을 찾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시간에 대한 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이 우선일지도.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우리는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 리나 보 바르디는 말했다. 직선적 시간관은 서구의 발명품으로 시간은 즉흥적이고 엉켜 있으며 어떤 순간에도 임의 접속할 수 있다.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95쪽, <해변을 가로지르며 /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정지돈, 워크룸프레스

 

 

 

리나 보 바르디의 말에 따라 시간을 상상해본다. 언뜻 엉켜있는 실타래처럼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선형으로 회전하고 있는 조형물이 떠오른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리. 원한다면 어떤 순간으로든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접속해야할 시간은 어디일까.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회복하고 지속적으로 꿈을 꾸며,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존재하긴 할까. 지금의 우리가 그곳에 접속할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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