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낮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95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아카넷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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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두번째 소설 <밤과 낮>에는 전통있는 가문의 한 여성 캐서린이 결혼을 앞두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을 찾고자 분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가부장제 하의 결혼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남성의 지배적 권력 속에서 여성의 삶이 지닌 한계를 들춰내고 여성의 독립적인 삶에 대한 고민과 가족 제도가 지닌 강압적 의미를 파고들기도 한다. 여성의 참정권조차 없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울프의 고민과 시도가 급진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프가 여성이 꾸려가는 삶의 의미를 강조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자유롭게 삶을 영위할 권리를 옹호하고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소설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댈러웨이 부인>이나 <출항>에서 느꼈듯 울프 소설의 매력은 인물들간의 대화나 인물이 자기 내면의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우리가 언어로 명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생각, 어떤 순간의 흔적이 마술같은 단어로 풀려나온다. 그의 언어는 진심을 알 수 없어 헤매이는 인물들 간의 대화에서도 일말의 진실에 다다르고자 무수히 시도한다. 말은 끝없이 밀려오고 부서지고 마는 파도처럼 쏟아지지만 허무하게 사라지는게 아니라 파도에 쓸려 고유의 무늬를 간직하게 된 돌맹이나 조개껍질처럼 독자의 마음에 인상을 새긴다.



"그녀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고, 워털루 브리지가 보일 때쯤에는 그 내용에 대해 시험이라도 치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발밑의 포석을 헤아리는 이상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평생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임뱅크먼트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 것이 대수 기호로 가득 찬 책들과 점, 분수기호, 괄호투성이의 페이지들이라는 사실을 데넘이 알았다면, 그녀가 자신의 말을 경청해주는 데서 느끼던 은밀한 기쁨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

그러는 동안 내내 그녀는 망원경을 통해 별세상의 새하얀 원반들과 그 그늘진 협곡들을 관찰하는 공상에 빠져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에게 두 개의 몸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는 랠프와 함께 강가를 걷는 동안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덮고 있는 지저분한 거품 같은 수증기 너머 푸르른 창공 저 높이 떠 있는 은빛 구체에만 몰두해 있는 것이었다. 

(…) 

이 행복감에는 아무 이유도 없음을 재확인했다. 자유롭지도 않았고, 혼자도 아니었고, 여전히 무수한 실에 묶여 땅에 매여 있었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집에 가까워질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에 없이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공기는 더 신선하고, 빛은 더 선명했으며, 무심한 듯 아닌 듯 손으로 내리쳐본 난간의 차가운 돌은 더 차고 딱딱했다. 데넘에 대한 짜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어떤 방향을 선택하든, 집으로 가든 달나라로 가든 분명 아무 방해도 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분이 그라는 존재 내지는 뭔가 그가 한 말 때문임을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p.382 <밤과 낮>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아카넷



인용한 장면 속 캐서린처럼 마법에 걸린 듯 순간 속에서 자기 존재가 또렷하게 살아나는 느낌은 모두가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친밀한 대상과의 만남이나 대화의 순간, 혹은 좋아하거나 편안하게 느끼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거나 본연에 가까운 내면의 소리에 다가가는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그런 찰나는 생에 대한 경이와 살아있음이 주는 순수한 충족감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런 순간에 대해 울프만큼 멋지게 묘사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소설 속 캐서린과 메리, 메리와 랠프, 캐서린과 랠프가 만나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우리에게도 그런 만남이 있었고, 어떤 찰나들을 통해 인생의 떨림을 느꼈던 기억을 더듬어보게 한다. 그건 단지 이성과의 만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식과 허위를 벗어던지고 진실하게 내면을 드러내고자 애썼던 순간, 각자가 지닌 그늘이 살며시 포개어짐을 느꼈던 찰나, 우리가 도달했던 순수한 즐거움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 동안 아직 남아있을 진실한 대화의 순간을 고대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온전한 고독 속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누군가와의 소통과 만남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기쁨을, 동시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자신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을 말이다.



"쓰다 지우다 하기를 무수히 거듭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비록 인간들은 상호 소통에 끔찍하게 서투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소통이 최상이리라는 가능성을 전하려 했다. 더구나 그들은 서로가 개인사와는 무관한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가령 법률이나 철학의 세계라든가, 좀 더 신기하게는 전날 저녁 그가 언뜻 엿보았던 것 같은 세계로 말이다. 그날 저녁 자기들은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창조하는 것만 같았었다. 어떤 이상을 – 현재 상황에 앞서 펼쳐보는 비전 같은 것을. 만일 그런 금빛 테두리가 떨어져 나간다면, 인생이 더 이상 환상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다면 (하지만 그것이 그저 환상이기만 하겠는가?) 끝까지 산다는 것은 너무나 삭막한 일이 될 것이었다."

p.618



자기 내면의 소리를 그대로 언어로 표현하는 일, 그걸 타인과 소통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의식 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진실되게 표현해낸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타인과의 진실한 소통이란 도달할 수 있는 일일까?



인물의 생각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 내면의 소리를 언어로 형성화하고자 하는 울프의 노력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갖게 한다. 울프가 빚어낸 생생한 문장들을 읽어가노라면 우리가 노력한다면 개개인이 각자 숨겨놓은 마음 속 종잇장들이 어떤 순간에는 밖으로 드러나 살며시 마주치거나 운 좋게 포개어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삶의 내밀한 부분,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부분으로 다가가 그걸 소통하려고 애쓰는 인물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노라면 그런 순간에만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살아 숨쉬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그녀가 어두운 붉은 불꽃과 그것을 휘감은 연기에 대해 열띤 어조로 말하자,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이라는 어둑하고 광막한 가운데로 문턱을 넘어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그 광막함 가운데서 그토록 크고 그토록 희미한 형체들이 움직이며, 어쩌다 섬광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가 또다시 어둠 속에 묻혀가는 것이었다." p.639~640



우리는 타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느꼈던 게 언제였던가? 그런 경험에서 까마득히 멀어졌다는 자각은 삶의 진실을 캐기 위한 시도에서 분리되었다는 안타까움으로 이어진다. 진실에 가닿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동떨어진 삶이 알맹이를 잃은 껍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 속에서는 완전한 자유에 익숙해져 있으면서, 왜 실제 행동에서는 항상 그렇게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걸까? 왜 생각과 행동 사이, 혼자 있을 때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사이에는, 이렇게 끊임없는 간극이, 이 어이없는 절벽이 있어야 하는 걸까? 절벽 한쪽에서는 영혼이 환한 대낮인 듯 활발해지는데, 다른 쪽에서는 밤처럼 어둡고 명상적이 되는 걸까?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 없이, 똑바로 고개를 들고 건너갈 수는 없는 걸까?"

p.430



소설을 읽노라면 마음이 통하는 이와 함께 걸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대화의 기쁨에 젖어들고 싶어진다. 때론 가없는 침묵에 잠기더라도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것에서 일종의 완전함을 경험하게 되는 일을 꿈꾸게 된다. 울프의 소설은 진실한 소통에 대한 열렬한 갈망, 혹은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처럼 다가온다. 환상일지라도 그 가능성을 믿고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의 누추한 삶에도 가느다란 빛줄기가 드리워질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때에야 비로소 빛이 들어오는 금빛 테두리가 우리 삶에 둘러져 있다. 환상일지라도, 그런 환상마저 없다면 긴 시간 쇠토의 길을 걷는 삶이 드리우는 환멸의 감각을 무엇으로 거둬낼 수 있겠는가. 이 빛에 대한 소망마저 없다면 삶이 건네는 소박하지만 놀랍기도 한 기쁨을 어디서 끌어올 수 있겠는가. 이 환상은 나이 지긋한 힐버리 부인(캐서린의 엄마)이 삶을 바라보는 초연하면서도 낭만적인 시선과도 맞닿아있다. 소설에서 마지막 순간 여성이 지닌 섬세한 통찰과 위엄을 가지고 어긋난 조각을 말끔히 끼워맞추는 사람이 또한 그녀이다.



"우린 자신의 환상을 믿어야 한단다."

(...) "그러지 않으면, 네 말처럼-" 그녀는 자신도 아주 모르지 않는 그 환멸의 심연을 전광석화 같은 눈길로 일별했다.

p.616


"인생이란" 하고 힐버리 부인은 분명 벽에 걸린 초상화들에서 영감을 얻은 듯 말을 꺼냈다. "기차를 놓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지. 그리고 또 이렇게 찾는..."

p.628



<밤과 낮>은 버지니아 울프의 다른 작품에 비해 독자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고 전통적 소설 기법을 답습했다는 이유로 저평가 된 작품이다. 하지만 <출항>에 이어 읽어본 <밤과 낮>은 전작에 비해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지니고 정돈된 톤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울프가 작가로서 기반을 갖추게 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출항>에서는 격렬한 감정의 기복이 느껴졌다면 <밤과 낮>은 한층 더 정제되어 일정한 깊이를 유지한다는 인상이다. 거기에는 (레너드 울프와 함께) 결혼이라는 관문을 넘어선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으로서 '자기만의 방'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독립된 삶에 대한 갈망을 구체화해가는 과정도 담겨있다. <밤과 낮>을 지배하는 색채는 <출항>의 울렁거림과 달리 차분하지만 그 속에서도 삶의 진실된 기쁨을 건져내고자 하는 울프의 노력은 변함이 없다. 일체의 관념과 허위에서 벗어나, 순간 순간 진실에 닿고자 했던 작가의 시선은 독자의 매마른 삶으로 넘어와 생기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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