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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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과 사, 정상과 광기에 대해 쓰고 싶다.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그것이 가장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p.104

"오랫동안 <시간들>(뒤에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바꾼다.)과 싸워 왔다. (...) 나는 스스로를 신선하게 하고 싶다. 둔하게 하고 싶지 않다." p.108

“내 등장인물들 뒤에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동굴을 파고 있는가에 대해. 그것들은 정확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다. 인간성, 유머, 깊이. 내 아이디어는 이 동굴을 연결해서 그것들 하나하나가 현재의 순간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p.109

“아직도 분명치 않은 것은 댈러웨이 부인의 성격이다. 너무 경직돼 있고, 너무 번쩍거리고, 너무 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댈러웨이 부인을 지탱하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을 등장시킬 수 있다. (…) 내가 터널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1년간의 모색이 필요했다. “ p.111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박희진 옮김, 솔 출판사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준비하는 하루를 중심으로 그녀와 주변 인물의 심리 변화를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서술한 소설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러한 글쓰기에 대해 ‘등장인물들 뒤에 아름다운 동굴’ 또는 ‘터널’을 만들었다고 일기에 썼다. 그녀는 인물의 과거와 심리를 깊숙히 파고듦으로서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터널(캐릭터 또는 인물의 성격)이 소설의 주축이 된다. 서사보다 인물의 성격이 버지니아 소설의 핵심이다. 이렇듯 새로운 방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글쓰기를 했다는 점에서 울프의 소설이 현대적이며 실험적이라는 평을 받는 게 아닐까.

 

울프는 자신과는 너무 다른 클라리사라는 인물을 좀 싫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기가 작가로서 품고 있는 느낌(한순간 세상을 뜻있는 형체로 반죽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클라리사에게 투영하고자 했다. 쿠션과 교양이라는 완충재로 가득한 클라리사의 응접실에서 삶의 더럽고 끔찍한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했다. 울프는 브레넌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과제를 정리해보았다.

“응접실의 사람들이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소설, 때로 머리털을 곤두서게 할 정도의 대화가 오가기도 하는 소설, 그런 응접실 대화가 전부인 소설, 그런 소설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p.105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드라 해리스, 김정아 옮김, 위즈덤하우스

 

<댈러웨이 부인>에는 클라리사가 파티를 준비하는 하루 중 옛 연인 피터 월시와 젊은 시절 사랑에 가까운 우정을 나눈 친구 샐리를 만나는 이야기가 하나의 축으로 전개되는 한편 퇴역 군인 셉티머스가 전쟁 후유증으로 환각(광기)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나란하게 놓여있다. 버지니아는 소설을 통해 “생과 사, 정상과 광기",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그것이 가장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클라리사와 피터 월시를 통해 '생과 사'에 대한 관조적 시선을, 클라리사와 셉티머스(셉티머스와 주변 인물-닥터 홈즈나 브래드쇼경)를 중심으로 '정상과 광기'에 대한 탐색을 엿볼 수 있다. 클라리사의 남편 리처드와 영국 상류층에 기생하는 보수적 인물 휴, 응접실에서 정치를 쥐고 흔드는 레이디 브루턴 등을 통해서는 당시 영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비판적으로 그려진다.

 

버지니아가 가장 깊고 넓게 '터널'을 파고 들어간 인물은 클라리사와 피터 월시다. 그들은 현재의 순간 속에서 지난 시간의 잔해를 끌어올리며 삶과 죽음, 젊음과 나이듦,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되새긴다. 삶이란 끝없이 흘러가는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듯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은 끝내 사라지거나 흩어져 버린다. 두 인물 모두 어떤 순간 삶의 공허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초로에 접어든 두 사람은 여전히 순간의 기쁨에 젖어 들고 삶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심각하고 진지한 문제에 골몰하다가도 일상의 사소한 일들-잡담이나 소일거리-로 한없이 가벼워진다. 무거움과 가벼움, 깊고 얕음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균형 감각이 우리 영혼의 진실이며 삶의 본질이라는 듯 말이다.

 

우리는 (그녀는 온종일 부어턴과 피터와 샐리를 생각했다) 늙어 갈 거야. 중요한 단 한가지, 그녀의 삶에서는 그 한 가지가 쓸데없는 일들에 둘러싸여 가려지고 흐려져서, 날마다 조금씩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녹아 사라져 갔다. 바로 그것을 그는 지킨 것이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은 그 중심이 왠지 자신들을 비켜가므로 점점 더 거기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느낀다. 가까웠던 것이 멀어지고, 황홀감은 시들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은 팔을 벌려 우리를 껴안는다.

p. 240

 

시계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자살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알린다. 한 점, 두 점, 석 점.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다. 저기! 노부인이 불을 껐다! 온 집이 어두워졌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하고 그녀는 되뇌었다. p.242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인생이란 젊음을 거쳐 나이 들어 가는 변화의 과정이다. 그 변화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 두려움과 죽음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로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가 등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게 각자의 방식으로 그걸 외면하거나 다른 감정으로 채워가며 삶을 살아간다. 그러는 사이 중요한 것들-순수함이나 진실, 어떤 신념이나 믿음-은 퇴색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중심’을 향해 끝없이 손을 뻗어보려 하는 사이 흘러가버리는 게 인생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그걸 잡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죽음에 다가설수록 결코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게 인생이라고, 소설은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젊을 때는, 하고 피터가 말했다. 너무 흥분해 있어서 사람들을 알지 못해요.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정확히는 쉰두 살인데(샐리는 몸은 쉰다섯이지만 마음은 스무 살 처녀 같다고 했다), 이제 좀 더 성숙해지고 보니, 하고 피터가 말을 이었다. 바라보고 이해하면서도 느끼는 힘은 줄지 않아요. 그래요, 정말 그래요. 샐리도 맞장구를 쳤다. 매년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열정적으로 느끼는걸요. 갈수록 더 그렇지요. 불행하게도. 그가 말했다. 하지만 기뻐해야지요-그의 경험으로는, 갈수록 더 그런 것 같았다. (…) 저기 엘리자베스가 있군요, 그가 말했다. 저 애는 우리가 느끼는 것의 절반도 느끼지 않아요. 아직은요. p.252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클라리사와 피터는 지나온 시간이 남긴 쓸쓸함 속에 젖어 들면서도 순간 순간 삶을 풍성하게 채우는 일상의 활력을 놓치지 않는다. 마치 삶과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게 나이듦이 가져다 주는 축복이라는 듯.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나이듦에 대한 찬가’가 아닌가 싶다. 클라리사와 피터는 자신들 앞에 펼쳐지는 삶의 무대를 여전히 생생하게 감각하고 사고하면서 기쁨에 젖어 들고 젊었을 때는 알지 못했던 의미를 풀어낸다. 그들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는 게 인생’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풍파와 신체적 변화를 겪으며 살아온 시간은 우리 안에 어떤 깊이를 만든다. 나이가 든다고 해도 젊을 때 만큼 느끼는 힘은 줄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바라보고(관조) 이해(지혜)’하는 힘이 덧대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열정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게 삶이라고 두 주인공은 말한다. 살아갈수록 깊이가 더해지는게 삶이라면,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쌓아가는 일이 아닐까.

 

소설을 쓸 당시 버지니아 자신이 삶에 대해 품은 감정 또한 그들과 비슷했던 것 같다. 40대 초반의 버지니아 울프는 작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며 출발선에 선 젊은이 같은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런던으로 이사하면서 도시의 활기에 사로잡혔다가도 다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겪게 되지만 귀족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와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사랑을 경험하기도 했다.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사나운 겨울의 횡포를.”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 4막 2장에 나오는 노래의 첫 구절

p.16

 

「더는 두려워 말라.」 클라리사는 읊조렸다.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레이디 브루턴이 자기를 빼고 리처드를 점심에 초대했다는 충격이 방금 그녀가 서 있던 순간을 전율케 했다. 마치 강바닥의 식물이 지나가는 노의 충격을 받고 떨리는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동요했고, 그렇게 전율했다.

p.42~43

 

그는 맑은 금빛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은 놀라운 감수성으로 장미꽃과 벽지 위에 어룽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는 나무들이 아피리들을 대기의 심연에 던진 그물처럼 펼쳐 놓고 있었다. 물소리는 방 안까지 들렸고, 물결을 타고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모든 권능이 그의 머리 위에 그 재보들을 쏟아 놓았고, 그의 손은 거기 소파 등받이에 걸쳐져 있었다. 헤엄치며 떠다니던 때, 멀리 해안에서는 개들이 짖는 소리, 멀리서 짖는 소리가 들려오던 때, 파도 꼭대기에 있던 손처럼. 더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몸속의 마음이 말한다. 더는 두려워하지 마라. p.183

 

그녀는 왠지 그와-자살을 한 청년과-아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이,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린 것이 기뻤다. p.243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클라리사는 브래드쇼 부부를 통해 한 청년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그는 퇴역 군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로 전쟁 후유증으로 신경 쇠약을 앓다 난간으로 뛰어내리고 만다. 클라리사는 자신의 파티에 들어온 죽음의 흔적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셉티머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파티를 준비하며 삶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그녀 또한 무심코 스쳐가는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양면적 내면은 인간의 본질적인 두려움(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히기도 하고 신경 쇠약(조울증)을 겪었던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내면에 대한 반영으로도 보여진다.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직접 마주치지 않는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는 하나의 대사로 묶여 있다. 「더는 두려워 말라.」 셰익스피어의 극에 나오는 이 대사를 두 인물이 각자의 자리에서 의미심장하게 읊조린다. 이는 무관하게 동떨어져 존재하는 두 인물이 내적으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듯 하다. 두 인물의 이야기가 나란히 놓여 있는 구성에 대해 알렉산드라 해리스는 두 패널을 맞붙인 ‘두 폭화’같다고 표현했다. “두 그림을 잇는 경첩 같은 것은 없지만 두 그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는 소설의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p.117,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40대 초반의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주인공이 되었다는 느낌과 겉돌고 있다는 느낌, 기운이 넘친다는 느낌과 당장이라도 병에 걸릴 수 있다는 느낌이 공존하고 있었다. (...) 울프는 자기 자신의 여러 버전을 함께 받아들이면서 그런 차이들을 <댈러웨이 부인>의 틀로 삼았다. <댈러웨이 부인>의 구조는 울프가 그때껏 썼던 글을 통틀어서 가장 독창적인 구조라는 것을 울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서로 어울리기 힘든 이질적인 요소들을 나란히 전개할 수 있는 구조였다.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자신의 하루를 살아가면서 자기의 파티를 열고, 퇴역군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는 같은 날 런던에서 참호의 환각에 시달린다.

울프는 셉티머스라는 인물을 상상하면서 자신이 병을 앓던 때의 경험을 되살려내고 있다. (…) 1924년 10월, 울프는 건강한 몸으로 <댈러웨이 부인>을 끝내는 쾌거를 올렸다. 병을 글로 옮겨냄으로써 병을 이겨낸 경우였다. p.116~117

 

<댈러웨이 부인>은 두 패널을 맞붙인 두폭화라고 할까, 두 그림을 잇는 경첩 같은 것은 없지만 두 그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클라리사와 셉티머스는 소설의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p.117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드라 해리스, 김정아 옮김, 위즈덤하우스

 

클라리사는 순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삶으로 뛰어든 인물인 반면, 셉티머스는 비정상적인 광기에 사로잡혀 죽음으로 뛰어든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은 인간적 이해없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의사들이다. 그들은 의학적 기준과 권위를 바탕으로 세상과 셉티머스를 분리시키고 '전향'을 강요하며 그의 영혼을 강압한다. 이에 대한 도전으로서 셉티머스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가 죽음으로 '중요한 단 한가지'를 지켜냈다면 클라리사는 거기 살아남아 의지대로 파티를 꾸려내면서 삶의 기쁨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지켜낸다. 클라리사가 창문으로 맞은편 집 노부인을 지켜보는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엄숙함 속에는 삶을 살아낸 자, 그 순수한 존재감에 대한 존경심이 어려있다. "거기 클라리사가 와 있었다." (p.253) 살아남은 자, 생으로 뛰어들어 삶의 기쁨을 누리고 영혼의 자유를 지켜낸 클라리사가 거기 있다. 자신의 병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소설을 완성한 버지니아 울프 처럼.

 

「나도 갈게요.」 피터는 말했지만, 잠시 더 앉아 있었다. 이 두려움은 뭐지? 이 황홀감은? 그는 생각했다. 나를 이토록 흥분으로 채우는 이건 대체 뭐지? p.253

 

양면적이고 때론 모순적이기까지 한 감정이 하나의 존재 안에 공존한다는 것은 클라리사와 피터 월시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파티의 공허함을 깨달으면서도 파티를 지속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클라리사, 파티장을 떠나면서 두려움과 황홀감을 동시에 느끼는 피터를 통해 우리 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혼재되어 존재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 마음껏 세상과 삶을 누리는 방식이 아닐까.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순간 속에 깃든 삶의 기쁨과 인간 영혼의 자유로움에 대해 말하려 했다. 이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서술한 소설의 기법을 따라 인물의 모호한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빚어낸 울프의 노력으로 빛을 발한다. ‘자기가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을 강조한 소설 속 대사는 작가 스스로 방점을 찍었던 작업을 대변하는 듯 하다. 찰나에 스치듯 우리를 지나갔던 무수한 감정들이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지어진 섬세한 옷을 입고 책장 마다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존재 자체의 기쁨을 줍는 일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녀는 각자 자신이 느끼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말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똑똑해 봤자 별 소용이 없었다. 그저 자기가 느끼는 것을 말해야 했다. p.250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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