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이주혜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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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헌법 불합치 결정으로 폐지된 낙태죄가 대체할 법안을 마련하지 못해 표류하고 있다.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과 재생산권, 건강권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강화된 ‘희생적 어머니’의 이미지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을 육아와 가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다양한 채널로 포르노가 소비되면서 여성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여성혐오와 성폭력의 위험은 증가했다. 혐오는 여성을 넘어, 인종, 종교, 성소수자 등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다. ‘여성에게 몸은 너무도 큰 문제’라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1976년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의식이 깨어난다는 것은 국경을 건너가는 것과 같지 않다. 한 발 내디디면 다른 나라에 도달하는 그런 일이 아니”(p.48)라고 말했다. 미국 시인이자 페미니즘 사상가로 모든 차별에 맞섰던 에이드리언 리치의 산문집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를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유대인 병리학자였던 아버지 아널드 리치와 남부 상류층 기독교인이며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헬렌 리치의 맏딸로 태어났다. 1951년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시집 <세상 바꾸기>로 ‘예일젊은시인상’을 받았다. 미래가 촉망받는 작가로 주목받았지만 1953년 결혼과 함께 세 명의 아들을 낳아 키우며 어머니, 아내로서의 전통적 역할과 시인이라는 자아 사이 분열을 겪으며 고통 받았다. 에이드리언은 1960년대 여성운동을 통해 가부장제의 실체를 깨닫고 레즈비언 정체성 탐구에 몰두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후 여성, 레즈비언,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종교와 인종, 동성애 등 모든 차별적 시선에 저항하며 목소리를 냈다. 저서로는 <공통 언어를 향한 꿈> <문턱 너머 저편> 등 20여편의 시집과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해여: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 <가능성의 예술> 등 6권의 산문집이 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주요 에세이를 엮은 산문집이다. ‘개인적’이고 ‘고백적’인 산문은 자기 성찰에 대한 은유를 담은 시와 시인의 실천가적 삶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다. 시인 스스로도 자신이 쓴 산문과 시 사이에 분명한 교차점이 있다고 말했고 이 책의 서문을 쓴 샌드라 M. 길버트(문학평론가)도 에이드리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책에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 <피, 빵 그리고 시>, <가능성의 예술> 등 여러 편의 글이 연도순으로 실려 있다. 일련의 글을 통해 시인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글쓰기와 사회 운동으로 확장 시켜 간 과정을 더듬어볼 수 있다.

 

 

 

 

 

“다시 보기는 되돌아보는 행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행위, 새롭게 비판적인 방향에서 오래된 텍스트를 접하는 행위를 말하며, 여성에게는 단지 문화 역사의 한 챕터 이상을 의미하는 생존 행위이다.” (p.26)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와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경험과 제도로서의 모성>는 여성이자 모성으로 삶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강렬하게 다가갈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에서 에이드리언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지적한다. 남성의 언어로 쓰여진 역사와 문학에는 극단적인 여성의 이미지(어머니 또는 마녀)만 존재할 뿐 제대로 된 여성상이 부재했다.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현실을 재정의하고 불균형을 깨는 일에 시인의 역할이 있음을, 가부장제의 파괴적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돌리는데 여성의 일이 존재함을 강조한다.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에서 에이드리언은 ‘모성’을 다양한 사회와 정치 체제의 핵심으로 보고 남성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제도로서의 모성’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여성의 몸과 정신을 희생적이고 보수적인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에 가두는데 복무했다.

 

 

 

“나는 이 책 전반에서 모성의 두가지 의미를 구분하고자 한다. 한 가지 의미가 다른 한 가지 의미 위에 덧붙여진 것으로, 하나는 여성의 재생산 능력과 아이들에 대한 잠재적 관계로서의 모성이고, 또 하나는 그 잠재성-그리고 모든 여성-을 남성의 통제 아래 확보하는 것이 목표인 제도로서의 모성이다. 바로 이 제도가 다양한 사회와 정치 체제의 핵심이었다. 제도로서의 모성은 인류의 반 이상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없게 했고, 남자들을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 됨으로부터 면제해주었다. 이 제도는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분리하는 위험한 짓도 저질렀다. 또 인간의 선택과 잠재력을 화석화했다. 이 제도가 빚어낸 가장 기본적이고 당황스러운 모순은 우리 여성들을 우리 몸 안에 가둠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우리 몸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이다.” (p.130)

 

 

 

 

 

 

시인의 정체성 탐구는 여성과 모성을 넘어 이성애주의와 인종, 종교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역사적 학문적으로 지워져 왔던 레즈비언 존재와 미국 사회의 동화 정책으로 억압받은 유대인 전통을 살펴본다. <뿌리에서 갈라지다>에는 모성과 여성, 레즈비언이면서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자기 정체성 이해를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 시인은 백인과 기독교라는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감추어야 했던 유대인 혈통을 되짚어보며 편견과 차별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삶 깊숙이 침투한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 이성애중심주의가 자신의 삶에 만든 빈 칸을 직시한다.

 

 

 

"이 글에도 결론이 없다. 내게는 또 다른 시작이다. (…) 남은 생애 동안, 다음 반세기 동안, 내 정체성의 모든 면이 전부 개입되어야 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정체성들 말이다. 특권을 얻고 싶으면 복종을 바치라고 배운 백인 중산층 여자아이. 이성애자 기독교인으로 길러진 유대인 레즈비언. 흑인 인권투쟁을 통해 처음으로 억압이 호명되고 분석되는 것을 들었던 여성. 남성 폭력을 증오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세 아들을 둔 여성.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여성. 피 흘리는 사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멈춘 여성. 아름다운 언어도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억압자의 언어가 때로는 아름답게 들릴 수 있음을 아는 시인. 저항의 일부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는 여성." (p.317)

 

 

 

 

 

 

에이드리언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를 언어로 바꾸는 일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는 것은 “젠더, 인종, 계급, 성적 지향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인식하고 분석하고 아는 것부터 시작”(p.473)된다고 그는 말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현실을 자신의 언어로 이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언어의 장악은 주체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거기서 변화의 힘이 발생한다. 해방을 위한 실천은 언어의 장악, 주체의 변화라는 역학 속에서 존재해왔다. 시인의 작업이란 존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 말할 수 없어 생각할 수 없는 것 까지를 언어로 표현해내는 일이다. 시는 “현실 속의 보이지 않는 구멍을 통해 길을 낸다.”(p.470) 에이드리언에게 시쓰기는 해방을 위해 현실에 길을 내는 작업이었다.

 

 

 

정체성(성, 인종, 종교, 계급 등)이야말로 정치의 핵심이라고 인식한 시인에게 ‘개인적인 것과 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하나였다. 자신을 향해 던졌던 질문은 사회 정치 문제로 나아간다. 시인은 “어떤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침묵이 깨지고 있는가?”(p.470)에 주목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정치로 확장하고 시를 근본으로 하는 언어의 힘을 알기에 사회 변혁을 위한 작가의 역할을 고민한다. <나는 왜 국가예술훈장을 거부하는가>를 통해 자본의 논리로 차별을 일삼고 예술을 탄압하는 정부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가능성의 예술>에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특히 미국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점을 비판한다.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해 상상력 있는 질문을 만드는데 작가의 역할이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메시지를 전했던 운동가적 면모를 강조하다 보면 에이드리언의 시적 예술성을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낄 만큼 뛰어난 ‘미적 기교’를 갖춘 시인이다. 정제된 언어 감각은 산문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시인이 언어에 쏟은 노력과 시를 향해 품은 애정은 독자에게 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이는 에밀리 디킨슨, 엘리자베스 비숍, 월리스 스티븐스, 뮤리엘 루카이저 등 몇몇 시인에 대한 탁월한 비평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다. 그는 시 비평에서도 단순히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머물지 않고 작가의 삶 전반을 통해 폭넓게 시의 의미를 길어 올린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역사의 한 토막을 통과하며, 그 안에서 살고 그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써야 한다. 수많은 다른 사람과 함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

(…)

우리 작가와 지식인은 이름을 지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있고, 묘사할 수 있고, 증언할 수 있다. 기교나 뉘앙스, 아름다움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거들 것이다." (p.490)

 

 

 

에이드리언 리치의 삶과 글쓰기에 있어 키워드는 정체성과 언어(시)다. 정체성 탐구는 자신과 사회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변화의 목소리를 발화 시키는 힘이 되었다. 특권을 지닌 토큰 여성으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레즈비언이자 유대인이라는 외부자의 신분을 명확히 드러냈다. 시인은 내밀한 고백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언어를 벼르고 깎았을 것이다. 그가 낸 용기는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끌어내고, 고통 속에 빚어낸 언어는 날카롭게 빛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을 품은 이들과 소수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에게 에이드리언 리치의 존재는 ‘길잡이 실(서로에게서 빛을 찾게 하는 실)’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라는 시인의 질문이 우리 앞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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