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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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려는 것은 가난 그 자체이다. 나는 이 빈민가에서 처음으로 가난을 만났다. 지저분하고 괴이한 삶으로 이루어진 이 빈민가는 처음에는 가난의 실제 교육 현장이 되어주었고 다음에는 내 경험의 배경이 되었다.

132-133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조지 오웰의 소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에는 춥고 더럽고 배고픔이 난무하는 파리와 런던 바닥 인생의 삶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은 작가가 5년에 걸친 식민지 버마에서의 경찰 생활을 접고 돌아와 속죄의 의미로 선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제국주의 통치자의 일원이 되어 버마의 원주민을 착취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 하층민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다. 스스로 ‘백인 원주민’이 되어 가난과 자본주의의 실태와 허상을 대면한 것이다.

조지 오웰은 하층민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노동과 간이 숙소와 구호소 등에서 목격한 가난의 누추한 낯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를 통해 가난에 대해 통찰하고 가난을 양산하는 사회 제도를 비판한다. 굶주림은 영혼을 좀 먹는다. 가난은 생각을 죽이고 미래를 없앤다. 인간은 가난 속에서 당장의 먹고 자는 문제에만 골몰하느라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게 된다. 인간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채 돈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빈민 구호소는 연이어 머물 수 없게 제도화 되어 있어 떠돌이는 다음 숙소를 향해 매일 떠돌 수 밖에 없다. 배고픔 속에 떠도는 일상에서 그들은 구제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지고 ‘떠돌이’의 삶은 악순환된다. 그렇기에 구호소 등을 통해 적절한 의식주를 제공해주고 (질 나쁜 빵과 차로 간신히 허기를 떼우는 정도의 식사가 아니라) 안정된 생활의 발판과 자활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또한 그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했던 경험을 토대로 ‘떠돌이’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허상이라는 것을 꼬집는다. 사람들이 떠도는 것은 부자들이 이야기하듯 즐기기 위해서 혹은 유목민적 성향을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굶어죽는 것을 면하기 위해' 그들은 떠돌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구걸하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기 때문에 경멸받아야 마땅한 기생충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서 ‘부자가 될 수 없는 장사’를 택한 실패한 노동자일 뿐이었다. 그들을 향해 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는 교육과 부를 가진 자들에 의해 주입되고 강화된 것이었다.

 

 

가난에 다가가면서 가난으로 인한 어떤 발견을 했기때문이다. 권태라든가 비열할 정도로 쩨쩨한 것, 굶주림의 시초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더불어 가난이 지닌 커다란 장점, 즉 가난은 미래를 말살해버린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

가난에 큰 위안이 되는 또 하나의 감정이 있다. 찢어지게 극심한 가난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런 감정을 체험했으리라 믿는다. 자신이 마침내 진정 밑바닥까지 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안도감, 아니 거의 쾌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148-149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그것은 그들이 적절한 생계비를 벌지 못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일이 유용한지 무용한지, 생산적인 것인지 기생적인 것인지에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이익을 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 돈이 미덕을 가늠하는 위대한 척도가 되었다. 거지는 이 척도에 맞지 않기 때문에 멸시당하는 것이다. (…) 거지란 현실적으로 보면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근로자이다. 그네들은 대부분의 현대인들과는 달리 명예를 팔지 않는다. 그저 부자가 될 수 없는 장사를 택하는 실수를 범했을 뿐이다.

354-355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소설 속 파리와 런던이라는 대도시의 화려한 조명 너머엔 비참한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극빈층 사람들이 있다. 사회라는 울타리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음에도 그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몰고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극도의 굶주림을 모면할 정도의 음식과 간신히 몸을 누일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의 보호소만 제공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고 사회에서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근본적 지원은 없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절대 넘을 수는 없는 선이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선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먹고 자는 기본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인간 이하의 취급에 내몰리는 것이다. 간이 숙소나 구호소에서 그들이 받는 처우는 감옥에서의 것과 비슷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존엄은 박탈당한다.

‘떠돌이’나 ‘노숙자’, ‘극빈자’라는 단어가 가진 허상과 그릇된 이미지에 대해서도 소설은 비판한다. 교육과 사회적 통념으로 강화된 부정적 이미지가 이들 단어를 맴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이 바닥 생활에서 마주했던 군상들은 사회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면면의 사람들이었다. 그는 ‘게으르거나 방탕하다’, 혹은 ‘포악하거나 위험하다’는 이미지는 교육에 의해 주입된 허상이라 주장한다. 천성적으로 너그러운 '패디'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했던 '보조', 빌린 담배 꽁초를 갚으며 기분좋은 웃음을 짓던 스코티등을 통해 보통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적 면모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들은 개별의 성격과 취향을 갖춘 누구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현 시대 빈민층이나 노숙자 등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그는 떠돌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비열하고 질투심 많은 데다 자칼같이 간교한-의 소유자였다. (…) 그 따위 너절한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으니 마침내 육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영혼까지 저절로 타락해버렸던 것이다. 그의 인간성을 파괴한 것은 타고난 악덕이 아니라 바로 영양실조였다.

326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극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다. 조지 오웰이 '떠돌이'를 양산하는 당시 영국의 제도와 인간다운 처우를 제공하지 않는 구호소의 행태, 자선의 태도로 국한된 편협한 시선을 비판했듯, 가난에 대한 현대 사회의 복지 제도에도 그런 맹점은 남아 있다.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추는 것은 인간다운 생활이 전제 될 때 가능하다. 생계의 문제가 곧 인간다운 삶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극도의 가난을 사회적으로 방지하고 인간적인 삶을 기본으로 삼는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모두가 동감할 수 있길 바란다. 우선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나 태도에 사회적으로 조장된 편견이 머물고 있지 않은지 조심스레 되짚어 봐야겠다.

조지 오웰은 식민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통치에 기여했던 과거에 대한 속죄와 원주민에 대한 죄의식을 씻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바닥으로 '내려감'을 선택했다. 그 체험을 장편서사로 풀어낸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오웰의 삶과 사상 그리고 글쓰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책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가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함으로써 가난을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실제 체험에 버금가는 경험으로 오웰이 느낀 죄의식을 전염시킨다. 죄의식은 우리의 도덕성을 각성시킨다. 이것이 시작이다.

 

 

나는 접시닦이, 떠돌이, 노숙자의 영혼 속에 정말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본 것은 가난의 표피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결핍 가운데 지내며 한두 가지 배운 점은 있다. 이제 나는 다시는 모든 부랑아들이 술에 절어 사는 막된 놈들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던져주는 1페니에 쩔쩔매며 고마워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으며, 실직한 사람이 무기력증에 빠져도 놀라지 않고, 다시는 구세군에 도움을 청하지도, 내 옷을 저당 잡히지도,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고급식당에서 식사를 즐기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다.

409쪽,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조지오웰,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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