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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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다양한 글쓰기와 영화작업을 아우르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이다. 절제된 언어로 섬세하고 함축적으로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표현하는 그의 작품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삶에 대한 권태’와 ‘기다림 또는 부재감’을 그려낸다.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이 무더운 여름의 말미에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 프랑스판 부부의 세계라는 광고 문구처럼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친구와 낯선 남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담고 있다.

 

 

 

별장 몇 미터 앞 너르게 흐르는 은빛 강물이, 저 멀리 뽀얀 안개 속에 너울너울 펼쳐진 잿빛 바다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이라면 강이었고, 동네 자체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그들이 이곳으로 휴가를 온 이유는 순전히 이곳을 좋아하는 루디 때문이었다. 유서 깊은 서구 바닷가의 작은 마을, 가장 폐쇄적이고 가장 무더우며 얼마 전까지도 세계 대전에 휩쓸렸던, 역사의 풍파가 끊이지 않았던 곳.

아닌 게 아니라 이레 전, 정확히는 이레 반 전에, 루디의 별장 뒷산에서 지뢰가 터져 한 청년이 폭사했다.

16쪽,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마르그리트 뒤라스, 장소미 옮김, 녹색광선

 

 

사라와 자크 부부는 친구들과 함께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로 여름 휴가 여행을 왔다. 친구 루디와 지나는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이라는 듯 얼굴만 마주치면 싸워 대지만 처음 보는 사람도 그 둘이 영원한 한 쌍이라고 느낄 정도로 친밀감을 과시하는 부부다. 지적인 다이아나는 싱글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데 그녀와 자크는 오랜 친구다. 네 살 짜리 아들을 둔 사라와 자크는 큰 불화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권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인 관계처럼 보인다. 더위가 극심해 광장에 단 하나 남아 있던 플라타너스 나무마저 시들어버렸다. 휴가에 대한 기대는 더위와 함께 한풀 꺾여버렸고, 익숙한 관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필요한 시점. 사랑과 삶에 권태를 느끼는 여주인공 사라는 비가 내리길 기다리며 낯선 남자와 은밀한 시선을 주고 받는다.

 

이야기는 세 가지 사건으로 시작된다. 사라는 남편 자크와의 말다툼 끝에 친구 루디가 자신에 대해 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마을을 둘러싼 산에서는 지뢰가 폭발하는 바람에 한 젊은이가 죽었고, 그의 시신을 주워 모은 늙은 부모는 사망신고서에 사인하기를 거부한채 산에 머물고 있다. 때마침 해변에는 멋진 보트를 탄 낯선 남자가 등장해 사라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낸다. 밤에도 식지 않는 더위로 늘어진 시간 속에 당장의 변화는 없다. 느즈막히 일어나 밥을 먹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낮잠을 자고 다시 물에 들어 갔다 와 저녁을 먹고 공놀이를 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뒤라스 특유의 나른하고 차분한 문장들이 지속된다. 그러면서도 사라와 루디 사이에 쳐진 장막과 사라와 장과의 관계, 노파의 거취 등이 묘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나도 우리가 어느 선에선, 그러니까 잘못 표현하거나 거짓으로 말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선에선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 이전도, 이후도 아닌 딱 그 경계에서. 하지만 그래도 난 기를 쓰고 침묵을 고수하는 사람들보다 그 경계에 부딪쳐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 경계를 허물고 표현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더 좋아.(…)

“어쩌면 말보단 다른 걸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말과 똑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우리를 똑같이 홀가분하게 해 주는 다른 거.”

138-139쪽

 

 

 

다섯 명의 친구와 남자까지 더해 여섯의 대화는 이야기의 큰 흐름을 만든다. ‘공통적으로 엄격한 분야가 있는데 그게 언어’라고 할 정도로 이들은 말과 대화를 중시한다. 질문하고 답하고, 말하면서 서로를 확인하고 관계의 의미를 되짚는다. 그 속에는 말이 아닌 것,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말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실험도 존재한다. 침묵과 시선이다. 자크를 바라보는 사라, 남자가 사라를 바라보는 시선 등 ‘바라봄’을 통해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렇다. 그들은 모두가 불편하게 여기는 노파에게 점심을 가져다 주고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행위야 말로 ‘사망신고서에 사인하라’는 말 이상의 효과로 사람들을 ‘홀가분하게’ 해준다. ‘어쨌든 인생의 경험 중에 다른 경험보다 더 중대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야’, ‘우리 시대가 아무리 끔찍해 보인다 해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거였어’와 같은 루디의 말과 연결되어 그들의 대화와 행동은 의미를 더한다.

 

소설 속에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진다. 사라의 아들에 대한 지극한 모성애와 죽은 아들에 대한 노파의 사랑, 루디와 지나, 자크와 사라, 그리고 식료품상 등을 통해 보여지는 부부라는 지속된 관계 속의 사랑 그리고 사라와 장 사이에서 타오르는 순간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동일한 단어가 쓰이지만 대상과 관계에 따라 그 속성은 다양해진다. 이성간의 사랑일지라도 각각이 가진 사랑의 의미와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루디와 지나처럼 서로 적대적이지만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반면, 식료품상처럼 사랑하게 되면서 떠나고 싶어지는 관계도 있는 것이다.

 

 

 

 

어부가 사라에게 원숭이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던 하구의 늪지, 그 잿빛 강에서 그와 똑같이 완벽하고 침착하게 그물을 던졌던 다른 어부들을 상기시켰다. 정신을 조금만 집중해도, 바람에 잎이 떨어진 야자수의 신음과 바다의 포효가 뒤겄이고 거기에 맹그로브 나무들 사이를 뒤놀던 원숭이들의 깍깍거림까지 가세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들은 사라와 오빠, 그렇게 둘이었고, 조각배를 타고서 쇠오리를 사냥했더랬다. 이젠 오빠는 죽고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사라는 삶의 그런 원리에 익숙해졌다고 믿었고 그 범주 안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79쪽

 

 

 

 

 

여름 휴가는 무더위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지지부진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지나와 루디는 매번 반복되는 다툼 속에서 사랑을 확인하며 권태에 빠져드는 것을 거부한다. 친구들은 익숙한 관계가 휴가를 망친다고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지지하겠다는 믿음을 확인한다. 사라는 장과의 만남으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욕망이 살아나지만 잠시 뿐이었다. 사라와 장, 자크 세 사람 사이를 오갔던 긴장감은 사망신고서를 거부하는 노파의 슬픔과 쌍을 이루며 이어졌다. 하지만 사라의 욕망은 사그라들고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던 노파의 고집도 거두어 진다. 끝내 모든 긴장이 잦아든다. 시간이 지나면 격렬했던 감정은 고요해지고 자연스럽게 흘러 제자리를 찾는다. 삶이란 어쩔 수 없는 상실을 거치게 마련이고 그걸 받아 들이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욕망과 권태, 죽음에 대한 슬픔, 이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게 인간의 삶이고 그 속에서 내밀한 욕구는 결코 온전히 충족될 수 없다. 하지만 그 모순을 끌어 안고서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삶에서 사랑이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어야 하고.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는 강물을 마주한 채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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