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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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망원경으로 천체 관측을 했던 경험이 있다.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밤 하늘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점 하나. 눈으로는 그렇게 보이던 별이 망원경 속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붉은 빛을 띤 구가 희뿌연 안개 같은 막에 뒤덮여 있었다. 하얗거나 연한 노란빛의 점으로 보이던 것이 붉거나 푸르다는 걸 알게 된다. 운이 좋으면 표면에 있는 무늬나 분화구 같은 것까지 발견할 수 있다. 작은 렌즈 안에서 보이는 별의 모습은 눈으로 보는 것과 전혀 달랐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다시 렌즈 속을 들여 다 보길 몇 번 반복했다. 두 이미지가 가지는 차이의 간극은 너무도 극명했기에. 세계에는 특수한 장치를 통해서만 들여다볼 수 있는 진실과 아름다움이 있다.

익숙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현실은 엇비슷하게 읽힌다. 다른 렌즈를 통해 바라볼 때 비로소 새로운 해석과 의미가 가능해지는 일이 있다. SF,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르 귄의 소설이 그렇다. 르 귄에게 SF는 특수 장치 같은 것이다. 4D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특수 안경이 필요하듯 르 귄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에는 SF라는 독특한 장치가 필요하다. 인류학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일찍 다양한 문화와 세계의 사람들을 경험했고 상상 너머의 생활을 일상처럼 공유했다. 그런 그가 그려내는 세상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세상과 차원이 달라도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바람의 열두 방향>>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그의 세계에는 열두 방향, 혹은 그 이상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곳은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열린 문은 바로 SF라는 장르로 통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자 세상은 오히려 작아졌다. 집과 가족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시한 어른이 되어 버렸다. 르 귄의 소설을 읽는 동안 다시 어려진 것 같았다. 천체 관측을 하며 우주에 대한 꿈을 꾸던 시절로, 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던 때로, 오멜라스를 떠나 혼자 걸어갈 수 있는 무모함으로 가득했던 시절로. 세계는 나이가 든다고 확장되는게 아니었다. 가만히 있는 사이 세계는 지속적으로 축소했다. 어른의 세상은 자주 가능과 불가능으로 나뉘었고 대부분 가능의 세계가 선택되었다.

불가능의 세계를 가능의 세계로 옮겨온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르 귄의 소설 속에는 불가능을 열망하는 과학자들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 된 세상이 등장한다. 그에게는 다양성을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예측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때로 작가의 무의식에서 발원하여 내재적 잠재력을 가지고 은유라는 실타래로 풀려나왔다. 또 하나의 과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자의 발견은 대개 은유적 착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르 귄이 그려낸 세상이야말로 과학자의 은유적 착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외부 생명체의 감정을 감지할 수 있는 인간의 등장, 다른 윤리적 관점을 지닌 양성인의 출현, 외계 세계와의 교류와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동. 과학자와 차이가 있다면 르 귄은 은유라는 장치를 빌어 특정 메시지에 더 힘을 싣는다. 한정된 무대로 옮겨진 세계는 일면 좁지만 깊이가 있다. 현실에서의 복잡한 관계와 층위는 들어내고 작가가 강조하려는 세상이 단순하게 그려진다. 그 속에서 메시지는 더욱 강력해진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서 그리는 타인에 대한 감정 이입과 공포라는 문제는 바로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발로 혼란을 겪는 세계를 암시하는 듯 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세워진 낙원국가는 공익을 중시하는 현대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소수의 인권 문제를 겨냥한 듯하다. SF이자 판타지 문학인 르 귄의 소설에는 분명 미래의 세계 혹은 미지의 세상이 담겨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현 시대가 끌어안고 있는 민감한 문제와 불가피하게 맞닿는다. 새로운 세상, 판타지의 세상으로 옮아가면서 더 예민하고 밀도있게 다루어진다.

어떤 표현과 그것이 묘사하는 것 사이에 표면적 괴리가 클수록 은유적 긴장도가 높다고 한다. 사고의 추상화 레벨이 높아질수록 은유적 프로세스가 많이 개입된다고 문병로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말했다. 은유적 긴장도가 높아질수록 은유의 힘은 강력해지고 그 프로세스가 복잡해질수록 사고는 어려워진다. 소설의 세계는 현실에 있을 것 같은 가상 세계라고 배웠다. 하지만 르 귄은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은유에 은유를 더해 복잡성을 쌓아가는 세계는 무엇보다 강력한 은유적 프로세스를 탑재하고 있다. 르 귄의 이야기는 미지의 별들이 촘촘히 쌓여 유유히 빛나는 은유의 은하수였다.

작아진 나의 세계에 구멍 하나를 뚫은 기분이다. 그런 기분으로 은유의 은하수를 지나는 탐사선에 올라탔다. 하지만 조심스레 묻게 된다. 그 중 제대로 본 별은 몇 개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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