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 - 밀고자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승영조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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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기에 빠져들게 된 경험은 탐정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동사무소 앞으로 오는 이동 도서관이 있었다. 거기서 일러스트레이션이 눈길을 끄는 책이 있어 집어 들었는데 탐정 소설이었다. 우연히 읽은 소설이 재미있어서 한 동안 그 시리즈만 찾아 빌려보았다. 다음은 자연스럽게 애거서 크리스티였다. 정말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갑작스레 일어난 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져들지라도 주인공은 기어코 단서를 찾아내 하나씩 끼워 맞춰 나갔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의 뒤를 쫓고,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하게 뒤엉키기도 했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날 결말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긴장감은 고조되어 숨이 막히고 덮어놓은 책장에서 범인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호기심은 강렬하게 타올랐다.

 

 오랜만에 잊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을 다시 맛보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밀고자> 덕분이다. 탐정(필립 말로)의 눈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인물마다의 하나하나 동작, 순간의 분위기를 조밀하게 포착한다. 미세한 구멍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묘사는 더없이 촘촘하다. 특히 인물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읽는 사이 필립 말로, 루 하거와 글렌, 카날레스와 프랭크 등 주요 인물의 프로필이 머리 속에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룰렛 테이블 끝 쪽에 있는 문이 열리고, 아주 호리호리하고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곧고 윤기 없는 검은 머리에 널따랗고 앙상한 이마,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의 남자였다. 성긴 콧수염은 3센티미터는 됨직한 길이로 입가까지 늘어지고, 양 모서리가 거의 직각으로 다듬어져 있어서, 마치 중국인 같은 인상을 풍겼다. 두툼한 피부가 창백하게 번들거렸다.

그가 슬그머니 딜러 뒤로 가서 중앙 테이블 모서리에 선 채 빨강 머리 여자를 힐끔 바라보고는, 두 손가락으로 콧수염 끝을 만지작거렸다. 손톱 끝이 주홍빛이었다.


<밀고자>중에서,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챈들러는 탐정소설을 문학의 경지에 올려놓았다는 찬사를 받는 작가이다. 1930~40년대 전쟁 전후 미국 사회의 복잡하고 어두운 풍경을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 녹아내었다. 아래와 같은 문단을 읽다보면 그 찬사의 이유를 알게 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흰색 이중문을 지나 조명이 흐릿한 로비로 나가서, 모자와 외투를 찾아 걸쳤다. 그리고 또 다른 이중문을 지나, 지붕 가장자리에 뇌문이 새겨진 널따란 베란다로 나갔다. 대기에 바다 안개가 끼고, 집 앞에 바람막이로 세운 사이프러스 나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살짝 경사진 지면이 멀리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안개 뒤에는 바다가 숨어 있었다.

<밀고자>중에서

 


 그 뒤로 이어졌던 가격 씬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담배 끝의 빨간 불빛이 서서히 화면을 가득 채우고 가볍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흩어진다. 뒤이어 암전. 아마도 많은 감독이 그의 작품을 영화로 찍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내 앞의 남자가 움직이며 왼손을 얼굴 위로 올렸다. 그가 둥그렇게 모아 쥔 손 안으로 담배를 빨자 빨간 불빛이 잠깐 그의 둔중한 턱과 넓고 검은 콧구멍과 각이 진 공격적인 코를 비추었다. 싸움꾼의 코였다.

그러다 그가 담배를 떨어뜨리고 발로 뭉갰다. 내 뒤에서 가볍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돌아서기에는 늦었다.

무언가 홱 움직였고, 나는 불이 꺼지듯 의식이 나갔다.

<밀고자> 중에서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영상미가 뛰어난 장르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기분이었다. 말로가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쓰러졌던 안개 내린 밤 풍경이 눈 앞에서 출렁거렸다.

 

 소설 속에는 검은 돈과 결탁한 권력, 그것을 쥐고 뒤흔들기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는 극악무도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필립 말로라는 탐정이 소영웅적으로 그려진다. 한낱 사립 탐정에 불과하지만 거들먹거리며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진중하게 상대를 대한다. 돈에 눈 먼 얄팍한 캐릭터도 아니다. ‘정직한 게임’이 아니라면 관여하지 않겠다는 원칙주의자. 레이먼드 챈들러 탐정소설의 품격은 필립 말로라는 인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숨가쁘게 책장이 넘어가는 탐정 소설을 읽으며 그 묘미를 맛보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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